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천리 길을 걷노라면(두 번째)
(무주 부남→금산 제원면, 2016. 6. 25∼6. 26)
瓦也 정유순
금강 천리 길을 걷기 위해 무주군 부남면으로 가기 전에 꼬불꼬불 구절양장(九折羊腸) 고갯길을 따라 적상산(赤裳山)을 둘러보러 간다. 덕유산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적상산(1,034m)은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것이 마치 붉은 치마를 두른 모습과 같다하여 적상산으로 부른다고 하며 한국 100경중의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적상산 원경>
산 자체로 아름다운 적상산이지만 역사적으로도 적상산은 보호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1614년(광해군 6)에 설치된 적상산 사고(史庫) 때문이다. 전주에 보관 중이던 사고가 임진왜란 때 실록을 제외하고 나머지가 전소되자, 선조가 실록 3부를 더 인쇄해 전주본 원본과 교정 인쇄본을 합쳐 실록 5부를 만들어 춘추관(春秋館), 강화 마니산(摩尼山), 태백산(太白山), 오대산(五臺山), 묘향산(妙香山) 등에 각각 1부씩 나눠 보관해 오다가 광해군 6년에 실록전을 적상산에 건립하고 일부를 옮겨 보관하였고, 인조 때 묘향산 사고 전부 옮겨 사고의 완전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진열된 조선왕조 실록 사본>
이와 관련하여 건립연대는 서로 다르지만 적상산성은 고려 때 최영(崔瑩)이 건의하여 축조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조선 세종 때 최윤덕(崔潤德)도 건의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여러 가지 종합해 볼 때 고려 말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성의 높이는 보통사람 키의 가슴정도이나, 산세가 워낙 험하여 밖에서 넘어오기는 무척 힘들어 사고를 지키는 중요한 방어막이 되었으며,
<적상산성>
안국사(安國寺)도 1277년(고려충렬왕 3)에 월인(月印)이 지었다고 하나, 조선 태조 때 자초(自超)가 적상산성을 쌓으면서 지었다고도 전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승병들의 거처로 쓰이기도 했으며, 호국사(護國寺)와 함께 적상산 사고의 수호사찰로의 역할을 해왔다.
<안국사 극락전>
고종 9년(1872년)에 실록전과 선원각을 개수하였으나, 1910년 조선의 주권 강탈한 일제는 실록을 ‘구황실문고(舊皇室文庫)’로 편입해 장서각에 보관해 오다가 끈으로 맨 책들이 흩어져 훼손이 발생하였고, 한국전쟁 때 분실되었다. 실록전과 선원각의 건물이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선원각은 안국사 경내로 옮겨져 천불전(千佛殿)으로 전해온다고 한다.
<안국사 안내판>
지금의 사고와 안국사는 1990년대 적상산 양수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수몰되어 옮겼는데, 안국사는 1949년에 불타 없어진 호국사 터로 이전을 하였다고 하며, 적상산사고도 현재의 자리에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을 보관하는 선원각과 실록을 보관하는 사각 두 채의 큰 서고로 지어졌다.
<적상산 서고 실록각(사각)>
<적상산 사고 선원각>
조선의 역사는 기록의 역사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산정호수인 적상호(赤裳湖)와 전망대를 뒤로하고 서둘러 무주군 부남면으로 이동하여 상굴교를 지나 굴암로를 따라 ‘연어가 물살을 거스르고 상류로 올라가듯’ 가파른 산과 절벽에 길을 내어 만든 무주의 금강 벼룻길을 상류 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적상호>
벼룻길은 강가나 바닷가의 낭떠러지로 통하는 비탈길을 이르는 것으로, 마을주민들은 이 길을 ‘보뚝길’이라고도 하는데 원래는 굴암마을 대뜰에 물을 대기 위해서 일제강점기에 놓았던 농수로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사람들이 왕래하여 길이 되었다고 한다. 주변 산에는 녹음이 짙어 푸르다 못해 검어지고, 강물에 비치는 산 그림자는 환상이다.
<금강>
<벼룻길>
벼룻길에는 끝이 뾰족한 각시봉이 있고, 바위 옆 밑으로 사람이 정으로 구멍을 파낸 각시바위 동굴 길이 있다. “대유리 봉길마을에서 시집 와 아이를 낳지 못해 구박 받던 며느리가 강 건너 벼랑에서 기도하다 함께 솟아오른 바위를 ‘각시바위’라고도 하고, 또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목욕하다 옷을 잃어버려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려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함께 내려오는데, 선녀가 목욕하던 이곳을 ‘각시소’라고 부른다.”
<각시바위>
특히 각시바위 동굴 길은 높이 약1.5m 정도이고 길이 약10여m로 몸을 낮춰야만 지날 수 있다. 그리고 바닥에는 발목이 잠길만한 웅덩이에 물이 고여 있어 여간 조심스럽다. 그래서 꼿꼿이 서서 걷기가 불편하여 허리를 굽혀야 하고 바닥 물의 깊이를 헤아리며 조심조심 지나간다. 인생행로도 때에 따라 굽힐 줄 알고 조심하면 험한 길도 쉽게 갈 수 있다는 지혜를 아주 조심스럽게 말없이 알려 준다.
<각시바위 동굴>
부남면소재지가 있는 대소리에는 하천변으로 감나무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고수부지 끝 물가에는 래프팅을 즐기는 젊음의 함성이 고동을 친다. “맑은 금강이 유유히 흐르는 엄마 품에 안긴 듯 고향에 온 듯 정겨운 곳, 누구라도 찾아오면 젊음과 꿈과 낭만을 맘껏 즐기고, 언제라도 찾아오면 가슴 뜨거운 젊음의 열정으로 아름다운 추억을 아로새겨 가리” 금강 변 수려한 부남을 예찬하는 이곳에서 오전을 마무리한다.
<감나무공원>
<래프팅 선착장>
다시 하류로 이동하여 상굴교를 지나 굴암삼거리에서 무주 ‘예향천리 금강변마실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무주읍 잠두마을 건너에는 봄이면(4월 중순) 복사꽃과 벚꽃, 조팝꽃이 휘 늘어져 뭇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무릉도원 십리길’이 있어 그 길로 간다. 잠두마을은 강물이 휘돌아 툭 튀어 나온 지형의 모습이 누에머리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잠두마을 지도>
지금은 봄의 꽃 대신 푸른색 터널을 만들어 주어 시원하고, 강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고 온통 푸른 세상이다. 노를 열심히 젓는 래프팅 보트만 신이 나서 물살을 열심히 가른다.
<금강-래프팅>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금강 물을 힐끔힐끔 훔쳐보며 하천부지로 내려와 살이 쪄가는 사과밭을 지나 용포교로 향한다. 일본강점기 때 건설된 용포교가 놓인 이곳은 무주와 금산을 이어주던 큰 길목이었다.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나무배가 두 지역을 이어주는 유일한 수단 이었으며, 그 나무배 위에 버스와 우마차를 싣고 건넜다 하니 그 풍경은 가히 장관이었으리라.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일부 파손되기도 했으나 보수가 되어 제 기능을 다하고 있어 흐르는 강물과 함께 우리 삶의 질곡과 기쁨의 세월을 오롯이 기억하고 서 있는 것만 같다.
<용포교>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 밑에는 캠핑 족들이 천렵(川獵)하느라 바쁘고 길옆의 칡넝쿨은 올가미가 되어 내발을 잡으려 한다. 데크로 정비된 길에는 애기주먹만 하게 열매가 맺힌 으름덩굴이 진을 치고 가시덩굴들이 경계를 이룬다. 절벽 아래 강물은 힘을 더하여 강한 소리로 속도를 낸다. 무주읍에서 흘러오는 남대천도 금강과 합류하여 힘을 보탠다.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
<으름 열매>
남대천은 대덕산(大德山)과 민주지산(珉周之山) 등에서 발원하여 무주읍을 지나 금강 상류로 흘러든다. 하천의 상류는 무주구천동이 포함되는 덕유산국립공원에 속하여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나제통문(羅濟通門)과 아침에 들렀던 적상산(赤裳山) 사고(史庫) 등의 유물이 있다.
<남대천(좌)과 금강(우) 합류지점>
남대천 합류지점을 지나 산 비탈길 따라 하류로 조금 가니까 무주와 금산의 경계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귀엽게 서있다. 다시 하천부지로 내려와 가끔 길바닥에 물이 찬 길을 따라 걷는다. 강을 경계로 금산군 부리면 방우리를 걷고 있다. 뱀처럼 꼬불꼬불한 강을 따라 앞으로 나갔으나 길이 자꾸 끊긴다. 다시 뒤돌아 나와 어쩔 수 없이 앞섬으로 이동한다. 방우리는 금강 변에 자리 잡은 금산군 땅으로 군청을 가려면 무주를 거쳐야 갈 수 있어 주민들도 이러한 점이 불편하여 무주군으로 행정구역을 바꿔 달라고 한단다.
남대천과 합류한 금강이 충남 금산군 부리면 방우리로 올라갔다가 다시 무주읍 내도리 앞섬으로 내려와 다시 한 번 휘감고 올라가 방우리를 거쳐 수통리 적벽강으로 이어진다. 무주읍 향로봉에 올라 산들이 금강을 끼고 도는 모습을 바라보면 육지 속의 섬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앞섬’이다.
<앞섬 안내판>
앞섬은 토지가 비옥하여 어떤 농사를 지어도 잘 자란다고 한다. 사과 밭과 복숭아 밭 과수원이 넓게 자리한다. 밭의 다른 작물들도 무성하게 잘 자란다. 앞섬대교 건너 자동차도 오가는 강둑길을 따라 다시 방우리쪽으로 올라갔으나 다시 길이 막힌다. 보(洑) 밑으로 수초가 잘 발달된 하천부지를 따라 다시 앞섬으로 되돌아와 칠암산(漆岩山) 밑 후도교까지 갔다가 되돌아 나와 앞섬대교를 건너와서 어죽으로 오늘을 마무리 한다.
<방우리 쪽 보>
<앞섬 하천부지 미루나무 길>
<앞섬을 둘러 싼 산>
<자두>
오늘은 충남 금산 땅을 걷기 위해 부리면 수통리에 있는 적벽강 적벽교에서 첫발을 내딛는다. 무주 남대천과 합류한 금강이 무주의 앞섬과 금산의 방우리를 휘돌아 층암절벽(層巖絶壁)으로 이루어진 산 사이를 뚫고 이곳 수통리에서 적벽강을 이룬다. 아침에 녹음으로 짙게 물든 산이 비치는 적벽강은 고요한 아침의 잔잔한 호수다.
<적벽강>
강변 하천부지에는 수생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그 사이를 비집고 흐르는 강물은 멀리 은빛 물결로 반짝인다. 간간이 자동차가 오가는 강둑길을 거닐며 병풍처럼 둘러 쳐진 산들이 줄을 이어 적벽을 이룬다. 수통대교 건너기 전에 금강사(錦江寺)라는 절이 있어 둘러보았지만 별다른 불교 시설이 없는 것으로 보아 최근에 새로 생긴 절 같다.
<적벽강>
<금강사 표지석>
수통대교 건너에는 금산의 집성(集姓)인 모(某)씨의 사당(祠堂)이 길라잡이를 한다. 사당 앞 모정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강변도로를 따라 계속 전진한다. 금산에는 우리나라 굴지의 타이어 공장이 있는데, 이 회사의 ‘아카데미하우스’가 강변에 넓게 자리한다.
<송천사당>
하천변 고수부지(高水敷地)에는 휴일을 틈타 캠핑 나온 사람들이 텐트촌을 이루고 일부는 다슬기 채취와 천렵(川獵)에 여념이 없다. 주토천 합류지점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무지개다리가 나온다. 무지개다리는 아치형 홍교(虹橋)가 몇 번이고 반복하여 세어 봐도 7개가 아니라 6개로 이어져 있는 것 같다. 아마 일곱 가지 무지개 색 때문에 생긴 착각 같다.
<무지개다리와 수변>
오전을 마감하기 전에 금산군 남이면에 있는 ‘진악산보석사(進樂山寶石寺)’에 들른다. 진악산(732m) 남동쪽 기슭에 위치한 보석사는 886년(신라 헌강왕 12년)에 조구대사가 창건한 역사 깊은 절이다. 그리고 창건 당시 앞산에서 채굴된 금으로 불상을 주조(鑄造) 하였다 하여 보석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일주문을 지나 일천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은행나무로 가는 길목은 울창한 숲과 암석이 맑은 시냇물과 어울려 속세의 근심을 잠시 잊게 하는 것 같다.
<진악산보석사 일주문>
<보석사 대웅전>
특히 절 입구에 서있는 은행나무는 높이 40m, 흉고둘레 10.4m가 되는 나이 1,1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나무가 오래되어 위로 뻗은 가지가 땅으로 뻗었고, 다시 그 곳에서 가지가 자라 오르고 있으며, 뿌리가 100여 평에 걸쳐 땅속에 퍼져있다. 장엄하고 위압적인 외형을 갖추고 있으며, 중심가지는 부러지지 않고 남아 있어 높이를 자랑하고 있다. 이 나무는 조구대사가 보석사 창건 당시 심었다고 전해지며, 마을이나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에는 소리 내어 울어줌으로 재난에 대비하는 수호신으로 전해진다. 매년 음2월 15일(경칩)에는 신도들이 은행나무 앞에서 대신제를 지낸다고 한다.
<보석사 은행나무>
보석사를 나와 시오리쯤 떨어진 금산인삼시장으로 나와 인삼튀김을 안주 삼아 인삼막걸리로 목을 축인 후, 산 중턱에서 인공폭포가 떨어지는 제원면 천내리로 이동하여 ‘도리뱅뱅이’와 민물매운탕으로 금강의 맛을 만끽한다.
<천내리-인공폭포>
오후에는 제원면 용강리에 있는 마달피산 아래 삼육대학교청소년수련원에서 일정을 시작한다. 이 수련원이 막다른 길목이라 더 이상 들어 갈 수가 없다. 갑자기 들어 닥치자 관리하신 분이 허둥지둥 뛰어 나오며 용건을 물어본다. 이 수련원은 강변에 숲이 어우러진 배산임수(背山臨水)형의 천혜의 절경에 자리 잡은 것 같다.
<삼육대학교 청소년수련원>
마달피휴게소를 출발하여 수초가 잘 발달된 강물의 흐름에 따라 우리도 흐른다. 인삼밭 사이로 더덕과 하수오 농장도 보이고 사과가 익어가는 과수원도 보인다. 유유히 흐르는 금강은 주변의 비옥한 토지를 적시며 풍요롭게 해준다. 금산(錦山)은 금수강산(錦繡江山)의 줄임말이란 게 금산군민은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이 굳게 믿고 있듯이 주변의 산과 강이 그야말로 비단에 수(繡) 놓은 것처럼 아름답다.
<마달피산 아래 금강>
꿈속에서 꿈길을 걷는 양 공중을 날 듯 발걸음을 가볍게 걷는데 제원대교 못 미쳐 닥실나루 표지석이 나온다. 닥실나루는 제원대교가 들어서기 전에는 전라∙충청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고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호남으로 쳐 들어가는 만여 명의 왜적들과 이곳을 방어하던 금산군수를 비롯한 육백여 명의 군사가 접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아군들이 모두 전사하였다 한다.
<닥실나루 표지석>
제원대교를 건너 충북 영동방향으로 강을 따라 간다. 천내나루터를 지나 영동 쪽으로는 도로공사가 한창이고, 산 밑으로 새로 터널을 뚫는다. 점심때 물을 뿜어내던 인공폭포도 물길이 멈췄으나 금강은 말이 없다. 조금 더 내려가자 어제 우리가 잠을 잤던 금산 ‘꿈나래직업진로체험원’ 입구가 보인다. 숙소는 영동군과 경계를 이루는 월영산(月影山, 529m) 아래에 있다.
<제원대교>
<도로공사 현장>
강변 캠핑장 소나무 아래에는 자연이 다듬은 수석이 자태를 자랑하고, 공사로 걷기가 불편한 도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충남 금산군이 끝나고 충북 영동군 양산면 가선리가 나온다. 이곳도 월영산 자락으로 대보름날 이곳에 뜨는 달을 보고 그해 농사를 점치며 풍년을 기원했다는 곳에서 풍성한 다음 달을 기약한다.
<캠핑장 수석>
<충북 도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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