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인각(火印刻)
정유순
세상이 어지러워 불이 난 것일까?
불이 나서 세상이 더 어지러운 것인가?
바람이 부는 대로 불은 춤을 춘다.
그 뜨거운 불지옥 속에서
수많은 생명이 비명을 지르며 우리 곁을 떠나간다.
생명 줄은 어떠한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거늘 해마다 이쯤 되면
불춤을 추면서 불도장을 왜 찍고 있는지
사람들의 잘못인지, 자연의 경고인지…
대자연 속에 둥지를 틀고 생명을 이어가던
무수한 생명체들이 아마겟돈의 처절한 전쟁인 양
최후의 목숨을 던지고 절규하며
화마(火魔)는 뜨거운 불꽃을 하늘에 던지고
때론 남으로 때론 북으로 칼춤을 추면서
우리 삶의 터전을 위협하는 함성으로 다가온다.
후일을 기약하는 어미들은 산기슭에 씨앗을 묻고,
하늘이 다시 열리면 새싹이 돋아 나와
새로운 터전을 만들 것을 임종하면서
바람 타고 구천으로 미련 없이 갔건만
그 바람마저 싸늘하게 외면해 버리고
다 타고 남은 재와 함께 자연의 종자자까지
싹 쓸어 가버렸으니 이 한 몸 의지할 곳이 어디인가?
화염(火焰)이 할퀴고 간 자리에는 공허함이 맴돈다.
본디 생명은 시작도 끝도 없는 것.
저절로 불이 낫 건 누구의 실수로
불이 낫 건 그 어디에 어떤 모습을 하고
존재했어도 그것은 별 의미가 없건만
광풍노도(狂風怒濤)와 같은 풍화(風火)에
수많은 우리의 친구들과 이웃들이
단 한 번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으으니
그 빈자리에 내 마음 둘 곳이 없다.
다시 세상의 문이 열리고
지축의 끝자락에서 생명의
고동 소리가 들릴 때
감로수(甘露水)가 대지를 축축이 적시며
태(胎)의 문을 열 때
연하디연한 샛노란 싹으로 머리를 내밀면서
땅바닥에 뿌리를 박고 굳건히 일어나는
생명의 신비를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기다린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땅속 깊은 끝에서
하늘 끝까지 이어지는 생명의 사슬이
삼 줄보다 더 질기고 무쇠보다 더 강한
생명 판으로 거듭 태어나서 스스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웅장한 생명의 하모니를
이루어 나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세월의 셈이 열이 아닌 수백까지 간다고 해도
우리는 조급함이 없이 차분한 마음으로
그 생명의 소리를 듣고자 한다.
(瓦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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