나의 이야기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다(열한 번째)

와야 세상걷기 2015. 8. 12. 17:49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다(열한 번째)

(아산 인주평택 포승화성 서신영흥도, 2015. 3. 2829)

 

瓦也 정유순

  넉 달 만에 긴 동면에서 깨어났다. 201411삽교호방조제에서 열 번째 장정을 마치고, 그곳 건너 아산 인주에서 봄 기지개를 편다. 그러나 북으로 올라오면서 걱정이 깊어진다. 임해공업단지와 각종 시설 들이 들어서면서 자동차 위주의 도로가 발달된 대신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공간이 없거나 협소해 안전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해안으로 접근할 수 있는 지역도 너무 제한적이다. 그래서 너무 아쉽지만 건너뛰면서 걸을 수 있는 곳만 갈 수밖에 없다.

<평택호의 아침>

  먼저 인주면 공세리에 있는 공세리성당으로 간다. 공세리는 조선조 때 정부의 공세창(貢稅倉)이 있어서 얻어진 이름인데, 1895년부터 이곳에서 처음 예배를 보다가 신도수가 점점 늘어나자 당시 드비즈신부가 직접 설계하여 1922년에 고딕식 성당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고 한다.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수려한 자연경관과 잘 어우러져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자주 나온다고도 한다.

<공세리성당>

  낮은 언덕 위에 고풍스런 건물로 수령 23백년 된 느티나무와 팽나무로 둘러싸인 성당은 서해에서 들어오는 첫 관문이며, 아산만을 굽어 볼 수 있는 위치로 아산방조제가 바로 밑이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청매화는 섬진강 매화보다 한 달가량 늦게 아침 햇살에 반갑게 웃는다. 성당 주변으로 십자가의 길이 조성 되어 예수가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고 골고다의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받는 고통이 화강암에 조각그림으로 새겨져 있다.

<성당입구 매화>

<십자가의 짐>

  공세리에서 6떨어진 아산시 영인면에는 1884년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주도했던 고균 김옥균(古筠 金玉均 1851. 21894. 3)’의 유허(遺墟)가 있다. 정변 실패 후 일본 망명생활을 하던 중 중국에 갔다가 조선 자객에 의해 암살당하고 시신은 양화진으로 가져와 또 능지처참을 당했다고 하는데, 사면복권 후 이곳에 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고균은 아직도 못 푼 한이 많은지 봉분의 풀들이 듬성듬성 나있으나, 그래도 묘역은 사대부의 묘역답게 문인석 동자석 산양(山羊)이 좌우 양측에 쌍으로 배열돼 있다.

<김옥균의 묘>

  들어가는 입구 아산현청(縣廳)’ 자리에는 일제 때 민족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세워진 영인초등학교가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비와 함께 서 있고, ‘여민루(慮民樓)’만 이웃의 향교와 함께 외롭게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민루> 

  충남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에는 15981119일에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충무공 이순신의 묘로 간다. ‘아산 온천지역을 지나 음봉쪽으로 오면 어라산(於羅山)’ 자락에 부인 상주방씨(尙州方氏)’와 합장묘로 되어 있다. 묘역에는 정조대왕이 충무공의 공로를 치하하여 세운 어제신도비와 효종 때 영의정 김육(金堉)’이 비문을 지었다는 이충무공신도비등이 있으며 주변의 푸른 소나무가 공의 충절을 이야기 한다.


<충무공 이순신의 묘>

<묘소입구 소나무>

  드디어 충청도를 벗어나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으로 진입한다. ‘포승에는 원효가 당나라로 가던 중 밤에 마신 꿀 같은 물이 아침에 보니 해골 물인 것을 알고 구역질을 하다가, 화엄경에 나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이치를 깨달으며 읊은 것이 원효의 오도송(悟道頌)’이라고 한다. 그 자리에 세운 사찰이 수도사인데, ‘군 기지‘LNG’시설 때문에 지금 위치에 밀려나 있다고 한다.

마음이 생하는 까닭에 가지가지 법이 생기고<心生則種種法生(심생즉종종법생)>,

마음이 멸하면 부처님 모신 감실과 해골이 묻혀 있는 무덤이 다르지 않네<心滅則龕墳不二(심멸즉감분불이)>,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三界唯心(삼계유심)>,

모든 현상이 또한 앎에 기초한다<萬法唯識(만법유식)>,

마음 밖에 아무 것도 없는데<心外無法(심외무법)>

무엇을 따로 구하랴<胡用別求(호용별구)>,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我不入唐(아불입당)”

원효대사(元曉大師)는 이 오도송을 노래하며 당나라에 가지 않고 서라벌로 돌아간다.

<수도사 대웅전>

<원효대사의 오도송>

  포승에서 남양방조제를 지나 화성시 우정면 매향리로 간다. 매향리는 60여 년간 미군사격장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10여 년 전에 사격은 멈추고 평화공원이 조성 되어 그때의 아픔을 기리고 있는데 우리는 지나쳤다. 휴전선보다 더 견고한 철조망이 해안진입을 방해한다. 주민들이 갈 수 없다고 손 사례를 치는데 어느 아주머니께서 들어가는 방법을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들어오면 나갈 수 있겠지 하며 무심코 한참을 걸었으나 도무지 나갈 구멍이 보이질 않는다. 뒤로 돌아와 겨우 출구를 찾아 철조망 밖으로 나간다.

<매향리 평화마을>

  물 빠진 작은 섬들은 포격으로 풀 한 포기 보이질 않는다. “너무나 오랜 세월 폭음에 찢겨 살아온 이 땅/너희의 더러운 이 전쟁 놀음을 이젠 견딜 수 없다//아 언제나 해방이 올까 힘없는 민족 설움이 다할까/오늘도 매향리 이 투쟁의 땅에 꽃은 피고 지는데//향기 없다 꽃향기는 없다/미제 화약 냄새 코를 찌른다(이하생략) ‘매향리의 봄이라는 안치환의 노래가 서럽게 가슴에 와 닿는다.

<포격으로 헐벗은 매향리 섬>

  매향리에서 서신면 궁평리까지 이어지는 9.8화옹방조제를 지나 궁평리해수욕장으로 들어간다. 해변솔밭은 사유지라서 그런지 철조망이 쳐 있으나 다행히 가는 길은 나 있다. 화약 냄새가 나는 것 같은 매향리 해변보다 솔 내음이 더 향기롭다. 솔밭 북쪽 끝에서 백미리로 넘어 가는 곳에 출렁다리가 놓여 있으나 상판의 널빤지가 이 빠지듯 빠져 출입을 막아 건너지 못하고 제수문을 징검다리 삼아 위로 올라간다.

<궁평리 해변>

<백미리로 가는 출렁다리>

  ‘백미리 감투섬으로 가는 길에는 어촌계 수산물 판매장이 있고 솔밭 둑길을 따라 나오니 구조물 철제를 가공하는 큰 공장에서 페인트칠을 하는지 유기용제 냄새가 코를 너무 자극하고 울타리처럼 서 있는 소나무는 회색 빛깔로 변해 있다. 황사의 영향인지 화공약품 영향인지 가늠이 안 되지만 좁은 길을 따라 도로로 나오니 ‘H중공업이라는 간판이 크게 보인다. ‘보는 눈이 적고 외진 곳이라고 환경문제를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첫날을 마무리 한다.

<백미리어촌계 수산시장>

<백미리 갯벌체험장>

  화성시 서신면 송교리 해안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2여 떨어진 곳에 갯고랑 길이 나 있는 서신면 제부리에 제부도가 있다. 모세의 기적으로 알려진 이 바닷길은 하루에 두 번 열리는데 지금은 포장이 되어 있어 자동차로도 통행할 수 있다. 선착장 쪽 산 밑 바다 위로 산책로를 잘 만들어 놓아 걷기에 아주 편하다. 섬 주변은 해수욕장도 있고, 갯벌에서는 가족단위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시설이 되어 있다. 약간의 농경지가 있어 농업을 겸한 어업이 성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서비스업이 더 발달된 것 같다. 남쪽 끝 바위로 돌출된 매바위는 찾아오는 길손을 향해 손을 내민다.

<제부도 산책길>

<제부도 매바위>

  뭍으로 걸어 나와 탄도방조제를 지나 선제대교를 건너 선제도에서 잠시 멈춰 썰물로 목처럼 길게 들어 난 길을 따라 목섬에 간다. 목섬은 무인도로 하루 두 번 바닷물을 갈라 황금빛 모랫길을 만들어 주고 즐거운 추억을 마음에 간직하게 하는 섬 같다. 들어가는 길도 질퍽이는 갯벌이 아니고 특이하게 조개껍질이 대부분인 모랫길이어서 촉감이 아주 좋았다.

<선제도 목섬>

  영흥대교를 건너 진두선착장에서 10리 정도 떨어져 있어서 이름 붙여진 십리포 해수욕장은 폭 30m 길이 1정도의 백사장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소사나무군락지가 눈길을 끈다. 150여 년 전 해풍의 피해를 막기 위해 농민들이 조성한 것으로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고 겨울에는 방풍막이 되어 준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는 6·25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초석역할을 한 곳으로, 전투 시 순국한 해군 영흥지구 전사자와 영흥면 대한청년단 방위대원 14명의 숭고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해군영흥도전적비가 있다.

<십리포해수욕장>

<인천상륙작전전초기지 기념탑>

  다시 되 돌아 나오는 길에 대부도 남쪽 끝에 있는 탄도항에서 마침 바닷길이 열려 있는 누에섬으로 간다. ‘누에섬에는 등대 전망대가 있어 길이 열려 있을 때 주간에만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올라가진 못했다. 해질 무렵의 바닷바람은 옷깃이 펄럭일 정도로 부는데 풍력발전기의 바람개비가 큰 원을 그리며 열심히 돌아간다.

<누에섬 풍력발전기>

  어제 아침 평택호에 아침 해가 비치기 시작할 때 움직이기 시작한 서해안 걷기는 누에섬까지 갖다가 탄도항으로 다시 와서 열한 번째를 마감한다. 한 획으로 이어진 서해안 길을 원했으나 조건은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걸을 수 없는 곳을 건너 뛰다보니 갑자기 속도가 빨라진 것 같다. 그러나 남은 일정도 초심으로 돌아가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누에섬 등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