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휴전선 155마일을 걷다(첫 번째)

와야 세상걷기 2015. 8. 12. 18:07

휴전선 155마일을 걷다(첫 번째)

(반구정 숭의전, 2015. 5. 9 5. 10)

瓦也 정유순

   지난 달 김포 월곶에서 서해안 걷기를 완주하고, 강화읍 연미정에서 조강포를 비롯한 유도, 임진강 포구, 예성강 쪽 벽란도 방향, 개성의 송악산 쪽을 바라보았고, 바다 건너 연백평야를 보면서 언젠가는 우리가 꼭 가야할 길임을 다짐하면서 이제는 발길을 휴전선 155마일로 돌렸다.


<민통선 철조망>


 <옛 자유의 다리>

   걷기에 앞서 문산에 있는 반구정(伴鷗亭)’에서 여정 끝까지 도반들의 무사도보(無事徒步)를 기원하는 고유제를 지냈다. 반구정은 조선 세종 때 명재상을 지낸 황희의 정자로 은퇴 후 기러기와 함께 벗 삼아지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임진강 하류 절벽 위에 세워져 있다. 정자로 가는 길목에는 황희의 유품을 전시한 기념관과 영당을 모신 곳도 있고, 선생의 동상이 서 있다. 그러나 북을 향해 쳐진 철조망이 이내 답답증을 유발 시킨다. 강원도 고성까지 가는 길에 이 철조망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반구정>

    임진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니 임진강역이 나오고 북으로 달리고 싶은 철마는 총탄에 맞은 자국을 안은 채 북을 향해 숨을 헐떡인다. 조선 때는 임진나루에서 배를 타고 북으로 갔건만 지금은 끊어진 철교 교각만 남아 분단의 비극을 보여주고 있고, 망배단의 상석은 더 쓸쓸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노래비에서는 애절한 목소리가 배어 나온다. 임진각 자유의 다리에서 북녘 땅을 바라보다 씁쓸한 마음을 안고 화석정으로 간다.


<총탄을 맞은 기관차>


<망향의 노래비> 

   화석정은 율곡 이이가 임진왜란 때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 선조를 위해 정자에 불을 질러 뱃길을 밝혀 주었다는 곳이다. 율곡은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출생했지만 아버지의 고향은 이곳 율곡리이다. 그리고 고향 이름을 따서 아호로 삼았다. 8세에 지었다는 시(八歲賦詩)가 눈에 띤다.

   숲에는 가을이 저물어 가매 / 시인의 시정은 그지없어라(林亭秋已晩 / 騷客意無窮)

   물빛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 단풍은 햇빛 따라 불타올라라(遠水連天碧 / 霜楓向日紅)

   산에는 둥근 달이 솟아오르고 / 강에는 끝없는 바람 어려라(山吐孤輪月 / 江含萬里風)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 저무는 구름 새로 소리 끊겨라(塞鴻何處去 / 聲斷暮雲中)

오래오래 장수하여 명석한 두뇌로 임금을 잘 보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겨두고 황포돛대가 있는 두지나루터로 발품을 판다.


<화석정>

   임진강을 가로질러 북으로 향하는 다리와 도로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분명 길 끝이나 저 산 너머에는 우리와 똑 같은 동포들이 살고 있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거늘, 구름은 바람타고 새들과 같이 자유롭게 넘나드는데 우리는 가지 못하고 가장자리만 맴돌면서 고개만 길게 뽑는다.


<임진강 건너 북으로 가는 다리>

   경애왕의 포석정 비극으로 졸지에 왕이 된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는 고려태조 왕건에게 신라라는 천년사직을 고스란히 받쳐 편하게 살다가 경주 밖에 묻힌 유일한 왕이 되었다. 정말 본인의 능력이 없어서인지 또는 시대적 배경이 그래서인지 회한이야 많겠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변명도 없이 임진강을 바라보며 누워 있다.


<경순왕릉>

   연천군 장남면 고량포리 경순왕릉을 보고 장남면 원당3리에 있는 연천호로고루(漣川瓠蘆古壘)’로 간다. 임진강 북쪽 기슭의 현무암 단애 위에 있는 삼각형의 고구려의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각축을 벌렸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강변의 노을은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길게 눕는다.

 

<연천호로고루(漣川瓠蘆古壘)>

   오늘은 적성면 두지리 삼거리에서 임진강변을 따라 활보를 시작한다. 장남대교 밑으로 어제 들렸던 두지나루 황포돛대가 아침햇살을 머금는다. 강둑을 따라 걷던 길이 갑자기 막혀 절벽 같은 둑 밑으로 밀어 낸다. 강 옆 밭에는 의 새싹이 돋아나와 고개를 쳐든다. 어린잎이 자색으로 고구마 순 같았는데 다른 도반께서 라고 일일이 가르쳐 주신다. 모든 생물들의 아주 어릴 적 모습은 치장을 하지 안 해도 귀엽고 예쁘다.


<두지나루 황포돛대>

   밭 끝을 지나자 묵은 갈대가 새순에게 자리를 양보하는지 옆으로 누워 발길을 더디게 한다. 강 건너에는 번지점프대가 손짓 하는데, 우리는 길 없는 길을 만들어 가며 거친 길을 걷는다.


 <번지점프대> 

  다시 강둑으로 올라갈 때에는 늘어진 밧줄을 타고 유격훈련 받듯 절벽을 기어오른다. 마을에서 밭일을 하던 할아버지는 어디서 왔냐고 물어 보신다. 걸어가는 우리가 신기하신 가 보다. 논에서는 벌써 모내기가 시작되었고 밭에는 봄갈이한 싹들이 고개를 내민다. 임진강변을 따라 두 시간 넘게 걸었다. 잠시 목을 축이며 숨을 고르고 다시 숭의전으로 향한 먼 길을 재촉한다.


 <임진강> 

   숭의전은 조선태조의 명으로 처음에는 고려태조와 7왕을 제사 지내던 사당으로, 나중에는 태조, 현종, 문종, 원종 4왕만 봄·가을로 제사를 모시도록 하였으며, 문종 대에 이르러 고려 충신 정몽주 등 16분의 제사를 모시도록 하였고, 고려 왕족의 후손들로 하여금 관리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안내판에는 조선 초기 고려 왕족 후손들의 수난사가 눈물겹게 쓰여 있다.


<숭의전 전경> 

   어제부터 평화누리 길 8코스에서 시작하여 11코스 초입까지 걸었다. 숭의전은 평화누리 길 11코스 시작점으로 오후에도 연천당포성까지 약2km 정도 걷는다. 이성은 삼국시대의 연천호로고루와 마찬가지로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성이며 고구려가 축조를 했고, 고려와 조선조까지 성으로 이용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성벽 위의 어린 팽나무가 외롭게 전설을 지키고 있다. 멀리 남쪽으로 감악산(675m)이 뚜렷하게 보인다.


<연천당포성>

   이제 다시 파평으로 가서 고려 때 장군 윤관 묘역으로 간다. 윤관은 여진을 정벌하며 동북9성을 쌓고 오랑캐의 침입을 막았던 인물로 파평윤씨(坡平尹氏)’ 중시조라고 한다. 그리고 함흥 광포에서 거란에 포위되어 탈출할 때 잉어가 무리를 지어 다리를 놓아 강을 무사히 건너 목숨을 건졌다는 전설이 있어 지금도 파평윤씨들은 잉어요리를 금한다고 한다.


<묘역 표지석>

   묘역은 왕릉에만 있는 무인석(武人石)을 비롯한 석물들이 화려하게 묘지를 지키고 있다. 둘러 쳐진 담장도 꽤 높다. 입구의 화려한 철쭉도 겹꽃으로 보기 드문 꽃이다. 아마 후손들이 자랑스러운 조상을 기리기 위해 무척이나 신경을 많이 쓴 것 같다.


<윤관묘역 전경>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가까이에 있는 용미리 마애이불입상(龍尾里 磨崖二佛立像)’을 보러 간다. 자연 암반을 이용해 우람하게 새겼는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왼쪽의 불상은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로 목이 둥글고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으며 남상(男像)을 상징하고, 오른쪽 불상은 4각 갓을 쓴 방립불(方笠佛)로 손을 합장 하고 있으며 여상(女像)을 상징한다고 한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고려 때 선종은 후손이 없어 원신궁주를 셋째부인으로 맞이하였으나, 원신궁주마저 아기가 없어 걱정하던 차에 궁주의 꿈에 나타난 장지산 아래 큰 바위에 불상을 새겼더니 아들을 낳았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여 예불객의 발길이 계속 이어진다고 한다. 아마 장지산용암사도 불상의 관리를 위해 이때 세워지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입구의 하얀모란은 활짝 웃으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라고 비는 것 같다.


<장지산용암사 일주문>

   한국전쟁 후 62년간 휴전선에 가려진 우리의 역사와 유물들이 더 흥미롭고 기대를 크게 한다. 그리고 특히 서해안과 휴전선은 우리나라 생태 축을 연결하는 중심으로 자연환경에 미칠 영향이 대단하다. 뭇 생명들의 보금자리로 자리매김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하얀 모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