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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11-3)

와야 정유순 2021. 10. 31. 13:31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11-3)

(2021 9 39 14)

瓦也 정유순

<11-3> 고창읍성

(2021 9 13)

 

  전라북도 서남부 끝에 자리한 고창(高敞)! 보리고을을 상징하는 모량부리의 속명인 모양현(牟陽縣)으로도 불렀다. 그곳에는 선운산도립공원을 비롯하여 고창읍성,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고인돌 군(), 그리고 람사르협약에 의해 지정된 운곡습지, 1894년 갑오 동학농민혁명의 첫 불을 든 무장읍성 등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지역으로 눈 여겨 볼만한 곳이 많다. 고창읍성 앞에 당도하면 고창군립도서관 벽면에는 성 안에서 판소리 한 마당이 펼쳐지는 장면이 눈길을 끈다

<고창군립도서관>

 

  사적(145)으로 지정된 고창읍성(高敞邑城) 1450(조선 세종32) 전라우도(全羅右道)인 고창(高敞), 무장(茂長)  14개 군현(郡縣)과 전라좌도(全羅左道)인 용담(龍潭/진안), 임실(任實)  5개 군현이 참여하여 3년만인 1453(단종원년)에 완공하였다. 축성 당시 각 고을에서 참여했던 사람들은 자기가 쌓은 구간과 고을 이름을 성벽에 새겨두었다. 모양성(牟陽城)으로도 불리는 고창읍성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석성이다

<고창읍성 지도>

 

  읍성 입구에서는 답성(踏城)놀이 하는 여인상이 먼저 반긴다. 모양성 성 밟기 놀이는 윤년(閏年) 윤달에 액운을 쫓고 무병장수하며 극락왕생한다는 속신이 있으며, 부녀자들이 행렬을 지어 산성을 도는 보편화된 세시풍속이다. 윤달에서도 엿세 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 하여 초엿세날, 열엿셋날, 스무엿셋날을 답성일로 택한다고 한다. 실제 1678년에 현감 이항(李恒)은 고창 모양성(牟陽城)을 개축할 때에도 윤3월을 택하였으며, 순조 3(1803) 고창읍에 읍치풍수의 석조물을 조성할 때에도 윤3월을 택하였다

<고창읍성 답성놀이상>

 

  답성놀이 때 손바닥만 한 돌을 머리에 이고 읍성의 북문이자 정문인 공북루(拱北樓)로 들어가 높은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북문으로 돌아오는 방식은 북문을 저승길로 들어가는 극락 문이라 할 수 있으며, 그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모양성을 현실속의 극락세계로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부녀자들이 생전에 극락세계를 한번 다녀오고 싶어 답성놀이를 즐겼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 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 한다.’는 전설도 맥을 같이 한다

<고창읍성 답성놀이 시작>

 

  정문인 공북루로 들어가 위로 올라가기 전에 공북루의 주춧돌을 보면 크기가 제 각각이다. 바깥 쪽 주춧돌은 2 남짓으로 큰 돌로 받침을 했고, 그 다음 주춧돌은 양쪽으로는 1 미만의 돌로 가운데는 얕은 주춧돌로 바쳤으며, 안쪽으로는 기둥이 바닥에 박혀 있는 듯한 아주 얕은 주춧돌을 사용하였다. 언뜻 보기에는 재료에 맞춰 불규칙하게 사용한 것처럼 보이나 알고 보니 자연을 이용한 놀라운 과학이 숨어 있다. 이는 북쪽으로 기울어진 지세를 따라 불어오는 강풍으로부터 누각을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한다

<고창읍성 공북루>

 

<고창읍성 공북루 후면>

 

  언덕으로 올라가 서문인 진서루(鎭西樓)를 바라보며 조금 더 올라가면 맹종죽(孟宗竹)이 숲을 이뤄 하늘을 찌른다. 이 대나무는 관상용으로 중국이 그 원산지다. 1938년 청월(淸月)에 유영하선사(劉英河禪師)가 불전(佛典)의 대중포교를 위해 이곳에 보안사(普眼寺)를 세우고 그 운치를 돋우고자 조성한 것이다. 맹종죽은 중국 삼국시대에 효자 맹종(孟宗)이 눈 속에서 죽순(竹筍)을 얻어 어머니에게 드린 고사에서 연유한다. 죽순을 식용하고 크게 자라지만 재질이 무르기 때문에 세공용으로는 쓰지 못한다

<고창읍성 맹종죽>

 

  진서루에서 성벽 위로 답성(踏城)을 하며 남벽 쪽으로 올라간다. 보수(補修)하는 과정에서 성벽 위에 시멘트를 덕지덕지 발라 놓은 것은 원형(原形)을 보전하려는 노력과는 배치되며 ()의 티. 기왕에 성안의 솔밭과 조화를 이루며 아름답게 보존되어온 우리의 문화유산을 아무 생각 없이 행정의 편의를 위하여 자행(恣行)되어도 괜찮은 것인지 묻고 싶다. 조금만 생각하면 이러한 우를 범하지 않을 텐데… 

<고창읍성 진서루와 옹성>

 

  성안의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성황사(城隍祠)는 성황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성황신(城隍神)은 고을의 평화와 풍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지금도 매년 음력 9 9일 중양절(重陽節)이면 모양성제(牟陽城祭)를 이곳에서 지낸다. 이 자리에 있던 성황사도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1년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구와 자료를 참고하여 원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고창읍성 성황사>

 

  남벽에서 동벽 쪽으로 내려오면 동문인 등양문(登陽門)이 있고, 성벽 아래로 내려와 우회하여 동문 옹성에 오른다. 옹성(甕城)은 성문 앞에 설치되는 시설물로 모양이 마치 항아리와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옹성(甕城)은 성문을 공격하거나 부수는 적을 측면과 후방에서 공격할 수 있는 시설이다. 적이 통나무를 들고 가속을 붙여 성문을 공격하려 해도 공간적 여유를 주지 않기 때문에 성문보호를 위해 중요한 시설이다. 고창읍성의 북문과 서문에도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고창읍성 등양문(동문) - 2019년 1월>

 

  동문 옹성에서 내려와 숲길을 지나 고창객사로 향한다. 조선시대에는 각 고을에 객사(客舍)라고 하는 관아가 있었다. 객사 중앙의 몸체[正堂(정당)]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나라에 경사나 궂은 일이 있을 때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으며, 왼쪽과 오른쪽 방[익실(翼室)]은 조정(朝廷)에서 파견된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현판으로 걸린 牟陽之館(모양지관)의 모양은 고창의 옛 이름이며, 객사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1년 복원하였다

 

<고창읍성 객사(모양지관)>

 

  객사 아래에는 고창동헌과 내아(內衙)가 있다. 동헌(東軒)은 조정에서 임명된 수령(守令)이 정무(政務)를 보던 청사이며 이를 보통 외동헌이라고 한다. 건물 정면에는 平近堂(평근당)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이는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고을을 평안하게 잘 다스린다.” 뜻으로 악필(握筆)로 유명한 고창출신 석전 황욱(石田 黃旭, 18981993) 92세에 썼다. 내아는 내동헌이라고도 하며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이다. 이곳도 터만 남았던 것을 발굴조사를 통해 동헌은 1988년에, 내아는 1989년에 복원하였다

<고창읍성 내아-2019년 1월>

 

  내아 아래에는 장청(將廳)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왕궁과 병영 및 진()을 지키는 중앙군인과 지방의 군현(郡縣)을 지키는 속오군(束伍軍)제도가 있었는데, 장청은 속오군의 우두머리인 현감(縣監)과 병방(兵房군교(軍校)들이 군무를 보던 청사(廳舍). 이 자리도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1년 발굴조사를 하여 2000년도에 복원하였다. 동쪽 마루에 있는 작청과 향청 등 은 이방(吏房) 등 아전(衙前)들이 사무를 보던 곳이다

<고창읍성 작청>

 

  읍성 안의 중앙에는 풍화루가 있다. 풍화루(豊和樓)는 연못 옆에 세운 2층 누각이다. 원래 성내에는 빈풍루(豳風樓)와 풍화루가 있었다고 전해오나, 건물과 연못은 모두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88년 발굴 조사·확인된 유구와 각종 자료를 참고하여 풍화루는 1989년에, 연못은 1990년에 원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정면에 있는 豊和樓편액은 풍년과 고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뜻으로 석전 황욱이 92세에 쓴 악필(握筆)이다

<고창읍성 풍화루>

 

  공북로에서 진서문 쪽으로 공터에는 척화비(斥和碑)가 있다. 이비는 조선 말엽인 병인년(丙寅年, 1866)에 비문을 만들고 신미년(辛未年, 1871)에 세웠다. 당시 서양열강들이 무력을 앞세워 문호개방을 압력으로 요구하자, 당시 섭정(攝政)하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이를 물리치고 세웠다. 비문의 내용은 서양의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和親)을 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임을 온 백성에게 경계한다.(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戒我萬年子孫 丙寅作辛未立)”라는 뜻이다

<고창읍성 척화비>

 

  북문 앞에는 옥()이 있다. 옥은 죄인을 가두는 곳으로 감옥(監獄)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옥은 대개 관아의 입구에다 짓고 동쪽과 서쪽에 나누어 칸을 내고 남녀 옥을 구분하여 높은 담을 둥글게 둘러 쳤다하여 일명 원옥(圓獄)’이라고도 한다. 이 자리도 터만 남아 있던 것을 2000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고창읍성 옥>

 

  고창읍성 앞에는 판소리를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桐里 申在孝, 18121884)의 고택과 동리국악당, 고창판소리박물관이 있다. 신재효 고택은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1850(철종1)에 건립하였다. 원래는 주변의 물을 끌어들여 마루 밑을 통해 서재 밖 연못으로 흘러가도록 만든 집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파묻혔고 연못만 복원하였다. 신재효는 심청가, 적벽가, 춘향가, 토끼타령, 박타령, 변강쇠타령 등 판소리 열두 마당 중 여섯 마당의 체계를 세웠으며, 판소리의 창극화와 함께 판소리 사설을 집대성 하였다.

<동리 신재효 고택 - 2019년 1월>

 

 <동리고택 호랑가시나무 - 2021년 10월>

 

 

 <1>부터 <12>까지 후기가 계속 이어지며

다음은 제11-4일차 <고창 선운사>편이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