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운길산과 수종사

와야 정유순 2021. 12. 18. 23:20

운길산과 수종사

(2021 11 28)

瓦也 정유순

  새벽 운길산 정상에 올라서서 양수리 물안개가 하늘의 수염처럼 길게 늘어진 광경을 상상해 보았는가? 이런 상상을 하면서 경의중안선에 몸을 싣고 운길산역에서 하차한다. 부지런히 서두른 덕택에 오늘 동행할 일행들과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역 광장을 두리번거리다가 해방된 지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도 일제가 우리에게 멍에처럼 씌워버린 잔재가 버티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운길산역>

 

  그것은 마을 안내 표지석인 <진중1리 마진부락>이란 명칭으로, 소위 부락(部落)이라는 단어는 결론적으로 말하면 일본의 천민집단의 대명사. 안골, 닭실마을, 빛고을 등 아름답던 우리 마을 이름들이 일제강점기 때 온통 부락으로 바꾸어 조선 마을들을 일본의 천민집단으로 강등시켜 버렸고, 일본사람들이 조선에 와서 집단으로 거주하던 지역은 읍()으로 격상하여 차별하던 대표적인 시나브로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시킨 일제잔재이다

<마진부락 표지석>

 

  운길산역은 중앙선 복선 전철화에 따른 선로 이설로 폐역이 된 능내역의 대체 역이다. 진중2리 마을회관 앞으로 하여 운길산 자락으로 들어서면 당산나무 아래 산제사를 지내는 상석(床石)이 따사한 햇빛을 받으며 한가롭다. 산제사(山祭祀)는 산신제와 같은 것으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산악숭배이며 천신신앙의 일환으로 우리 민족에게는 매우 오래된 신앙이다

<운길산 산제사 상석>

 

  운길산(雲吉山, 610)은 한북정맥이 남서로 내려오다가 불쑥 한 번 파도를 치면서 빚어놓은, 상서로운 기운이 듬뿍 서린 산으로 그윽한 정취가 감도는 명산이다. 서울에서 동쪽으로 40km,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되는 양수리에서 북서쪽으로 4km 거리에 솟아 있는 산이다. 1890(고종 27)에 지은 <수종사중수기>에는 운길산으로 나오고, 그보다 오래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조곡산이라고 적혀 있다

<수종사 원경>

 

  산수가 수려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가족 산행이나 가벼운 주말산행지로 널리 알려졌다. 주변에 다산 정약용의 생가와 팔당호·금남유원지 등의 관광지가 있고 산중턱에 수종사(水鐘寺)가 있어 시간계획만 잘 짜면 알찬 볼거리가 많다. 특히 수종사에서 바라보는 팔당호의 모습은 일찍이 서거정(徐居正)이 동방의 사찰 중 전망이 제일이라고 격찬했을 정도다. 그리고 서쪽의 예봉산(禮峰山, 683m)을 함께 종주할 때 기준점이 되는 산이기도 하다

<운길산 정상>

 

  운길산과 수종사는 바늘과 실 같은 관계다. 수종사를 먼저 들렸다가 운길산으로 가는 길이 있고, 반대로 운길산을 먼저 올랐다가 수종사로 내려오는 방법이 있는데, 우리는 후자를 선택하여 자동찻길을 피해 골짜기를 타고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에 수종사를 경유하였다. 수종사로 내려오는 길은 가팔랐지만, 나무로 만든 계단으로 쉽게 내려올 수 있었다

<운길산 가는 길>

 

  좁은 계단 끝에 걸쳐 있는 해탈문(解脫門)을 지나면 산 중턱 높이 걸쳐놓은 듯 자리 잡은 게 수종사다. 수종사(水鍾寺)의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다. 경내의 석조승탑을 1939년에 중수하면서 조선 초기 유물이 대거 발견됨에 따라 유물이 조성된 같은 시기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1439(세종 21)에 조성된 듯한, 정의옹주(貞懿翁主)의 승탑으로 추정되는 석조(石造)가 그것이지만 절의 자세한 내력은 알 길이 없다

<수종사 해탈문>

 

  금강산을 순례하고 돌아오던 세조가 마침 양수리쯤에 도착하자 날이 저물어 이 부근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세조는 한밤중에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 날이 밝자 종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 곳은 뜻밖에도 16나한이 앉아 있는 바위굴[암혈(巖穴)]이었고, 그 굴속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울려 나오는 소리였다. 그 뒤 1458(세조 4)에 왕명으로 그곳에 절을 짓고 절 이름을 수종사(水鍾寺)라 했다

<수종사 약사여래불>

 

  현재 약사전 앞에는 아무리 큰 장마와 가뭄에도 물줄기가 마르지 않는 약수가 있어 병자들이 자주 찾곤 하는데, 이곳이 수종사를 중창하게 된 연원의 암굴이었다고 하나 당시의 굴이었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약사전 오른쪽 위에 세조가 돌계단을 쌓아 터를 닦고 굴속의 16나한을 꺼내 모셨다는 나한전만 있다. 이때 대웅보전 옆에 팔각오층석탑을 세워 절의 품격을 갖추었다

<수종사 약수>

 

  수종사는 전망 좋은 사찰이다. 산사에서 바라보면 두물머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두물머리란 북한강과 남한강의 두 물이 만나는 곳으로 한자로 양수리(兩水里)로 표기한다. 북에서 남으로 힘차게 내리 꽂는 북한강은 선머슴 같고, 오지랖 넓게 대지를 적시는 남한강은 어떠한 것도 포용하는 어머니 같다.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이던 두물머리 모습이 오늘 따라 선명하지가 않은 것은 미세먼지가 시야를 가리기 때문이다. 더욱이 차() 한 잔 음미하며 통유리 창 너머로 바라보던 찻방 삼정헌(三鼎軒)은 굳게 닫혔다

<양수리 지도 - 네이버캡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어려서부터 일생을 통해 수종사에서 지낸 즐거움을 군자유삼락(君子有三樂)’에 비교할 만큼 좋아 했던 곳으로 역사문화 가치가 높은 곳이며, 또한 다선(茶仙)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정약용을 찾아와 한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차를 마신 장소로서, 차 문화와 인연이 있는 곳이다. 코로나19로 문이 굳게 닫힌 삼정헌이 차 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지어진 찻방으로 알려져 있다

<수종사 삼정헌 찻방 - 네이버캡쳐>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중 독백탄(獨栢灘)은 현재의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의 경관을 보여주는 진경산수화다. 이 그림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양수리 족자섬 앞의 큰 여울과 그 주변을 그린 것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의 물머리를 맞대는 가운데 강줄기를 갈라놓는 긴 섬 위로 수종사(水鍾寺)가 있는 운길산이 보인다. 강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은 지금의 남양주시 능내리이며, 그 앞의 긴 섬이 족자섬으로 위에서 보면 발자국과 같은 모양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겸재 정선의 독백탄(獨栢灘)>

 

  닫힌 찻방을 뒤로하고 대웅보전과 종각, 500년 된 은행나무 등을 둘러보았다. 수종사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주불(主佛)로 비로자나불을 모셨고 오른쪽에 노사나불(盧舍那佛), 왼쪽에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모셨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은 보통 사람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광명(光明)의 부처다. 법신은 빛깔이나 형상이 없는 우주의 본체인 진여실상(眞如實相)을 의미하는 것으로 태양을 의미한기도 한다. 특이하게도 수종사는 대웅보전 안에 우리 민속신앙인 칠성님도 모셔놓았다

<수종사 대웅보전 - 네이버캡쳐>

 

<수종사 삼존불>

 

  보물(1808)로 지정된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고려시대 팔각석탑의 전통을 이어 조선시대에 건립한 것으로 출토된 사리장엄과 명문을 볼 때 건립연대는 늦어도 1493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왕실 발원의 석탑인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탑의 구조로 보아 기단부는 불상대좌의 양식이고, 탑신부는 목조건축양식이며, 상륜부는 팔작기와지붕의 양식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조성된 석탑 중 유일한 팔각오층석탑으로 여겨진다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500년 된 은행나무는 범종각(梵鐘閣) 아래에 버티고 서있어 추색(秋色)이 깊어지고, 그 아래로 한음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의 별서(別墅)터로 가는 오솔길이 있다. 한음(漢陰) 31세에 대제학(大提學)에 오르고, 42세에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7년여의 임진왜란을 수습하는 바쁜 와중에도 산수가 빼어난 운길산을 사랑하여 사제촌(莎堤村, 지금의 조안면 송촌리)에서 수종사로 이어지는 돌길을 따라 자주 걸었다고 한다

<수종사 은행나무>

 

  사제촌으로 내려가는 길을 비켜 일주문 쪽으로 큰 길을 따라 내려오면 미륵석불이 내세(來世)를 바라본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미륵불(彌勒佛)이 내세의 신앙으로 폭넓게 수용되었다. 미륵불은 석가모니불이 열반에 든 뒤 567000만 년이 지나면 이 사바세계에 출현한다는 미래불이다. 미륵의 세계는 땅이 유리와 같이 평평하고 깨끗하며 꽃과 향이 뒤덮여 있다고 한다. 또한 인간의 수명은 84000세나 되며, 지혜와 위덕이 갖추어져 있고 안온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나 과연 이런 세상이 올까? 꿈은 희망이 된다.

<수종사 미륵석불>

 

<수종사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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