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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11-1)

와야 정유순 2021. 10. 27. 22:37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11-1)

(2021 9 39 14)

瓦也 정유순

<11-1> 화순 만연사 담양 명옥헌

(2021 9 13)

 

  흑산도에서 목포에 도착하자마자 자동차는 쉬지 않고 달려 도착한 곳은 광주와 전남이 공동으로 2014년 조성한 혁신도시인 전라남도 나주시 빛가람동으로, 한국전력공사와 한국농어촌공사 등이 이전해 온 곳이다. 조반을 위해 나주곰탕집으로 출발하려고 나와 보니 배메산전망대를 중심으로 빛가람호수공원에는 주민들이 아침 산책을 즐긴다. 이 지역은 대부분 농경지와 구릉지, 자연취락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나주시 금천면 일부와 산포면 일부를 편입하여 조성된 동()이다

 

 <가람동 배메산전망대>

 

  2013년 명칭 공모를 통하여 동명(洞名)이 결정된 <빛가람동>이란  가람(강의 순우리말)’을 조합한 것으로, ()의 북쪽 너머로 흐르는 영산강과 빛고을 광주의 빛이 하나 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 이전(移轉)해 온 공공기관인 한국전력 등 에너지 기관을 상징하는 과 한국농어촌공사 등 농생명 기관을 상징하는 (가람)’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나주시 빛가람동 지도>

 

  조반은 옛 금성군의 정청(政廳)이었던 금성관 앞이다. 보물로 지정된 금성관(錦城館) 1373(고려 공민왕 22)에 창건하였으며 정면 5,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다. 1603(선조 36)에 크게 중수했고 1884(고종 21)에 목사 박규동(朴圭東)이 삼창(三創)을 했으며 그 후 1963 9월에 보수, 1976년에 해체 복원공사를 하였다. 금성(錦城)은 나주의 옛 지명이었으며, 나주시가 도농통합 이전에는 금성시(錦城市)로 부른 적도 있다. 그리고 전라도(全羅道)는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앞 글자를 따서 지명이 되었다

<금성관 망화루(정문)>

 

<금성관 전경>

 

  오늘 첫 방문지는 전남 화순에 있는 만연사다. 만연사(萬淵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松廣寺)의 말사로 1208(고려 희종 4)에 선사 만연(萬淵)이 창건하였다는 전설만 전해질 뿐 기록이 없으나, <동사열전> 등 다른 기록에 의하면 고려 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조에 왕실의 복을 빌었던 자복사(資福寺)로 지정되어 전국 8개의 사찰 중 하나일 정도로 유서 깊고 중요한 사찰이었다

<나한산만연사 일주문>

 

  그러나 창건설화에 의하면 만연은 광주 무등산의 원효사(元曉寺)에서 수도를 마치고 조계산 송광사로 돌아오다가 지금의 만연사 나한전(羅漢殿)이 있는 골짜기에 이르러 잠시 쉬다가 잠이 들었다. 십육나한이 석가모니불을 모실 역사(役事)를 하고 있는 꿈을 꾸고 주위를 둘러보니 눈이 내려 온누리를 덮고 있었는데, 그가 누웠던 자리 주변 만은 눈이 녹아 김이 나고 있는 것을 보고 경이롭게 생각하여 토굴을 짓고 수도하다가 만연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만연산을 나한산(羅漢山)으로도 부르는 것 같다

<만연사 화우천>

 

  또한 병자호란 때에는 군중일지(軍中日誌)에 필요한 종이 및 주식·부식 등을 조달해 외적 방어에 도움을 주었다. 1777년에는 화순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왔던 당시 16살의 다산 정약용이 형 정약전과 함께 독서를 하며 호연지기를 키우던 곳이었다. 한말에는 당시 국창(國唱)으로 불리던 이동백·이날치 명창이 만연사에서 소리를 닦았으며, 정광수·임방울 등 당대의 명창들도 이곳에서 창악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 때 모든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978년부터 4년에 걸쳐 주지 철안(澈眼)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만연사 대웅전>

 

  창건 이후 한때는, 대웅전과 시왕전·나한전 등의 전각을 비롯하여 승당·선당·동상실·서상실·동별실·서별실 등 많은 건물이 있었고, 누각도 설루·사천왕문·삼청각·사리각 등이 있는 큰 사찰이었다. 이 중 사리각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사리를 모셔 둔 건물이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나한전·명부전(冥府殿한산전(寒山殿)과 요사채가 있으며, 부속 암자로는 선정암(禪定庵)과 성주암(聖住庵)이 있다

<만연사 삼존불>

 

  유물로는 고려 말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향나무 원목의 삼존불과 시왕상(十王像십육나한상 등의 불상이 있으며, 1783년에 비현(丕賢금어(金魚)의 작품으로 전하는 세로 760, 가로 586의 괘불(掛佛)은 불화의 조선 후기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괘불은 도 지정문화재에서 2002년에 국가지정 보물로 승격되었다. 이 밖에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범종(梵鐘) 등이 있으며, 경내에는 둘레 3m, 높이 27m, 수령 770여 년의 전나무가 있는데, 만연사 창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심었다고 전한다

 <만연사 괘불 - 네이버캡쳐>

 

  다음 행선지는 담양군 고서면에 신덕리 후산마을에 있는 명옥헌이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후산방죽 쪽으로 여유를 부린 후 후산마을을 가로질러 명옥헌에 도착한다. 명옥헌(鳴玉軒) 흐르는 물소리가 구슬이 부딪쳐 나는 소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명옥헌 정원은 산기슭을 타고 내리는 계류를 이용한 위 연못과 아래 연못, 아래 연못을 바라볼 수 있도록 북서향으로 앉은 정자로 이루어져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44)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에 국가지정 명승(名勝)으로 승격되었다

<담양군 고서면 신덕리 후산마을과 방죽>

 

<명옥헌>

 

  <명옥헌>은 조선중기 오희도(吳希道 15831623)가 자연을 벗 삼아 살던 곳으로 그의 넷째아들 오이정(吳以井 16191655)이 부친의 뒤를 이어 이곳에서 글을 읽고 많은 저술을 남긴 별서정원(別墅庭園)이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사방이 마루이고 가운데에 방이 있다. 마루높이가 다른 정자보다 높은 편인데, 그래서인지 소박한 난간이 빙 둘리어 있다. 동서로 20m, 남북으로 40m 되는 네모진 연못 안에 동그란 섬이 있는 아래 연못가에는 배롱나무가 푸짐하게 둘러섰다

<명옥헌 꽃무릇 길> 

 

<명옥헌 편액>

 

  정자 건물 서쪽에 있는 위 연못은 자그마한데, 가운데에 바위가 섬처럼 놓여 있다. 이 연못 둔덕에도 역시 배롱나무 고목들이 얽혀 섰다. 산에서 내려오는 계류는 먼저 이 연못을 채우고 다시 흘러서 아래쪽 큰 연못을 채운다. 지금은 수량이 적어 실감이 안 나지만 예전에는 이 물 흐르는 소리가 옥이 부딪치는 소리 같았다고 한다. 위 연못 위쪽으로는 암반이 깔려 있고 그중 한 바위에 새겨진명옥헌 계축(鳴玉軒 癸丑)’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지금 명옥헌에 걸려 있는 편액은 이 글씨를 모각한 것이다

<명옥헌 아래 연못>

 

<명옥헌 위 연못(2015년8월)>

 

  여름에 이곳을 찾는 사람은 연한 분홍에서 진분홍을 거쳐 보라에 가까운 분홍까지, 보기만 해도 절로 감탄하는 배롱나무 꽃 잔치를 향유할 수 있는 곳이다. 이 정원은 별도의 담장이 없이 옆으로 벌어진 산자락과 입구의 작은 언덕으로 아늑히 감싸여 있는 원림(苑林)으로, 울타리와 담장이 있는 원림(園林)과 구별 된다. 못의 서남쪽 소나무 사이로 멀리 무등산이 보인다. 원래 소나무가 많았는데 후산마을에 단감을 심느라고 다 베었다고 한다

<명옥헌 배롱나무 군락(2015년8월)>

 

<명옥헌 아래 연못 배롱나무(2015년8월)>

 

  특히 배롱나무는 모내기가 끝나면 꽃이 피기 시작하여 벼가 익어 추수할 때까지 백일을 핀다하여 백일홍(百日紅)이라고 하고, 쌀밥나무 또는 자미화(紫微花)라고도 하며, 이 나무가 간지럼을 탄다하여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 푸른 잎 위에 붉은 장식을 한 양 만개한 꽃잎이 작열하는 태양열을 가슴으로 안아주며 한여름을 수놓는다

 

배롱나무

 

육질은 박달나무요 껍질은 매끈매끈

원숭이도 떨어진다는 배롱나무

꽃이 귀한 긴 긴 여름 날

붉은 꽃 연달아 피어 올려 백 일을 버티고

실 바람이 간질이면 부끄러워

잎 새 부르르 떨다가

마지막 꽃잎 떨어지는 날

하얀 쌀 고봉밥 한 그릇이로다. 

<명옥헌 배롱나무(2015년8월)>

 

<만연사 배롱나무>

 

 

 

 <1>부터 <12>까지 후기가 계속 이어지며

다음은 제11-2일차 <장성 필암서원>편이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