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반도에서 새해를 품다(2)
(2022년 1월 1일∼2일)
瓦也 정유순
고흥반도 녹동항에서 임인년(壬寅年) 두 번째 날이 밝았다. 어제 새해 첫 날 오천항에서 우연히 보게 된 채운(彩雲)이 금년 한 해를 설레게 한다. 해 뜰 때 일어나 조반을 마치고 오늘의 첫 방문지인 팔영산 능가사로 이동한다. 팔영산 능가사(楞伽寺)는 고흥군 점암면 성기리 팔영산(八影山) 밑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인 송광사 말사다. 녹동항에서 능가사까지는 주행거리가 약37㎞이다.
<팔영산 능가사 표지석>
팔영산(607m)은 1998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편입되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세숫대야에 비친 여덟 봉우리의 그림자를 보고 감탄한 중국의 위왕(魏王)이 어명을 내려 조선의 고흥 땅에서 이 산을 찾았다 하여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1998년 초 고흥군에서는 각 봉우리마다 고유이름(1봉:유영봉, 2봉:성주봉, 3봉:생황봉, 4봉:사자봉, 5봉:오로봉, 6봉:두류봉, 7봉:칠성봉, 8봉:적취봉)을 새긴 표지석을 만들어 찾아오는 사람을 반기고 있다.
<팔영산의 아침>
팔영산 북서쪽 기슭에 있는 능가사는 420년(신라 눌지왕 4)에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보현사(普賢寺)라 했다고 하지만 이 절의 창건자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탄 뒤 1644년(인조 22)에 벽천(碧川)이 중창하고 능가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1768년(영조 44)과 1863년(철종 14)에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5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한 능가사대웅전(보물 1307)과 천왕문(天王門), 산신각, 요사채 등이 있다.
<능가사 대웅전>
특히 능가사 범종(梵鐘)은 1698년(숙종 24)에 주조된 것으로 가운데 부분에 <주역>에 나오는 팔괘가 새겨져 있다. 팔괘(八卦)는 우리 민족과의 관계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태극기(太極旗)다. 팔괘는 <주역>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일 뿐만 아니라 그 근저를 이루는 음양 사상은 고대의 고분 벽화에서부터 조선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에 이르기 까지 우리 민족 문화의 원형적 사유 구조로 지금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능가사 범종루>
태극기는 중앙에 음양 화합을 상징하는 태극이 있고, 그 주변에 건곤감리(乾坤坎離)가 있는데, 건곤은 천지(天地)를 의미하고 감리(坎離)는 중남중녀(中男中女)로서 육자괘(六子卦) 가운데 음양의 중(中)을 얻어 일월주야한서(日月晝夜寒暑)의 천도운행(天道運行)을 주관하는 가장 중요한 괘다. 이러한 팔괘가 능가사 범종에 새겨져 있다는 것은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우리 민속과 결합된 것이 아닌 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능가사 범종>
영조 때 이중환(李重煥)의 기록에 의하면 옛날 일본 류큐(琉球:현 오키나와)의 태자가 표류하다가 이곳에 이르렀는데, 이 절의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면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빌었더니 7일 만에 승려가 나타나서 태자를 끼고 파도를 넘어갔다고 하며, 절의 승려들이 법당 벽에 그 모양을 그려놓았던 것이 영조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부속암자로는 만경암(萬景庵)과 서불암(西佛庵)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능가사 천왕문>
능가사를 뒤로 하고 보성군 득량면 해평리에 있는 오봉산으로 방향을 바꾼다. 오봉산(五峰山, 392m)은 정상으로 오르는 산길 곳곳의 너덜지대에 쌓여 있는 돌들은 널찍하고 반듯반듯하여 질 좋은 구들장 생산지다. 구들장은 방고래 위에 얇고 넓은 돌을 깔아 온돌(溫突)을 만드는 주요 재료다. 오봉산 입구인 해평리 마을 도로 변에는 수레에 얹어 놓은 구들장이 전시되어 있다. 온돌은 따듯하게 데운 돌이란 뜻으로, 우리나라 고유의 난방 방식이다. 온돌을 빼고는 우리 역사 속 주거문화를 말할 수가 없다.
<오봉산 구들장>
해평저수지 초입에서 너덜길을 따라 오봉산으로 들어선다. 입구부터 구들장을 뜨고 난 돌들이 주변에 성벽처럼 쌓여 있다. 우리 조상들은 구들장을 캐던 곳은 산이더라도 ‘밭’이라고 불렀으며, 구들장을 캐거나 뜯는다고 하지 않고 ‘뜬다’고 표현했다. 오봉산의 구들장은 육안으로 확인하기에도 상당히 질이 좋은 것으로 보인다. 수레 외에는 마땅한 이동수단이 없던 시기에 정상까지 와서 구들장을 뜬다는 것은 양질의 구들장으로서 높은 가격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널려 있는 오봉산 구들장>
구들장은 반듯하면서도 얇은 두께로 유명해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 산 정상에서 구들장을 떠와 득량역에 실어 날랐다고 하며, 역 앞에는 구들장을 높이 쌓아놓은 밭도 있었다고 한다. 산꼭대기에서 구들장을 가득 싣고 가파른 길을 내려오면서 소가 거꾸러져 죽기도 했다. 그래서 힘든 작업을 마친 소를 위해 짚을 엮어 신을 신기기도 하고 영양이 풍부한 여물을 잔뜩 주기도 했다고 한다.
<쌓아 놓은 구들장>
구들장을 실어 나르던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산등성에 올라서면 득량만(得粮灣)이 발아래 펼쳐지고 바다 건너에는 고흥반도가 자리한다. 오봉산에는 우리 민족의 아픔이 서려 있다. 1949년 10월초 빨치산 보성지구부대는 보성경찰서를 습격하려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경찰의 매복에 걸려 격전 끝에 100여 명이 군경저지선을 뚫고 오봉산으로 도망쳤으나 뒤쫓아 온 군·경에게 다시 발각되어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결국 빨치산들은 30여 명의 사상자를 낸 뒤에서야 오봉산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득량만>
능선을 타고 오봉산으로 오를 때 남쪽 능선으로 날카로운 날을 세운 칼바위가 어서 오라 손짓한다. 어느 산이고 마찬가지지만 오봉산 오르고 내리는 길이 처음부터 끝까지 너덜길이라 더 더딜 수밖에 없다. 그래도 득량만에서 불어오는 갯바람이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생명을 지탱하는 소나무와 다른 생명들을 너울너울 춤을 추게 하고 나는 절로 콧노래를 끄집어낸다.
<오봉산 칼바위>
오봉산의 칼바위는 직각의 단애(斷崖)와 함께 칼날처럼 웅장하게 서있는 모습이 칼을 세워 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예리한 칼날은 하늘을 향해 분기탱천(憤氣撐天)하여 하늘을 가르고 구름을 조각낼 기세다. 오봉산 정상에서 남쪽 길로 조심스레 내려오면 칼바위 안으로 들어가는 좁은 구멍을 통해 그 밑까지 들어갈 수 있다. 멀리서 볼 때는 섬뜩함이 있었으나 칼바위 안은 아늑하기 그지없다.
<칼바위 입구>
<오봉산 칼바위>
칼바위는 신라 후기 고승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불도를 닦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기암(奇巖)이다. 원효대사는 용추폭포에서 몸을 깨끗이 씻고 칼바위에 올라 수도를 했다고 한다. 칼바위의 구부러진 앞쪽 벽면을 유심히 바라다보면 음각이 되어 진 화상이 보이는데, 이는 전설 속의 원효대사 모습을 새겼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저 높이에서 사람이 어떻게 화상을 새겼을까? 아니면 자연의 조화일까?
<오봉산 칼바위 마애불>
호남정맥에서 최남단의 봉화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득량만을 끼고 남쪽 바닷가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끝자락에 위치한 오봉산에서 칼바위 주변에는 구들장을 뜨고 난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고 구들장을 뜨고 난 편석을 활용해 쌓은 2~3m 높이의 돌탑도 50여 개 이상 세워져 독특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돌들이 쌓여 이루어진 풍혈(風穴)에서는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겨울에는 따뜻한 바람이 나와 기(氣)를 받으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소원까지 빌고 간다고 한다.
<오봉산 돌탑>
<오봉산 돌탑>
오봉산을 나온 발걸음은 벌교 꼬막정식으로 바쁘게 움직인다. 벌교꼬막정식은 기본적인 밑반찬이 추가로 올라간다. 꼬막은 전라남도 보성과 순천, 여수 등지가 주산지이며 꼬막정식 또한 전라남도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다. 꼬막은 참꼬막, 새꼬막, 피꼬막으로 나뉘는데, 특히 보성군 벌교읍에서 즐겨 먹는 참꼬막이 가장 살이 쫄깃하고 즙이 풍부하기로 유명하다. 찬바람이 불어올 때 제철이라는 주인장의 넉살에 밥 두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뚝딱한다.
<벌교 꼬막정식>
중식을 마치고 다시 발길은 화순군 이서면(二西面)에 있는 명승지 화순적벽으로 향한다. 화순적벽(和順赤壁)은 동복천(同福川) 상류인 창랑천에는 약 7km에 걸쳐 수려한 절벽경관이 발달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동복댐 상류에 있는 노루목 적벽과 보산리, 창랑리, 물염적벽 등 4개의 군(群)으로 나뉘어 있다. 적벽은 수려한 자연경관이라든가 웅장함 그리고 위락공간으로서 주변의 적절한 자연조건 때문에, 동복댐이 만들어지기 직전까지 옛날부터 널리 알려진 명승지였다.
<물염정>
<화순(물염)적벽>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후 동복에 유배 중이던 신재 최산두(新齋 崔山斗)가 이 곳의 절경을 보고 중국의 소동파(蘇東坡)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적벽부(赤壁賦)에 버금간다하여 적벽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깎아 세운 듯한 단애절벽의 절경에 빠진 시인 김삿갓도 이곳에서 방랑을 멈추고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김삿갓을 비롯한 많은 시인, 묵객들이 좋아했던 상류의 노루목적벽은 1985년 동복댐 준공으로 수몰되어 일부가 잠겨버렸다.
<화순(창량)적벽>
<화순(창량)적벽>
김삿갓(1807∼1863)은 경기도 양주군 회동면에서 출생하여 전국을 떠돌다가 이곳 적벽에 매료되어 죽을 때까지 살았던 초분지(初墳地)가 이곳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이며 호는 난고(蘭皐)다. 그가 생전 동복에서 고향을 생각하며 그리워하였을 자리에 망향정(望鄕亭)을 지었다고 하며, 그의 주검은 3년 후 차남이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에 모셨다. 최근에는 영월군 하동면이 김삿갓면으로 개명하였다.
<김삿갓 석상>
“임금을 잃은 이 날 또 어버이를 잃었으니
한 번만의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리
춘추필법을 네 아느냐 모르느냐
이 일을 우리 역사에 길이 전하리“
<김삿갓 시비>
향시(鄕試)에 출제된 “가산군수 정시의 충절을 논하고 선천부사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닿는 것을 탄식한다.(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라는 시제에 김삿갓은 위와 같이 답안을 제출하여 장원을 하였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어머니는 할아버지 김익순이 홍경래난에 가담한 사실을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김삿갓은 할아버지를 욕한 마음을 잡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아무도 몰래 처자식과 이별하여 전국을 방랑하였다.
<김삿갓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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