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가깝고도 먼 길 - 지덕사(至德祠)

와야 정유순 2022. 5. 6. 22:27

가깝고도 먼 길 - 지덕사(至德祠)

(2022 5 3)

瓦也 정유순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산65-42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위패를 모신 지덕사(至德祠)란 사당과 묘소가 있다. 지덕(至德)이란 중국 주()나라 때 태왕(太王)이 맏아들 태백과 둘째아들 우중을 두고, 셋째아들 계력(주문왕)에게 왕위를 물려 준데서 나온 말이다. 태백과 우중은 부왕의 뜻을 알고 형만으로 가서 은신하며 왕위를 사양했다. 훗날 공자(孔子)가 태백은 지덕, 우중은 청권이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고사를 바탕으로 양녕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지덕사, 효령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청권사(淸權祠)라 하였다

<지덕사 지도>

 

  태종(太宗)의 셋째아들인 충녕대군(忠寧大君, 1397~1450)이 왕위(세종)에 올라 태백과 우중의 고사를 떠올리며 나의 큰형님 양녕대군(13941462)은 곧 지덕이요, 둘째 형님 효령대군(孝寧大君)은 곧 청권이다라고 했다. 후에 정조(正祖)는 양녕대군 사당에는 지덕사, 효령대군 사당에는 청권사라는 현판을 사액하였다. 이로 인하여 오늘날 전주이씨 양녕대군파는 종친회 이름을 지덕사, 효령대군파는 청권사라 하고 있다.

<지덕사 후원>

 

<지덕사 수국>

 

  양녕대군은 1394년에 정안대군과 군부인 민씨(뒤의 원경왕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402(태종 2) 3 8일 제()란 이름을 받았고 동년 4 18일에 원자(元子)로 책봉되었다. 1404(태종 4) 왕세자에 책봉되고, 1406년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왔다. 어려서 계성군 이래(李來)의 문하에서 효령대군, 충녕대군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1407(태종 7) 9월 하진표사(賀進表使)로 명나라에 갈 때 완산부원군 이천우(李天祐), 제학 맹사성(孟思誠) 등 백여 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지덕사 우물>

 

  왕세자에 책봉된 후 1409년부터 부왕인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이후 1412년에서 1413년까지 대리청정을 1년간 하였으며 명나라 사신 접대와 강무시솔행(講武時率行)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으나,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부왕 태종과 대립과 마찰을 빚다가 우의정 유정현(柳廷顯) 등의 상소로 폐위되었다. 그 뒤 셋째 아들 충녕대군이 왕세자가 되었다. 세자 폐위 이후에도 일탈행동으로 여러 번 탄핵을 받았으나 세종(世宗)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을 면했다

<지덕사 비석공원>

 

  평소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으나 작품들은 대부분 인멸되거나 실전되었다. 일설에는 왕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은 그의 본심이었다는 설과 본심이 아니었다는 설이 양립하고 있으나, 동서고금을 통해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거나 멀어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의정부좌의정 광산군(光山君)에 증직(贈職)된 광산김씨 김한로(金漢老)의 딸 수성부부인 김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3 5녀를 두었으며, 측실에게서 7 12녀를 낳았다. 1462(세조8)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가는 길>

 

  1453년에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자 양녕대군은 수양대군의 편을 들어 그를 독려했음은 물론 안평대군을 죽음을 간청했다고 하며, 심지어는 단종을 죽음까지 주청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연유로 그의 서화(書畵)들이 멸실되고, 지금의 서울역 앞 남묘(南廟) 부근에 사당이 방치되어 있었는데, 숙종(肅宗)이 우연히 퇴락한 그의 지덕사를 발견하여 복권이 되고 사당 개수(改修)의 명이 내려져 다시 지어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관악산 줄기 국사봉 밑에 있는 대군의 묘소 앞으로 옮겨왔다

<지덕사 전경>

 

  지덕사를 찾아가면 처음 만나는 곳이 묘역의 정문인 양명문이다. 외삼문인 양명문(讓名門)은 지덕사의 정문으로 2004년 양녕대군 탄신 610주년을 맞이하여 성역화사업의 일환으로 세웠다. 양명(讓名)이란 이름은 정조(正祖)께서 쓰신 어제지덕사기(御製至德祠記)  () 중에서 사양의 덕이 가장 지고하며, 사양(辭讓)함에는 명예를 사양하는 것이 지고의 사양이다.”라는 내용에서 따온 것이다

<지덕사 양명문>

 

  양명문 안쪽 두 개의 큰 기둥에는 한지에 써서 붙인 崇祖敦宗悠久無疆(숭조돈종유구무강) 博厚配地高明配天(박후배지고명배천) 글씨가 눈길을 끈다. 숭조돈종유구무강(崇祖敦宗悠久無疆) 조상을 숭배하고 종친(일가)이 화목하면 진리는 확연하고 끝이 없다라는 뜻 같고, 박후배지고명배천(博厚配地高明配天) 넓고 두터운 것은 땅과 짝을 이루고 높고 밝은 것은 하늘과 짝을 이룬다.’는 뜻 같다

<양명문 안쪽>

 

  양명문을 지나 묘소로 올라가는 입구 소나무와 영산홍이 반갑게 맞아준다. 묘소는 관리를 위해 출입을 제한하고 있어 허락을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 묘소는 양녕대군과 부인 수성부부인광산김씨(修城府夫人光山金氏)의 합장묘다. 이곳은 국사봉(國思峰) 아래 서남쪽을 등지고 앉은 자리인 곤좌(坤坐)에 해당된다고 한다. 이곳 지명이 대군의 시호(諡號)를 따서 강정동(剛靖洞) 또는 강적동(康迪洞), 강사동(康寺洞)으로 불리었다고 전한다. 묘비에 쓰인 <강정(剛靖)>은 세조(世祖)가 내린 시호다

<양녕대군 묘소>

 

  봉분 앞에는 장명등과 묘비 및 문인석이 좌우에 2기씩 서 있다. 양녕대군은 유언으로 호화로운 예장을 받지 말고 묘비와 상석을 만들지 말라 했는데 7대손 만() 8대손 성항(性恒)이 묘소 앞에 석물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 세운 묘비가 1910년 경술국치 전날인 8 28일 밤 난데없이 벼락소리와 함께 갈라졌다고 하며, 현재의 묘비는 1915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묘역 아래로 사당이 보여 발길을 그 곳으로 돌려 아래로 내려가는데 우리나라 토종 영산홍이 붉게 물들어 간다

<양녕대군 묘소 전경>

 

  영산홍(映山紅)은 조선시대에 관상용으로 이를 좋아한 임금이 세종과 연산군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은 뜰에서 영산홍을 기르도록 하여 즐겁게 감상하고 상림원(上林園)에 하사하여 나누어 심도록 명하셨음은 물론 정무를 보는 틈틈이 영산홍을 감상하여 정서를 순화하고 어진 정치를 펼쳤다. 반면에 연산군은 영산홍을 지나치게 좋아한 나머지 영산홍 진상을 명하자 백성들이 이에 지쳐 죽기까지 하여 백성들을 괴롭힌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다. 꽃이 붉은 것은 영산홍, 자색인 것은 자산홍, 흰 것은 백영산으로 부른다

<토종 영산홍>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11, 1972 8)로 지정된 지덕사는 조선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사당으로 사당(祠堂)과 서고(書庫), 제기고(祭器庫)  3동의 건물이 있고 사당 후면에 묘소가 있다. 사당에는 세조가 친히 만든 금자현액(金字懸額)과 양녕대군의 외후손인 조선 중기 문신 허목(許穆)의 휘호로 된 지덕사기(至德祠記), 양녕대군의 필적으로 전해지는 숭례문의 탁본과 초서체로 쓴 후적벽부(後赤壁賦) 등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지덕사>

 

  사당 앞에는 도광재(韜光齋)라는 재실이 있다. 재실(齋室)은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으로,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숙식과 제사음식 장만, 음복(飮福), 망제(望祭)를 지내는 곳이다. 이 재실의 이름인 도광(韜光) 학식이나 재능을 감추고 남에게 드러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동생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도광을 했다는 의미로 양녕대군의 재실을 도광재라 한 것 같다

<도광재>

 

  사당을 나와 묘역 주변으로 조성된 후원을 걸어본다. 새들이 지저귀고 시민들이 산책하기 좋게 숲이 잘 조화된 후원에는 탱자나무가 자주 눈에 띤다. ‘강남의 귤나무를 강북에 심었더니 탱자나무가 되었다[남귤북지(南橘北枳)]’는 탱자나무는 위리안치(圍籬安置)형을 받은 중죄인이 유배형에 처해질 때 죄인이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집 둘레에 심는 가시나무다. 이 나무를 일부러 심었는지 자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부왕 태종의 노기가 6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서려 있는 것은 아닌지… 

<탱자나무>

 

  후원 아래쪽으로는 양녕대군의 작품들이 오석(烏石)에 새겨져 전시되어 있다. 그 중 눈에 먼저 띄는 것이 <崇禮門(숭례문)>이다. 숭례문은 한양도성의 정문으로 그 현판을 당시 명필이었던 양녕대군이 썼다고 전해져 왔다. 이 현판은 임진왜란 때 유실되었으나, 광해군 때 청파동 배다리 밑 도랑에서 밤마다 서광이 비쳐 파보았더니 그곳에 숭례문 현판이 나왔다. 2008년 숭례문 화재 때 훼손된 현판을 지덕사에 소장되어 있는 탁본을 근거로 복원하였다

<양녕이 쓴 숭례문>

 

<양녕이 쓴 숭례문>

 

  이곳의 여러 작품 중 양녕대군이 초서체로 쓴 후적벽부가 백미다. 초서는 예로부터 서예의 꽃으로 알려졌으며, 제대로 쓰는 사람이 흔치 않았다고 한다. 그 중 양녕대군의 필체는 서예가들도 극찬할 정도로 빼어났는데, 목판에 새겨진 친필은 지덕사에 보관 중이고,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오석에 옮겨 새겨 논 것이다. 후적벽부(後赤壁賦)는 송()나라 소동파(蘇東坡)가 유배생활 중 적벽부와 후적벽부라는 시를 남겼는데, 쓸쓸한 겨울 달밤의 정감을 표현한 것으로, 양녕대군도 이천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썼다

<양녕대군의 후적벽부 초서>

 

  이 밖에도 양녕대군이 전국을 유람할 때 묘향산의 어느 암자에서 스님의 간절한 청을 들어주기 위해 쓴 시와 대군의 16대 손으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의 조상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인륜과 사회 정의에 대한 깊은 관심과 철학이 담긴 글이 있다. 지덕사를 나올 때 국사봉 자락에 걸린 찬란한 햇빛은 지금까지 감춰왔던 대군의 도광(韜光)이 오늘에야 빛나는 것은 아닌지?

산허리에 걸려 있는 노을은 아침 짓는 연기인가

(山霞朝作飯, 산하조작반)

넝쿨에 걸린 달은 밤하늘에 등불이네

(蘿月夜爲燈, 나월야위등)

나 홀로 고적한 암자에서 자고나니

(獨宿孤菴下, 독숙고암하)

탑 하나만 저만치 홀로 서있네

(猶存塔一層, 유존탑일층)

<양녕대군의 시비>

 

<이승만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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