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다(열한 번째)
(아산 인주→평택 포승→화성 서신→영흥도, 2015. 3. 28∼29)
瓦也 정유순
넉 달 만에 긴 동면에서 깨어났다. 2014년 11월 ‘삽교호방조제’에서 열 번째 장정을 마치고, 그곳 건너 ‘아산 인주’에서 봄 기지개를 편다. 그러나 북으로 올라오면서 걱정이 깊어진다. 임해공업단지와 각종 시설 들이 들어서면서 자동차 위주의 도로가 발달된 대신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공간이 없거나 협소해 안전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해안으로 접근할 수 있는 지역도 너무 제한적이다. 그래서 너무 아쉽지만 건너뛰면서 걸을 수 있는 곳만 갈 수밖에 없다.
<평택호의 아침>
먼저 인주면 공세리에 있는 ‘공세리성당’으로 간다. 공세리는 조선조 때 정부의 공세창(貢稅倉)이 있어서 얻어진 이름인데, 1895년부터 이곳에서 처음 예배를 보다가 신도수가 점점 늘어나자 당시 ‘드비즈’신부가 직접 설계하여 1922년에 고딕식 성당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고 한다.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수려한 자연경관과 잘 어우러져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자주 나온다고도 한다.
<공세리성당>
낮은 언덕 위에 고풍스런 건물로 수령 2∼3백년 된 느티나무와 팽나무로 둘러싸인 성당은 서해에서 들어오는 첫 관문이며, 아산만을 굽어 볼 수 있는 위치로 아산방조제가 바로 밑이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청매화’는 섬진강 매화보다 한 달가량 늦게 아침 햇살에 반갑게 웃는다. 성당 주변으로 ‘십자가의 길’이 조성 되어 예수가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고 골고다의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받는 고통이 화강암에 조각그림으로 새겨져 있다.
<성당입구 매화>
<십자가의 짐>
공세리에서 6㎞ 떨어진 아산시 영인면에는 1884년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주도했던 ‘고균 김옥균(古筠 金玉均 1851. 2∼1894. 3)’의 유허(遺墟)가 있다. 정변 실패 후 일본 망명생활을 하던 중 중국에 갔다가 조선 자객에 의해 암살당하고 시신은 양화진으로 가져와 또 능지처참을 당했다고 하는데, 사면복권 후 이곳에 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고균은 아직도 못 푼 한이 많은지 봉분의 풀들이 듬성듬성 나있으나, 그래도 묘역은 사대부의 묘역답게 ‘문인석 동자석 산양(山羊)석’이 좌우 양측에 쌍으로 배열돼 있다.
<김옥균의 묘>
들어가는 입구 ‘아산현청(縣廳)’ 자리에는 일제 때 민족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세워진 ‘영인초등학교’가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비와 함께 서 있고, ‘여민루(慮民樓)’만 이웃의 향교와 함께 외롭게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민루>
충남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에는 1598년 11월 19일에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충무공 이순신의 묘로 간다. ‘아산 온천지역’을 지나 ‘음봉’ 쪽으로 오면 ‘어라산(於羅山)’ 자락에 부인 ‘상주방씨(尙州方氏)’와 합장묘로 되어 있다. 묘역에는 정조대왕이 충무공의 공로를 치하하여 세운 ‘어제신도비’와 효종 때 영의정 ‘김육(金堉)’이 비문을 지었다는 ‘이충무공신도비’ 등이 있으며 주변의 푸른 소나무가 공의 충절을 이야기 한다.
<충무공 이순신의 묘>
<묘소입구 소나무>
드디어 충청도를 벗어나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으로 진입한다. ‘포승’에는 ‘원효’가 당나라로 가던 중 밤에 마신 꿀 같은 물이 아침에 보니 ‘해골 물’인 것을 알고 구역질을 하다가, 화엄경에 나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이치를 깨달으며 읊은 것이 ‘원효의 오도송(悟道頌)’이라고 한다. 그 자리에 세운 사찰이 ‘수도사’인데, ‘군 기지’와 ‘LNG’시설 때문에 지금 위치에 밀려나 있다고 한다.
“마음이 생하는 까닭에 가지가지 법이 생기고<心生則種種法生(심생즉종종법생)>,
마음이 멸하면 부처님 모신 감실과 해골이 묻혀 있는 무덤이 다르지 않네<心滅則龕墳不二(심멸즉감분불이)>,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三界唯心(삼계유심)>,
모든 현상이 또한 앎에 기초한다<萬法唯識(만법유식)>,
마음 밖에 아무 것도 없는데<心外無法(심외무법)>
무엇을 따로 구하랴<胡用別求(호용별구)>,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我不入唐(아불입당)”
원효대사(元曉大師)는 이 오도송을 노래하며 당나라에 가지 않고 서라벌로 돌아간다.
<수도사 대웅전>
<원효대사의 오도송>
포승에서 남양방조제를 지나 화성시 우정면 ‘매향리’로 간다. 매향리는 60여 년간 ‘미군사격장’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10여 년 전에 사격은 멈추고 ‘평화공원’이 조성 되어 그때의 아픔을 기리고 있는데 우리는 지나쳤다. 휴전선보다 더 견고한 철조망이 해안진입을 방해한다. 주민들이 갈 수 없다고 손 사례를 치는데 어느 아주머니께서 들어가는 방법을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들어오면 나갈 수 있겠지 하며 무심코 한참을 걸었으나 도무지 나갈 구멍이 보이질 않는다. 뒤로 돌아와 겨우 출구를 찾아 철조망 밖으로 나간다.
<매향리 평화마을>
물 빠진 작은 섬들은 포격으로 풀 한 포기 보이질 않는다. “너무나 오랜 세월 폭음에 찢겨 살아온 이 땅/너희의 더러운 이 전쟁 놀음을 이젠 견딜 수 없다//아 언제나 해방이 올까 힘없는 민족 설움이 다할까/오늘도 매향리 이 투쟁의 땅에 꽃은 피고 지는데//향기 없다 꽃향기는 없다/미제 화약 냄새 코를 찌른다(이하생략) ‘매향리의 봄’이라는 안치환의 노래가 서럽게 가슴에 와 닿는다.
<포격으로 헐벗은 매향리 섬>
매향리에서 서신면 궁평리까지 이어지는 9.8㎞의 ‘화옹방조제’를 지나 ‘궁평리해수욕장’으로 들어간다. 해변솔밭은 사유지라서 그런지 철조망이 쳐 있으나 다행히 가는 길은 나 있다. 화약 냄새가 나는 것 같은 매향리 해변보다 솔 내음이 더 향기롭다. 솔밭 북쪽 끝에서 ‘백미리’로 넘어 가는 곳에 ‘출렁다리’가 놓여 있으나 상판의 널빤지가 이 빠지듯 빠져 출입을 막아 건너지 못하고 제수문을 징검다리 삼아 위로 올라간다.
<궁평리 해변>
<백미리로 가는 출렁다리>
‘백미리 감투섬’으로 가는 길에는 ‘어촌계 수산물 판매장’이 있고 솔밭 둑길을 따라 나오니 구조물 철제를 가공하는 큰 공장에서 페인트칠을 하는지 유기용제 냄새가 코를 너무 자극하고 울타리처럼 서 있는 소나무는 회색 빛깔로 변해 있다. 황사의 영향인지 화공약품 영향인지 가늠이 안 되지만 좁은 길을 따라 도로로 나오니 ‘H중공업’이라는 간판이 크게 보인다. ‘보는 눈이 적고 외진 곳이라고 환경문제를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첫날을 마무리 한다.
<백미리어촌계 수산시장>
<백미리 갯벌체험장>
화성시 서신면 송교리 해안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2㎞여 떨어진 곳에 갯고랑 길이 나 있는 서신면 제부리에 ‘제부도’가 있다. 모세의 기적으로 알려진 이 바닷길은 하루에 두 번 열리는데 지금은 포장이 되어 있어 자동차로도 통행할 수 있다. 선착장 쪽 산 밑 바다 위로 산책로를 잘 만들어 놓아 걷기에 아주 편하다. 섬 주변은 해수욕장도 있고, 갯벌에서는 가족단위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시설이 되어 있다. 약간의 농경지가 있어 농업을 겸한 어업이 성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서비스업이 더 발달된 것 같다. 남쪽 끝 바위로 돌출된 ‘매바위’는 찾아오는 길손을 향해 손을 내민다.
<제부도 산책길>
<제부도 매바위>
뭍으로 걸어 나와 ‘탄도방조제’를 지나 선제대교를 건너 ‘선제도’에서 잠시 멈춰 썰물로 목처럼 길게 들어 난 길을 따라 ‘목섬’에 간다. 목섬은 무인도로 하루 두 번 바닷물을 갈라 황금빛 모랫길을 만들어 주고 즐거운 추억을 마음에 간직하게 하는 섬 같다. 들어가는 길도 질퍽이는 갯벌이 아니고 특이하게 조개껍질이 대부분인 모랫길이어서 촉감이 아주 좋았다.
<선제도 목섬>
영흥대교를 건너 ‘진두선착장’에서 10리 정도 떨어져 있어서 이름 붙여진 ‘십리포 해수욕장’은 폭 30여m 길이 1㎞ 정도의 백사장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소사나무’ 군락지가 눈길을 끈다. 150여 년 전 해풍의 피해를 막기 위해 농민들이 조성한 것으로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고 겨울에는 방풍막이 되어 준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는 6·25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초석역할을 한 곳으로, 전투 시 순국한 해군 영흥지구 전사자와 영흥면 대한청년단 방위대원 14명의 숭고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해군영흥도전적비’가 있다.
<십리포해수욕장>
<인천상륙작전전초기지 기념탑>
다시 되 돌아 나오는 길에 대부도 남쪽 끝에 있는 ‘탄도항’에서 마침 바닷길이 열려 있는 ‘누에섬’으로 간다. ‘누에섬’에는 등대 전망대가 있어 길이 열려 있을 때 주간에만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올라가진 못했다. 해질 무렵의 바닷바람은 옷깃이 펄럭일 정도로 부는데 풍력발전기의 바람개비가 큰 원을 그리며 열심히 돌아간다.
<누에섬 풍력발전기>
어제 아침 ‘평택호’에 아침 해가 비치기 시작할 때 움직이기 시작한 서해안 걷기는 ‘누에섬’까지 갖다가 ‘탄도항’으로 다시 와서 열한 번째를 마감한다. 한 획으로 이어진 서해안 길을 원했으나 조건은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걸을 수 없는 곳을 건너 뛰다보니 갑자기 속도가 빨라진 것 같다. 그러나 남은 일정도 초심으로 돌아가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누에섬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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