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화인각(火印刻)

와야 세상걷기 2025. 3. 29. 21:54

화인각(火印刻)

정유순

 

세상이 어지러워 불이 난 것일까?

불이 나서 세상이 더 어지러운 것인가?

바람이 부는 대로 불은 춤을 춘다.

그 뜨거운 불지옥 속에서

수많은 생명이 비명을 지르며 우리 곁을 떠나간다.

 

생명 줄은 어떠한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거늘 해마다 이쯤 되면

불춤을 추면서 불도장을 왜 찍고 있는지

사람들의 잘못인지, 자연의 경고인지… ​

 

대자연 속에 둥지를 틀고 생명을 이어가던

무수한 생명체들이 아마겟돈의 처절한 전쟁인 양

최후의 목숨을 던지고 절규하며

화마(火魔)는 뜨거운 불꽃을 하늘에 던지고

때론 남으로 때론 북으로 칼춤을 추면서

우리 삶의 터전을 위협하는 함성으로 다가온다.​

 

후일을 기약하는 어미들은 산기슭에 씨앗을 묻고,

하늘이 다시 열리면 새싹이 돋아 나와

새로운 터전을 만들 것을 임종하면서

바람 타고 구천으로 미련 없이 갔건만

그 바람마저 싸늘하게 외면해 버리고

다 타고 남은 재와 함께 자연의 종자자까지

싹 쓸어 가버렸으니 이 한 몸 의지할 곳이 어디인가?

화염(火焰)이 할퀴고 간 자리에는 공허함이 맴돈다.​

 

본디 생명은 시작도 끝도 없는 것.

저절로 불이 낫 건 누구의 실수로

불이 낫 건 그 어디에 어떤 모습을 하고

존재했어도 그것은 별 의미가 없건만

광풍노도(狂風怒濤)와 같은 풍화(風火)에

수많은 우리의 친구들과 이웃들이

단 한 번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으으니

그 빈자리에 내 마음 둘 곳이 없다.​

 

다시 세상의 문이 열리고

지축의 끝자락에서 생명의

고동 소리가 들릴 때

감로수(甘露水)가 대지를 축축이 적시며

태(胎)의 문을 열 때

연하디연한 샛노란 싹으로 머리를 내밀면서

땅바닥에 뿌리를 박고 굳건히 일어나는

생명의 신비를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기다린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땅속 깊은 끝에서

하늘 끝까지 이어지는 생명의 사슬이

삼 줄보다 더 질기고 무쇠보다 더 강한

생명 판으로 거듭 태어나서 스스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웅장한 생명의 하모니를

이루어 나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세월의 셈이 열이 아닌 수백까지 간다고 해도

우리는 조급함이 없이 차분한 마음으로

그 생명의 소리를 듣고자 한다.

(瓦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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