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길 - 봉원사(奉元寺)
(2021년 7월 25일)
瓦也 정유순
서울특별시 서대문 밖 봉원동(奉元洞) 안산(鞍山) 자락에는 봉원사(奉元寺)라는 절이 있다. 지하철 2호선 이대(梨大)역에서 내려 이화여자대학교 정문 앞으로 하여 경의선 신촌역을 지나 성산로를 따라 금화터널 쪽으로 향하다가 세브란스병원 앞을 지나 이대부속중·고등학교 앞에서 봉원사길로 접어들어 경사진 길을 따라 숨 가쁘게 올라가면 봉원사 초입에 부도비 군락을 만나고, 절 입구 민가에는 회화나무가 한여름의 기운을 맘껏 발산한다.
<부도비>
<회화나무>
봉원사는 한국불교태고종(太古宗)의 총본산이다. 한국불교태고종은 고려 말 태고(太古) 보우국사(普愚國師)를 종조(宗祖)로 삼고, 석가모니의 자각각타(自覺覺他)와 각행원만(覺行圓滿)을 근본교리로 받들어 실천하고, 태고보우국사의 종풍을 선양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 전법도생(傳法度生)함을 종지(宗旨)로 삼고 있는 우리나라 불교 27종단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사찰의 개인소유 인정과 승려의 결혼문제를 자율에 맡겼으며 출가를 하지 않더라도 사찰을 유지·운영할 수 있는 재가교역자제도인 교임제도를 두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1954년 5월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가정을 이룬 중들은 사찰에서 물러가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한 이후 조계종은 승려의 독신을 주장하는 세력과 결혼을 허용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으나, 5·16쿠데타 이후 불교재건위원회에 의해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을 종명으로 통합종단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중앙종회 구성의 쌍방 이견 대립으로 1970년 1월 박대륜(朴大輪)을 종정으로 하여 통합종단에서 분리하여 태고종 종단을 발족하고 <한국불교조계종>과 통합하여 <한국불교태고종>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세브란스병원>
봉원사는 신라후기인 889년(진성여왕 3)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현 연세대학교 자리에 창건하고 처음에는 반야사(般若寺)라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지인(智仁)이 크게 중창하였다. 1748년(영조 24)에 찬즙(贊汁)·증암(增巖) 두 대사가 현 위치로 이전 중건하면서 <봉원사>라 개칭하였다. 영조(英祖)의 친필로 쓰인 봉원사라는 현판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연세대학교>
봉원사 대웅전은 1856년(철종 6년)에 은봉(銀峯), 퇴암(退庵)화상 등이 대웅전을 중건하였고, 1985년 12월 5일 서울시 유형문화재(제68호)로 지정되었으나, 화재로 인하여 소실됨에 따라 1993년 9월 23일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다. 대웅전 건물은 1991년 다시 지어, 단청이 뚜렷하고 화려하다. 두 마리의 해태상이 지키고 있는 앞에서 바라본 대웅전은 편액 밑 양쪽으로 용 두 마리가 정면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대체로 지붕에 많은 무게감이 실려 있어 윗부분이 화려하고 중후하다.
<봉원사 대웅전>
봉원사의 창건 연대가 오래되었지만 사격(寺格)이 커진 것은 조선 영조 때다. 영조는 재위 26년(1750) 8월 27일 첫 손자인 세손 의소(懿昭)를 보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손은 영조 28년(1752) 3월 창경궁 통명전(通明殿)에서 죽었다. 정조의 형인 의소는 아현동(애오개)에 묻혔다가 훗날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첫손자를 잃은 안타까움에 할아버지 영조는 연잉군 시절 살던 통의동의 창의궁에 의소의 묘(廟)를 세웠다. 의소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영조는 손자의 천도를 위해 봉원사를 원찰로 삼았다.
<대웅전 삼존불>
대웅전 좌측으로는 운수각 영인각 전씨전각 등 전각이 있으며, 대웅전 아래 마당 한쪽에는 1966년 주지 영월(映月)스님과 대중의 원력으로 전에 소실된 염불당(念佛當)을 중건하였는데, 이 건물은 공덕동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 아소정(我笑亭)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지금은 대방(大房)이라 부른다. 전각 밖에는 운강석봉(雲岡石峯)이 쓴 <奉元寺(봉원사)> 편액이 걸려 있고, 안에는 추사와 옹방강의 글씨가 돋보인다.
<봉원사 대방(염불각)>
<奉元寺(봉원사)> 현판을 쓴 운강석봉이란 분은 자세히 알 수가 없고, 옹방강(翁方綱)은 청나라 학자로 특히 금석학, 비판(碑版) 등에 관해 해박하여 추사 김정희의 스승이 되었고, 흥선대원군은 추사로부터 사사 받았다. 이러한 연으로 아소정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옹방강의 <無量閣壽(무량수각)>과 추사의 <珊瑚碧樓(산호벽루)>와 <靑蓮詩境(청련시경)> 편액이 그대로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편액 좌측에 <완당(阮堂)>이란 호는 추사 김정희의 또 다른 아호(雅號)다.
<옹방강의 무량수각>
<추사의 산호벽루>
<추사의 청련시경>
대방의 계단 아래에는 범종각(梵鐘閣)이 있는데, 이 종은 1846년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충청남도 예산으로 이장하기 위하여 파괴한 가야사(伽倻寺)의 범종을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가야사의 금종을 녹여 다시 만들어 봉안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래도 봉원사는 대원군과 연이 있는 것 같다.
<봉원사 범종각>
대웅전 마당 우측에 있는 3천불전은 1986년 주지 조일봉 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건물허가 및 준비 과정을 거쳐 1988년 삼천불전의 복원불사가 시작되어 단일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의 건물로 9년 여 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삼천불전의 아름다운 내부 단청과 모셔진 불상들의 모습은 보수공사 중으로 볼 수가 없었다.
<봉원사 삼천불전-네이버캡쳐>
대웅전 우측에는 명부전이 있다. 명부(冥府)란 염라대왕이 다스리는 유명계 또는 명토(冥土)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고,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전각이다.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 곳이므로 지장전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명부전의 편액은 조선 건국의 주역 삼봉 정도전(鄭道傳)의 글씨고, 주련(柱聯)은 조선을 일본에 팔아넘긴 이완용(李完用)의 글씨다. 조선의 개국과 망국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묘한 감정이 교차하는 심사는 무엇일까?
<명부전>
<명부전 편액>
우리나라 사찰의 큰 특징은 대웅전 뒤편에는 칠성각이나 산신각 또는 삼성각이 있다. 칠성각은 북두칠성 신앙의 흔적으로 우리 전통신앙이고, 산신각은 산신을 모시는 전각이다. 삼성각도 전통신앙으로 불교와 무관하다. 우리민족은 본래 북두칠성을 신으로 믿어왔다. 불교가 처음 들어올 당시에 우리나라에는 이미 북두칠성과 환웅(桓雄)과 단군(檀君)을 신앙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래서 대웅전과 산신각, 칠성각을 보면 불교가 들어오면서 우리 전통 신앙의 바탕 위에 불교를 받아 들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봉원사 칠성각>
명부전과 칠성각을 지나 미륵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는 <한글학회 창립한 곳>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처음에는 국어연구학회로 출범한 한글학회는 1908년 8월 31일 주시경과 김정진 등 당대의 지식인들이 우리 민족의 문맹을 깨치고 나라의 주권을 지키고자 이곳에서 창립총회를 연 곳이다. 창립 초기부터 우리 말글의 수호와 연구, 보급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에 목표를 두었다. 광복 후에는 한글문화와 국어학 발전 등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글문화를 보급하고 우리 말글의 선양 사업을 펼치고 있다.
<한글학회창립 표지석>
봉원사 미륵전(彌勒殿)은 특이하게도 흰색의 현대식 건물이다. 미륵전은 사찰에서 미래불인 미륵불을 모시는 전각이다. 이곳은 미륵불이나 도솔천에서 설법하고 있는 미륵보살을 모시는데, 이는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내세 신앙의 발로 때문이다. 미륵전 내부에는 미륵불입상이 봉안돼 있으며 미륵불 옆으로는 윤장대(輪藏臺)가 마련되어 있다.
<미륵전>
<미륵전 내부>
봉원사는 1788년(정조 12)에는 전국 승려들의 풍기를 바로잡기 위한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있었던 곳이다. 승풍규정소는 전국적으로 일곱 군데가 있었는데, 광주의 봉은사(奉恩寺), 양주봉선사(奉先寺), 남한산성 안의 개운사(開運寺), 북한산성 안의 중흥사(重興寺)와 수원의 용주사(龍珠寺) 등 5곳이 주였고, 이 밖에 서울 동쪽에 있는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와 서대문 밖에 있는 봉원사(奉元寺) 등 두 곳의 공원소(公員所)가 있어 이를 합하여 7규정소라고 한다.
<봉원사 삼층석탑>
봉원사에서 매년 열리는 영산재(靈山齋)는 불기(佛紀) 약 2600년 전 인도 영취산(靈鷲山)에서 석가모니께서 여러 중생(衆生)이 모인 가운데 법화경(法華經)을 설(說)하실 때의 그 모습을 재현화한 불교 의식이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 부처의 가르침을 깨달으라는 의미를 담은 불교의식으로서,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음악, 무용, 연극적 요소가 배어 있어 그 가치를 높게 평가 받고 있으며,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다.
<봉원사 연못>
구한말에는 개화파의 대표적 인물인 이동인은 이곳 봉원사에 주석하면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과 함께 교류함과 동시에 일본과 서양문물에 관한 지식을 쌓아갔으며 승려의 신분으로 수차례 일본을 내왕하며 당시의 선진문물을 소개하여 김옥균 등을 개화사상에 눈 뜨게 하는 직접적인 역할을 하였고 갑신정변도 모의하기도 했다. 신사유람단의 일본행에도 결정적 막후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 때문에, 서재필(徐載弼)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곳 봉원사를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하였다.
<이동인 기념비-네이버캡쳐>
그리고 여름이면 봉원사에는 함지박에 심은 연꽃들이 만발한다. 연(蓮)은 불교를 상징하는 꽃으로 진흙 속에서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자라면서도 물들지 않고 더렵혀지지 않는 깨끗함과 향기로움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의 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빗물만 품고 있다가 조금만 넘쳐도 금세 머리를 숙여 미련 없이 버린다. 불가에서는 물이 연잎에 붙지 않는 것과 같이 인간이 탐욕에 물들어서는 아니 됨을 설파하고 있다.
<봉원사 연꽃>
봉원사에서 안산(鞍山)자락으로 들어서기 전에 극락전과 만월전이 있다. 극락(極樂)의 주불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한 극락정토에서 늘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데, 이를 상징하는 극락전을 아미타전 또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극락전을 본당으로 삼고 있는 절에서는 극락을 의역한 ‘안양(安養)’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안양교·안양문·안양루 등을 갖추기도 한다. 이 극락전에는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 부부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봉원사 극락전>
만월전(滿月殿)에는 약사유리광여래(藥師琉璃光如來)를 주불(主佛)로서 상단에 모시고 있다. 이곳에는 약사불회도(藥師佛繪圖)와 독성도(獨聖圖), 산신도(山神圖)를 봉안하였었다. <봉원사 약사불회도>는 중앙 약사여래 중심으로 일광·월광보살, 사천왕상 2위, 약사12신장(藥師十二神將)으로 구성된 군도형식이다. 약사12신장은 약사여래의 분신 또는 권속으로서 본존을 둘러싼 수호자들이다. 독성도와 산신도는 현재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봉원사 만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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