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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의인 정세권(鄭世權)

와야 세상걷기 2025. 3. 29. 21:46

 

조선의 마지막 의인 정세권(鄭世權)

瓦也 정유순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석정 보름 우물 옆 골목 안에 자리한 한옥역사관에서는 도시형 한옥과 북촌 탄생의 역사를 찾아볼 수 있다. 그중 북촌한옥마을은 서울의 대표적인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서울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북촌한옥마을은 필수 도보 여행지로도 인기가 있어 주말이면 방문객들로 거리를 메우고, 사람이 모이면서 상권이 형성되어 새로운 문화 공간이 되었다. 북촌한옥마을의 성공을 기점으로 인근 서촌, 익선동 등 인근 한옥마을 역시 새로운 여행지로 활기를 얻고 있다.

 

<석정보름우물>

이런 지금의 북촌한옥마을 있게 한 인물이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상 최초의 부동산 개발업자이자 건축사업가이며 민족주의자였던 정세권이 그 주인공이다. 기농 정세권(基農 鄭世權, 1888∼1965)은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진주(晉州)로 조선 단종 때 우의정을 지낸 정분(鄭苯)의 15대손으로 알려졌고,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집안은 이미 몰락하여 농업과 어업으로 생계를 잇고 있었다고 한다.

<서울 북촌한옥역사관>

그는 5세 되던 1892년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으며, 어려서 총명하여 12세 되던 1899년 진주백일장에서는 장원을 했다. 진주낙육고등사범학교(晉州樂育高等師範學校)의 3년 과정을 1년 만에 마쳤다. 졸업 직후인 1905년 기자릉(箕子陵)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며, 1910년에 하이면장이 되어 주위의 놀라움과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일제의 녹을 먹는 것에 회의를 느껴 1912년에 사임하였고, 한동안 고향에서 평범한 생활을 했다.

<정세권 - 네이버캡쳐>

북촌한옥마을 형성하게 된 배경에는 조선시대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종묘 사이에 위치하여 왕족들과 고관대작들의 거주지로 유명했다. 북촌은 지금의 가회동, 계동, 삼청동, 안국동, 원서동 일대로 조선의 도성 한양의 하천인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청계천을 중심으로 남쪽에 자리한 을지로와 충무로, 명동과 남산 일대는 남촌으로 불렸다. 북촌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부촌(富村)이었다.

<창덕궁 돈화문>

이런 북촌에 일제강점기로 들어서면서 변화의 바람이 분다. 강제로 한일병탄조약이 체결(1910년 8월 29일)된 경술국치일 이후 일본인들의 서울 진출이 본격화됐다. 초기에는 청계천 남쪽의 을지로, 명동 등 남촌에 일본인들의 거주 지역이 만들어졌다. 그 당시에는 북촌은 조선인들의 거주 지역이었고, 남촌은 일본인들의 거주 지역이라는 일종의 불문율이 유지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있었던 남산의 기억의 터>

하지만 일본인들의 유입이 크게 늘면서 그들의 주거 수요총독도 증가하게 되어 일본인들은 청계천을 넘어 북촌으로 진출했다. 일제 역시 남산에 있던 조선총독부를 경복궁 근정전 앞의 맥을 끊어 건설하고, 북촌 지역에 각종 관공서를 만들며 인구 유입을 조장했으며, 일본인들의 북촌 진출은 지역의 부동산 가격 폭등을 불러와 상대적으로 경제적으로 취약한 조선인들은 일부 부유층을 제외하면 심각한 주거난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자칫 서울의 중심부가 일본인들에게 점령당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

이때 등장 한 사업가 정세권이다. 그는 경남 고성에서 서울로 상경해서 주택 사업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건양사(建陽社)라는 부동산 개발회사를 창업했고, 기존의 중요한 주택 건축양식인 한옥과 서양식 문화주택,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일본식 주택을 배척함으로써 개조한 도시형 한옥을 지었다. 정세권의 도시형 한옥은 기존 한옥보다 크기를 줄인 대신 배치를 바꾸고 전기와 수도를 들어와 서양의 건축 형태를 수용하는 등 실용적인 구조로 만들었다.

<북촌한옥마을>

지금도 볼 수 있는 양반들의 고택과는 전혀 다른 단독주택과 같은 형태였는데, 이는 조선인들의 주거문화까지 바꾸는 혁신적이었다. 정세권은 일본인들의 북촌 진출을 막기 위해 이 지역의 땅을 매입해 도시형 한옥촌은 건설해 분양했다. 최근 다양한 카페들과 음식점 등이 들어서며 서울의 새로운 명소가 된 익선동 일대는 그가 일대 땅을 매입해 건설한 한옥촌이다. 또한, 가회동을 포함한 북촌 일대의 한옥마을도 그의 개발 사업의 결과다.

<지금의 북촌 전경 - 네이버캡쳐>

또한 한옥촌을 건설하면서 조선인들의 주거 안정에서 힘썼다. 그는 조선인들이 이 한옥(韓屋)에 더 많이 들어올 수 있도록 분양 대금은 일시불(一時拂)뿐만 아니라 연납·월납의 형태로 할 수 있도록 하여 일반 서민들도 북촌에 거주할 수 있게 했다. 그의 한옥은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그는 도시형 한옥 개발 사업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서울 곳곳에 정세권의 한옥마을을 만들어 조선인들이 살도록 했다.

<현 북촌골목>

그는 성공한 사업가로, 부동산 개발업자로 부와 명성을 모두 얻었다. 당시 그가 서울에 지은 도시형 한옥은 6천여 채에 이르렀다. 그는 평소 항일 의식을 잃지 않았고 한복 두루마기를 즐겨 입었다. 또한, 민족 종교인 대종교 신자였으며, 직접적인 독립운동보다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사업과 운동에 후원자로서 기여(寄與)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면서 지속 가능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현명한 방법이기도 했다.

<(북촌)헌법재판소 백송>

1920년대 국산품 애용을 통해 우리 민족의 경제적 자립을 이루자는 취지로 시작한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후원했고, 조선의 제품을 홍보하고 판매할 수 있는 조선 물산회관을 건립해 기부했으며, 운동에 도움이 되는 회사를 만들어 운영했다. 이에 더해 민족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재정적 후원했다. 또한 한글 연구와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을 진행하던 조선어학회의 후원자로 나서 사무실을 제공하고 재정적 지원도 했다.

<북촌의 기와집>

이렇게 자신이 축적한 부를 개인이 아닌 민족과 독립운동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았으나, 이런 그의 행동은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없었다. 한 번은 물산장려운동 지원과 관련해 일제 경찰의 소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자기 지역에서 나고 만들어진 제품 쓰기를 장려하는 것이 어떻게 문제가 되는가’ 하는 논리로 당당히 맞서며 상황을 피하기도 했다.

<(북촌)헌법제판소>

하지만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면서 큰 고초를 겪는다. 당시 조선어학회를 주시하고 있었던 일제는 그들의 활동이 독립운동이나 내란죄에 준하는 중범죄라는 이유를 들어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구속하고 고문을 가하는 등 탄압할 때 큰 후원자였던 정세권 역시 큰 고초를 겪었다. 옥고를 겪으면서 정세권의 건강은 크게 악화(惡化)되었다.

정세권은 가까스로 풀려나긴 했지만, 일제의 감시는 더 심해졌고 그의 부동산 등 재산은 헌납이라는 명목으로 강제 수탈되고 말았다. 그는 당시 지금의 뚝섬 일대에 수만 평의 토지가 있었지만, 그 땅을 강탈당했고 그의 삶 자체라 할 수 있는 그의 회사인 건양사의 건축업 면허까지 취소되는 등 경제활동에도 제약이 발생했다. 그와 함께 그의 가세도 크게 기울고 말았다.

<뚝섬의 서울 숲 전경>

광복 후 정세권은 함께 고초를 겪었던 조선어학회원들과 함께하며 최초의 한글 사전인 조선말 큰 사선의 완성을 지켜봤다. 하지만 그의 민족주의 사업가로 독립운동(獨立運動)과 관련된 공적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서울에서 힘겹게 살았고, 한국전쟁 도중 폭격으로 심한 부상으로 말년에는 홀로 고향에 내려가 단칸방에서 살다 1965년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그의 공적은 사후 재조명되어 1968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고 1990년에 가서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그의 유해는 고향인 경남 고성군에 안치되어 있다가 2016년 4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그가 제대로 평가받기까지 너무 긴 세월이 흘러 이루어진 일이었다.

<창덕궁 전경>

그의 한옥주택 사업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경제적 약자인 조선인들의 주거 안정을 위한 일이었고 일본인들의 세상이 될 수 있는 서울 중심부의 지켜낸 일이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지금 북촌 등 한옥마을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을의 풍경도 다수의 일본식 주택이 차지했을 수도 있다. 이런 정세권의 노력이 함께 하는 북촌한옥마을은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고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북촌한옥마을을 찾는 이들은 그 정세권이라는 인물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창덕궁 인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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