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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길-청권사(淸權祠)

와야 정유순 2021. 7. 21. 00:38

가깝고도 먼 길-청권사(淸權祠)

(2021 7 7)

瓦也 정유순

  서울지하철 2호선 방배역 4번 출구로 나오면 청권사(淸權祠)라는 사당이 있다. 청권이란 중국 주나라의 태왕이 맏아들 태백과 둘째아들 우중을 두고, 셋째아들 계력(주문왕)에게 왕위를 물려 준데서 나온 말이다. 태백과 우중은 태왕의 뜻을 알고 형만으로 가서 은신하며 왕위를 사양했다. 이를 두고 후일에 공자가 태백을 지덕(至德), 우중을 청권(淸權)이라고 칭송하였다

<청권사 정문>

 

  태종의 셋째아들인 충녕대군(1397~1450)이 왕위(세종)에 올라 태백과 우중의 고사를 떠올리며 나의 큰형님 양녕대군(1394~1462)은 곧 지덕이요, 둘째 형님 효령대군은 곧 청권이다라고 했다. 후에 정조(正祖)는 양녕대군 사당에는 지덕사, 효령대군 사당에는 청권사라는 현판을 사액하였다. 이로 인하여 오늘날 전주이씨 양녕대군파는 종친회 이름을 지덕사, 효령대군파는 청권사라 하고 있다

<효령대군 영정-네이버캡쳐>

 

  효령대군은 태조 5(1396) 아버지 태종 이방원과 어머니 원경왕후 여흥민씨 사이의 둘째 왕자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보()였다. 그러나 요절한 형이 3명이 더 있으니, 태어난 순서대로 하면 5남이다. 양녕대군의 동생이고, 세종의 형. 이름은 이보(李?), 50만 전주이씨 효령대군파의 파시조(派始祖). 효성이 지극하고 독서를 즐기며 활쏘기에 능했다. 태종은 사냥터에 나갈 때 마다 효령을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효령대군 신도비>

 

  태종 18(1418) 형 양령대군(讓寧大君)이 세자에서 폐위될 때 세자 후보로 거론되었고, 또한 자신이 세자로 책봉될 것이라고 내심 기대했었으나 태종은 효령대군이 지나치게 점잖은 성격이었고, 술을 마시지 못하기 때문에 술 마실 일이 많은 왕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태종의 마음이 동생 충령(忠寧)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깨끗하게 단념하였다

<청권사 후문>

 

  그는 10세인 1405년 효령군에 책봉되었으며 12세이던 1407년에 해주 정씨 부인(정역의 딸)과를 가례를 치렀고 17세이던 1412년에 효령대군에 진책(進冊)되었다. 1417년 자신의 아호(雅號)이기도 한 연강(蓮江)이라는 법명(法名)으로 수계를 받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30세 전에 이미 학문과 덕성을 이룩하였고 붓글씨도 능해 명필로 전해진다

<청권사 모연재>

 

  양녕과 효령은 동생 충녕이 세자로 책봉되자 궁궐을 나왔다. 궁 안에 있다가는 권력에 욕심이 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아무리 형제애가 돈독하더라도 왕권에 부담을 주었다가는 한순간에 끝장 날 수 있는 것이 궁궐이다.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고 신변안전을 위해서 양녕은 다소 문란할 정도로 자유분방한 행동을 하였다. 효령은 불교에 심취하여 유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조선은 국가이념이 숭유억불이었기 때문이다.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의 이러한 처신은 권력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효령대군 내외 묘 표석비>

 

  효령대군이 궁을 나와 처음 간 곳은 관악산 최고봉인 연주봉 절벽 위에 있는 연주대(戀主臺). 경기도 기념물(20)로 지정된 연주대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약간의 석축을 쌓아 올린 곳에 있다. 신라시대 677(문무왕 17)에 의상(義湘)이 관악사(冠岳寺, 지금의 연주암) 창건과 함께 세워 의상대(義湘臺)라 이름 붙이고, 이곳에서 좌선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 후 1392(조선 태조 1)에 태조는 무학대사의 권유로 의상대 자리에 석축을 쌓고 30정도의 대를 구축하여 중건하였다

<관악산 연주대-네이버캡쳐>

 

  관악사에서 도성을 바라보자 왕권에 대한 미련이 꿈틀거린다. 그러자 효령은 관악사를 도성이 보이지 않는 정상에서 남쪽 300m 아래로 옮기고 연주암(戀主庵)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지금도 연주암에는 효령대군 영정(경기도 문화재 제81)을 모신 효령각이 있다. 이처럼 욕심을 버리고 산 덕분에 효령대군은 92세까지 장수하여 세종대왕 즉위 후에도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6대에 걸쳐서 장수를 누렸다. 반면에 세종은 54세로 승하했다

<연주암 효령각-네이버캡쳐>

 

  효령대군 묘는 관악산 연주봉에서 내려온 산맥의 끝자락에 있다. 관악산 연주봉은 뾰쪽뾰쪽한 바위들이 하늘을 찌르듯 서 있는 산이다. 풍수에서는 이러한 산을 불꽃처럼 생겼다하여 염정 화성체라고 한다. 기세가 등등해서 이러한 산이 바라보이는 곳에는 집이나 묘를 못쓰는 법이다. 그러나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만은 예외다. 산맥을 용으로 본다면, 용이 한 바퀴 돌아서 자신이 출발한 조종산을 바라보는 형세다. 이때는 앞산이 험해도 자신의 조상이기 때문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논리다

<효령대군 묘역 올라가는 계단>

 

  관악산 연주봉(632.2m)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맥이 남태령을 지나 우면산(293m)를 세웠다. 여기서 북쪽으로 내려온 산맥이 상문고등학교가 있는 능선을 지나 서리풀공원 봉우리를 만든다. 주능선은 서초동쪽으로 이어져 가는데 작은 맥 하나가 남쪽 관악산을 보고 내려와 끝을 맺는다. 이 과정에서 관악산의 험한 석산살기는 모두 사라지고 순한 흙산으로 변했다. 그 자리에 효령대군 묘가 위치한다. 현무에서 묘까지 내려오는 산줄기는 마치 거대한 용이 꿈틀거리는 모습이다

<효령대군 묘역>

 

  용의 기세만큼 혈도 크고 단단하다. 비록 도시화가 되었지만 주변 산과 언덕들은 모두 이곳을 향해 감싸주고 있다. 도심 한 가운데 이런 대혈(大穴)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전주이씨 중에서도 효령대군파가 가장 번창하였다. 후손의 인구가 50만 명이 넘고 수많은 역사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이는 대군의 음택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청권사 백송>

 

  슬하에 7 2녀를 두었으며 1459(세조 4) 정월, 여섯 째 아들 원천군(原川君)을 병사한 아우 성녕대군(誠寧大君)에게 출계(出系)시켜 대를 이어 제사를 봉향(奉享)할 수 있도록 하였다. 생전에 손자 33, 증손자 109인으로 후손이 번성하였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파종회 중에 자손이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특별시는 1984 11 7일 청권사 앞길을 <효령로>로 명명하였다

<청권사 소나무>

 

  그의 아들 중 보성군의 후손들이 번창하여 역대 주요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보성군의 사위 임사홍(任士洪)은 성종과 연산군 대의 문신이며, 그의 아들(효령대군에게는 외증손) 임광재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와 혼인하고, 다른 아들 임숭재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와 혼인하여 왕실의 인척이 되었다. 영의정으로 증직된 보성군의 증손 전성군 이대(李對)의 아들 이량(李樑)은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 심씨의 외삼촌이다

<청권사 연못>

 

  불교를 심오하게 믿어 조정의 숭유억불정책 하에서 불교 보호의 방패 역할을 감당하였다. 원각사 창건 때에는 조성도감 도제조를 맡았다. 이 때 주조되어 1985년까지 보신각에 달려 있던 큰 종과 탑골공원의 10층 석탑은 그 제조기법이나 예술성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10층 석탑은 국보로, 원각사지 대종은 보물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사당 정문>

 

  <법화경>, <금강경>, <원각경>, <반야심경>, <능엄경>, <선종영가집> 등 불경의 번역과 교정에도 힘썼고, 많은 사찰을 순회하면서 신도들을 온후하게 계도하였다. 그리고 향촌의 자치규약인 향헌(鄕憲) 56조를 지어 백성들의 윤리 도덕심을 함양하였으며, 유불심법동일원(儒佛心法同一原)의 이념을 추구하였다

<청권사 사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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