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다시 찾은 백령도(1)

와야 정유순 2022. 5. 17. 23:51

다시 찾은 백령도(1)

(2022 5 911)

瓦也 정유순

 

  2018 11월 중순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고 공중을 나는 모습을 닮은 백령도(白翎島)를 갔다 온 적이 있고, 이번에는 두 번째 방문이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인천항 연안부두에서 아침 8시 반에 출항하는 정기여객선이 정시에 뱃고동이 울렸고, 쾌속선은 방파제 밖으로 빠져나와 인천대교 밑을 지난다. 지난번과는 달리 바다의 숨결은 그지 없이 잔잔하다. 소청도와 대청도를 잠시 들렀다가 백령도 거의 4시간 넘게 용기포신항에 도착한다

<인천대교>

 

  백령도에 처음 문이 열린 것은 기원전 1000년경인 고조선 시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진촌리와 용기포 조개더미에서 인류의 생활 흔적(빗살무늬토기 등)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특별한 유적과 유물이 확인된 바는 없으나 기원전 3~5세기쯤으로 보이는 손잡이가 있는 흑도장경호(黑陶長頸壺)가 진촌리에서 발견되었다. 현재도 진촌을 읍내 또는 소재지라 부르고 진촌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외4(북포리, 남포리, 연화리, 가을리)로 표현하는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삶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백령도지도>

 

  삼국시대에 이 섬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게 되는데, 백령도는 고구려에 속했으며 고니 곡()’, ‘섬 도()’자를 쓴 곡도(鵠島)’라 불렀다고 한다. 오늘날 새와 관련된 백령도 지명 얘기는 모두 오리과()에 속하는 고니(백조) ()’에서 비롯되거나 변형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후 신라후기 제51대 진성여왕 때 거타지 설화에서는 곡도와 함께 골대도(骨大島)’라는 이름도 나오지만 곡도가 더 알려져 있다

<소청도>

 

  지금의백령이란 지명은 고려시대에 처음 사용되었다. 1010(현종 1) 백령이란 명칭이 <백령진지(白翎鎭誌)>에 나오며, <고려사와 지리지>에도 명칭이 나온다. ‘백령진(白翎鎭)’ 백령+의 합성어로서 백령도에 군사시설인 진()을 설치했다는 뜻이며, 지역 여건상 수군을 배치해 국가를 방어했던 수군 관련 군사시설로서 조선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진촌(鎭村) 군인들의 마을이라는 뜻 같다

<대청도>
 

  백령도는 본래 황해도 장연군에 속했다가 광복 후 경기도 옹진군에 편입되었고, 1995 3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광역시로 바뀐 인천에 편입되었다. 섬의 대부분이 해발고도 100200m의 구릉지 또는 산지이고, 북포리(北浦里) 지역의 개활지(開闊地) 및 남동부의 간석지를 매립한 간척지가 농경지로 이용되어 현재 식량자급이 가능해졌으며, 어업이 활발하여 어획량이 옹진군내에서 가장 많다. 그러나 백령도는 서해의 접적지역(接敵地域)으로 어로활동이 크게 제약을 받고 있으며, 항시 긴장감이 감도는 곳이다

<황해도>

 

  미리 예약한 진촌리 숙소로 자동차를 이동하여 점심을 하고 여장을 다시 꾸려 사곶해안으로 방향을 잡아 본격적인 걷기 여행을 시작한다. 천연기념물(391)로 지정된 사곶해안은 길이 4, 썰물 때 폭 3m 1이하의 세립질(細粒質) 모래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거의 수평에 가까운 평탄한 조간대(潮間帶)로서, 물이 빠지면 중간 규모의 화물기가 착륙할 수 있을 정도로 바닥이 단단해지고 자갈이 없는 모래밭으로 이태리 나폴리 해변과 더불어 세계에서 단 두 곳밖에 없는 천연 비행장이다

<사곶해안>

 

  이곳은 원래 육지 쪽으로 모래 구릉이 여러 개 있고 그 사이에는 해당화가 피어있는 아름다운 해안이었으나 1975년 국방상의 이유로 약 3의 거리에 시멘트 방벽을 쌓아 자연경관이 파괴되고 자연현상이 차단되었으며 장벽 안쪽에 있는 사구(砂丘)에는 폭 100200m의 솔밭이 조성되었다. 이로 인하여 솔밭이 방풍림 구실을 하여 주민들은 모래가 바람에 운반되어 오는 것을 막을 수 있었으나, 자연이 만들어 준 모래사장, 모래언덕, 해당화와 솔밭이 있는 백령도의 명사십리는 사라진 것 같다

<사곶해안 솔밭>

 

  백령도 여행의 백미로 손꼽히던 사곶해안이 간이 비행장으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래 퇴적물들이 세립질 모래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래 입자들이 연마되어 있지 않고, 소금물이 입자들 사이에서 얇은 피막을 이루면서 서로 결합하여 있기 때문으로, 한국전쟁 당시 비행장으로 사용했을 정도였으나 남단 주변에 간척(干拓)을 하여 백령호를 만든 다음부터 세립모래의 단단함이 약해지고 조금씩 주변 환경에 변화가 오는 것 같다

<백령호(좌)와 사곶해안(우)>

 

  담수호인 백령호(白翎湖) 1970년대 식량 자급자족을 위해 간척 사업을 하여 만들어졌다. 백령호는 원래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벌이었는데, 지금은 논 40여 만 평이 새로 생겨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이 이곳에 주둔하는 군인들까지 먹고도 남아 정부 수매로 육지까지 나간다. 담수호 옆에는 <서해최북단백령도비>가 있으며, 바닷물이 드나들던 길목에는 길이 30의 백령도에서 가장 긴 백령대교가 놓여 있다

<서해최북안백령도>

 

<백령대교>

 

  백령대교를 건너가서 자연 그대로의 해변과 기암괴석들을 둘러보고 전망대에 오른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사곶해변이 한눈에 들어오며 백령호 주변으로는 백령도 종합운동장이 있고, 남쪽으로는 백령도 유일한 화동 염전과 화훼 단지 등이 보인다. 북으로는 넓은 들녘이 펼쳐지는데 인천광역시에서는 2007년 개항을 목표로 공항을 건설할 계획이라고 한다. 남쪽 바다 건너에는 대청도가 지척이고, 동으로는 북한지역인 황해도가 손짓한다

<백령호>

 

<백령종합운동장>
 

  전망대에서 언덕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천연기념물(392)로 지정된 콩돌해안이다. 콩돌해안은 백령도의 지형과 지질의 특색을 잘 보여주는 곳으로, 해변에 둥근 자갈들로 구성된 퇴적물이 발달한 해안이다. 둥근 자갈들은 백령도의 모암(母岩)인 규암이 해안의 파식(波蝕) 작용으로 마모를 거듭하여 콩과 같이 작은 모양을 하고 있어 콩돌들은 색상이 백색·회색·갈색·적갈색·청회색 등의 형형색색을 띠고 있어 해안경관을 아름답게 한다

<사곶해안전망대>

 

<콩돌해안>

 

  콩알해안은 길이가 800m, 폭은 30m 정도이고, 콩돌이 만들어 낸 투명한 자갈이 부딪히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피부염에 특효가 있다는 자갈찜질을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해안경사가 급해 갑자기 깊은 곳이 있으며, 물이 빠진 간조시간에는 해안 끝에 절벽처럼 급경사와 움푹 파인 곳이 생긴다. 제주도나 거제도처럼 검은 콩돌이 아닌 하얀 빛깔이 많은 콩돌이 발로 밟힐 때마다 사그락 거리는 소리는 파도소리와 함께 천상의 조화를 이룬다

<콩돌>

 

<콩돌해안>

 

  콩돌해안은 백령도 남포동 오군포 남쪽해안을 따라 약 1정도 형성되어 있고 내륙 쪽으로는 군부대의 해안초소와 경계철조망이 설치되어 있다. 콩알만한 크기의 작고 둥근 자갈들이 해안에 지천으로 깔린 화동의 콩돌해변은 그 돌을 밟는 것만으로도 신비한 경험이며 맑고 푸른 바다와 조화를 이루지만, 이색적인 해변으로 잘 알려지지 않아 사람의 발길이 뜸해 자연 그대로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콩돌해안전경>

 

<콩돌해안 남단>

 

  콩돌해안을 걸은 뒤 다시 산길을 따라 오군포에서 가까운 해안으로 내려간다. 사람이 다닌 흔적은 있으나 통행이 많은 편이 아닌 듯 일부 철 계단은 손질이 필요하게 보이는데, 발을 밟을 때에는 삐걱 소리도 난다. 이렇게 해안의 끝은 높은 언덕이 가로 막아 유격훈련 하듯 산을 타고 내린다. 내려가는 계곡 옆으로는 도토리가 싹을 틔워 새로운 생명을 시작한다. 붉은 병꽃도 늦은 오후에 옆으로 길게 누운 그림자와 함께 더 붉게 물들어 간다. 길가로 다가서서 쪽빛 망망대해 수평선을 바라보니 가슴속까지 시원해진다

<붉은병꽃>

 

<참나무 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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