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타산에서 속세의 번뇌를 벗고
(2022년 5월 7일)
瓦也 정유순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三和洞) 남서쪽에 있는 두타산(1357m)의 두타(頭陀)는 언뜻 듣기에는 ‘골 때리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진짜의 뜻은‘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불도(佛道) 수행을 닦는다.’는 불교 용어다. 동해시와 삼척시 경계에 위치하며 백두대간에서 솟아 준봉(峻峰)을 이룬다. 청옥(靑玉)이라는 약초가 많이 생산되어 산 이름이 된 청옥산(靑玉山, 1404m)과 함께 무릉계곡 등을 감싸 안으며 두타산을 이룬다. 오늘 산행은 배틀바위를 경유하여 마천루까지 돌아보고 무릉계곡으로 내려온다.
<두타산 등산안내도>
오랜만에 봄 비가 내려 운무가 앞을 가리는 <베틀바위무릉산성길>은 동해시와 동부지방산림청이 무릉계곡 숲길 안전관리 및 산림보호를 위한 공통산림사업으로 조성하였다. 베틀바위 산성길은 태고의 원시림, 휴휴(休休) 이승훈 사색의 길, 소원의 길, 두타산성 터와 박달령을 지나 용추·쌍폭포로 이어지는 두타비경으로 이야기가 있는 공간, 상서로운 기운이 행운을 부르는 길(吉)한 길, 소원이 이루어지는 희망의 길로 조성되었다.
<운무에 가린 무릉계곡>
올라가는 길목에는 이승의 삶을 버리고 영면(永眠)한 돌무덤이 한 시대를 이야기 하는 것 같고, 그 옆의 참나무는 굴곡진 삶보다는 질긴 생명을 몸으로 이야기 한다. 그래도 금강소나무는 우리의 꿋꿋한 저력을 보여준다. 금강소나무는 금강산 남쪽 태백준령을 따라 강원도와 경상북도 지역의 산 능선에 자라는 소나무로 늘 푸른 바늘잎 큰키나무다. 소나무와 기본적인 형태가 같으나 소나무에 비하여 줄기가 좀 더 붉고 마디가 길게 자란다. 해안가에 주로 자라는 곰솔과 달리 소나무와 마찬가지로 주로 산지에서 자란다.
<금강송>
그 옆에는 은근한 향으로 발길을 잡는 정향나무가 반갑다. 정향(丁香)나무는 꽃의 관상가치 및 향기가 높으며, 꽃의 모양이 못 또는 정(丁)자형으로 보이고 향기가 높다하여 ‘정향나무’라고 한다. 봄철에 조그만 연보라색 꽃들이 뭉쳐서 피고, 만개하면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라 은은한 향기를 낸다. 국내에만 자생하는 특산 식물이지만, 미군정기(1945∼1948)에 미 행정관이 북한산 백운봉에서 자생하던 정향나무 씨앗을 미국으로 가져가서 식생에 성공하여 명명한 것이 <미스킴라일락>이다.
<정향나무>
정향나무와 함께 두타산에는 회양목이 널리 분포한다. 회양목(淮陽木)은 원래 황양목(黃楊木)이라고도 불렀으나, 석회암지대가 발달된 북한의 강원도 회양(淮陽)에서 많이 자랐기 때문에 회양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 전국에 걸쳐 자라지만 특히 석회암지대가 발달된 산지에서 자라는데 경상북도, 강원도, 충청북도, 황해도에서 많이 자란다. 회양목은 목질이 단단하고 균일하여 목판활자를 만들었고 도장과 장기 알 등에 이용되었다.
<회양목>
약 1시간 정도 오르막을 오르다가 마지막에 사다리계단을 올라서면 두타산 절경 배틀바위가 운무 속에 아른거린다. 해발 550m에 위치한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배틀바위는 배틀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으로 “옛날 선녀가 하늘나라의 질서를 어겨 인간세상으로 내려왔다가 비단 세 필을 짜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이곳을 찾는 산악인들은 ‘배틀릿지 비경, 천하비경 장가게, 소금강’ 등으로도 불린다.
<운무에 싸인 배틀바위>
<배틀바위 - 네이버캡쳐>
구름에 가려 실루엣처럼 보이는 배틀바위를 뒤로하고 200m 거리의 미륵바위로 향한다. 가파른 산길에 데크 계단을 올라가면 갈림길에서 왼쪽 미륵바위가 나온다. 보는 방향에 따라 미륵불, 선비, 부엉이를 닮았다. 허목(許穆, 1595∼1682)의 두타산기, 김효원(金孝元, 1532∼1590)의 두타산 일기,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의 두타산 등에 미륵봉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인근에 숯가마 터와 두타산성이 보인다.
<미륵바위>
이정표를 따라 산허리를 돌아가면서 길은 완만해진다. 지그재그 길을 10분가량 내려가면 갈림길이다. 어느 절벽 아래는 상어가 이빨을 내놓고 입을 벌린 형상이요. 어느 바위는 석곽(石槨)을 세워 놓은 형상이다. 물이 흘러 축축한 산길을 내려가면 바위 구멍에서 물이 나오는 석간수가 있는데, 식수로는 사용할 수 없다고 안내한다. 암자 터였는지 공터와 움푹 파인 집채만 한 바위는 마당놀이 한 마당을 연상시킨다. 갈림길 오른쪽 방향에 오금을 저리게 하는 12폭포 상류는 한가롭기 그지없다.
<석간수 입구>
마천루(摩天樓)라는 말은 미국에서 최초로 초고층 건물들을 지은 직후인 1880년대에 처음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두타산 마천루는 동해바다의 높은 돛대를 상징하듯 빌딩 숲처럼 암릉과 기암절경이 호위하고, 전망대는 해발 470m 높이에 금강산바위 위로 아슬아슬하게 조성된 잔도를 따라 두타협곡과 주변 풍광이 가장 잘 보이는 지점에 자리 잡았다. 금강산바위군은 협곡인 박달계곡과 신비스러움이 더하는 신선봉과 번개바위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번개바위 꼭대기에는 고릴라바위가 떡하니 자리한다.
<마천루>
<번개바위 위의 고릴라바위>
가파른 계단과 아찔한 바위 길을 따라 내려오면 무릉계곡이다. 무릉계곡(武陵溪谷)은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아래로 펼쳐져 용추폭포에서 호암소까지 이어진다. 용추폭포(龍湫瀑布)는 청옥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줄기가 상·중·하 3개의 항아리 모양의 깊은 바위용소로 되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제일 아래 계단을 밟으면 전체 암석이 동요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동석(動石)이라 불리며, 이 일대를 폭포골 또는 용추동이라 부른다.
<용추폭포>
폭포들이 절묘하게 연결되는 형상과 주위 무릉계곡의 뛰어난 경관과의 조화를 이루는 용추폭포 70m아래에 위치한 쌍폭포는 물이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듯 착각할 정도로 높고 아름다우며, 용추폭포에서 내려오는 물과 박달계곡의 물이 이곳에서 만남은 마치 자연의 음양의 섭리와 순리를 나타내는 듯하다. 떨어지는 폭포수는 세상의 온갖 시련과 풍파를 한 순간에 날려 보낸다. 쌍폭포는 용추폭포와 함께 무릉계곡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쌍폭포>
용추폭포의 철다리 위에서 위로 쳐다보면 발가락 모양이 드러나는‘발바닥 바위’가 압권이다. 그리고 용추폭포 아래에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이름이 암각 되어 있다. 더 아래로 내려오면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바위 학소대(鶴巢臺)가 있다. 학소대에서는 두 연인이 학처럼 정을 나눈다. 계곡 아래로 내려올수록 비가 그쳐 짙어가는 녹음이 더 선명해질 때 발걸음은 이미 부처님오신 날 준비에 여념이 없는 삼화사 앞마당에 들어선다.
<발바닥바위>
두타산삼화사(頭陀山三和寺)는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다. 642년(선덕여왕 11) 신라시대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이곳에 절을 짓고 흑련대(黑蓮臺)라 하였다. 864년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절을 다시 지어 삼공암(三公庵)이라 하였다가 고려 태조 때 삼화사라 개칭하였다. 임진왜란과 의병의 근거지가 되어 1907년 왜병의 공격으로 소실되었다가 1977년 이 일대가 시멘트 공장이 들어서자 중대사(中臺寺) 옛터인 무릉계곡의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문화재로 신라시대의 철불(鐵佛)과 3층 석탑 등이 있다.
<삼화사적광전>
고려시대 이승휴(李承休, 1224∼1300)가 머물며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집필하였으며, 국가무형문화재 제125호인 ‘삼화사 수륙제’를 보유한 삼화사 밖 담벼락 옆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도열한다. 일주문으로 이어지는 계곡은 용(해)오름길이며 무릉계곡의 중심이다. 고적(古蹟)에 의하면 삼화사 창건 당시 약사삼불(藥師三佛)인 백(伯)∙중(仲)∙계(季) 삼형제가 처음 서역에서 동해로 용을 타고 왔다는 전설이 있다.
<삼화사 십이지신상>
삼화사 일주문을 나오면 무릉계곡의 백미인 무릉반석이 기다린다. 무릉반석(武陵盤石)은 5천㎡ 되는 넓은 반석이 펼쳐져 있는 것이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며 주변의 기암괴석과 함께 천하절경을 이룬다. 반석 위에는 이곳을 찾은 명필가와 묵객(墨客)들이 음각해 놓은 여러 종류의 글씨가 있는데, 특이한 것은 도둑을 잡으러 이곳에 온 토포사(討捕使)들의 이름이 함께한다는 것이다. 아마 깊은 계곡에 도둑들도 많이 숨어들어 왔으리라 짐작이 간다.
<무릉반석>
무릉반석 옆에는 금란정이란 정자가 있다. 금란정(金蘭亭)은 대한제국 광무7년(1903) 당시 삼척지방 유생(儒生)들은 향교 명륜당에 모여 현학을 강마(講磨)하고 동양 예의를 존숭(尊崇)하며 봄과 가을의 음상(吟觴)을 즐겨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향교가 폐강되었고 이를 분개한 유생들이 울분을 달래기 위해 금란계(金蘭契)라는 모임을 만들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정각을 건립하고자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었다가 1947년 북평동 등에 금란정을 건립하였으며, 1958년 무릉계곡으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른다.
<금란정>
이승의 번뇌를 벗어버리고 두타산 선계를 배회하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들어갈 때 지나쳤던 무릉계곡 초입의 무릉반석에는 가로로 쓴 살아 움직이는 듯 힘이 있고, 웅장한 글씨인 <武陵仙源(무릉선원) 中臺泉石(중대천석) 頭陀洞天(두타동천)>이라는 암각서가, 그 아래에는 <玉壺居士書辛未(옥호거사서신미)>라는 각서가 있다.
이는 신미년(1751년)에 옥호거사 정하언(鄭夏彦)이 삼척부사 재직기간 중에 “여기는 신선의 거처요(무릉선원), 바위에서 샘솟는 계곡이요(중대천석), 나와 내 것을 내려놓는 별천지로다!(두타동천)”의 의미로 썼다는 것이다. 무릉선원은 도교(신선)사상을, 중대천석은 유교사상을, 두타동천은 불교사상을 나타낸다고 한다.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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