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길-사릉(思陵)
(2021년 7월 8일)
瓦也 정유순
늦은 장마가 일상을 후덥지근하게 한다. 권력의 희생양이 되어 사랑하는 임과 생이별을 한 후 어려운 삶을 살다간 정순왕후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서울 이촌역에서 경의중앙선을 타고 상봉역에서 경춘선으로 환승하여 사릉역에 당도한다. 사릉역의 이름은 인근에 있는 조선 6대 왕 단종(端宗)의 비(妃)인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1440~1521)의 능인 사릉(思陵)에서 유래하였다.
<사릉역>
정순왕후는 1440년(세종22)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에서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15세에 한 살 어린 단종과 혼인하여 왕비에 책봉되었고, 3년 뒤 단종이 왕위에서 쫓겨나 처음에는 상왕의 대접을 받았으나, 2년 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자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됨과 동시에 군부인이 되어 궁에서 쫓겨난다. 짧은 궁궐생활을 끝내고 흥인문 밖에서 머물다가 1521년(중종16) 82세의 나이로 승하한다.
<영월 청령포>
단종과 눈물로 생이별한 후 몇 달 뒤 다른 삼촌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의 단종 복위 움직임이 발각되자 단종은 결국 사약을 받았고, 정순왕후는 노비가 되어 종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으나, 세조가 “신분은 노비이지만 노비로 부리지 못하게 하라.”는 명을 내려 노비생활은 면했다. 정업원(淨業院)에서 지내면서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단종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고, 세조가 내어준 집과 식량까지도 거부하며 인근 백성들과 함께 염색일 등을 하며 청룡사 승방스님으로 눈물겨운 삶을 살았다.
<정업원 터 비각>
서울의 낙산공원 성 밖으로 조금 내려가면 비우당(庇雨堂)이란 초가삼간(草家三間)이 있다. 지봉 이수광(芝峯 李晬光)이 쓴 기록에 의하면 ‘외가 5대 할아버지며 청백리로 유명한 정승(政丞) 유관(柳寬)이 비가 오면 우산으로 빗물을 피하고 살았다는 초가삼간’이다. 원래 이곳은 ‘서봉정(棲鳳亭) 아래 백여 묘(畝)의 동원(東園)이 그윽하게 펼쳐져 있던 곳으로 흥인문 밖 낙봉(駱峯) 동쪽에 있다.’고 쓰여 있다. 묘(畝)는 전답의 면적단위로 6척(尺) 사방이 1보(步)이고, 100보가 1묘(畝)다.
<비우당>
비우당 뒤뜰에는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사연이 깃든 샘으로, 정순왕후가 이곳에서 비단을 빨자 자주색 물이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자주동천이다.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쫓겨난 단종(端宗)이 영월의 관풍헌(觀風軒)에서 읊은 자규시(子規時)에서 “피 눈물 뿌린 봄 골짜기엔 떨어진 꽃잎이 붉네(血淚春谷 落花紅, 혈루춘곡 낙화홍)”라고 절규(絶叫)를 했는데, 그 원한이 핏빛으로 물들어 정순왕후에게 전해진 것은 아닌가? 이 샘으로 인해 그 일대는 자줏골, 자주동과 같이 자주색과 관련된 명칭이 많다.
<자주동천(우물)>
비우당 뒤로 조금 올라가면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삼각산청룡사(三角山靑龍寺)다. 이 절은 조계사 말사로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왕건의 부친인 왕륭(王隆, ?∼897)에게 고려 건국을 예언하며 향후 새 왕조가 일어날 한양의 지기(地氣)를 억누르기 위해서 3,800개의 비보사찰을 짓게 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로 922년(고려 태조5)에 왕건의 명으로 창건되었으며, 한양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의 능선에 있다고 하여 청룡사라 하고, 1405년(조선 태종5)에는 무학대사(無學大師)를 위해 왕명으로 중창하였다.
<삼각산 청룡사>
1457년(세조3) 영월에 유배 가던 날 단종과 정순왕후는 청룡사 우화루(雨花樓)에서 애끓는 이별을 하였다. 단종이 승하하자 정순왕후는 이 절 정업원에 머물며 매일 절 뒷산인 동망봉에 올라 영월 쪽을 보면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대웅전 앞 우화루 옆 암문(暗門)으로 내려가면 정순왕후가 서인(庶人)이 되어 머물던 정업원(淨業院) 옛터다. 1771년(영조47)에 영조는 이곳에 와서 ‘淨業院舊基(정업원구기)’라는 비석과 비각을 세우고 절 뒷산을 동망봉(東望峰)이라는 친필 표석을 세웠다고 한다.
<청룡사 우화루>
영조는 ‘정업원구기’ 비각에 ‘전봉후암어천만년(前峯後巖於千萬年, 앞산과 뒤 바위가 어찌 천만년을 가오리)’이라고 우에서 좌로 가로로 쓰여 있고, 좌측에 작은 세로글씨 두 줄로 ‘세신묘구월육일음체서(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 신묘년 9월 6일에 눈물을 머금고 쓰다)’ 새긴 현판이 걸려있다. 300년 이상의 세월이 훌쩍 지났지만 단종과 정순왕후의 애틋한 사연은 영조로 하여금 눈물을 머금게 하고도 남았으리라.
<영조어필(전봉후암어천만년)>
청룡사 동쪽에 솟은 동망봉(東望峰)은 성북구 보문동6가와 종로구 숭인동에 걸쳐 있는 산봉우리다. 600여 년 전 정순왕후가 영월 땅을 바라보며 매일 조석으로 단종의 명복을 빌며 내 쉰 한숨보다 더 답답한 곳이 동망봉 올라가는 숭인동 좁은 골목이다. 지금은 주민들의 체육공원으로 조성되었지만, 1771년(영조47)에 정업원구기비를 세우고, 이 봉우리 바위에 ‘東望峰(동망봉)’ 석자를 친필로 새겼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건물석재로 채석을 하면서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동망봉 올라가는 숭인동 골목>
<동망봉 정상>
그 밖에도 후대에 동망봉을 기리기 위해 동망정(東望亭)이란 팔각정을 지었고, 정순왕후가 궁에서 나와 흥인문 밖에서 궁핍한 생활을 할 때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부녀자만 드나들 수 있는 채소시장을 만들어 도왔다. 조선시대에는 남자들만 시장에 다니던 때라 이 시장을 ‘여인시장’이라 불렀으며, 일제강점기 때까지 청계천 영도교(永渡橋) 부근에서 열렸다고 한다.
<동망정>
사릉역에서 약 2.5㎞쯤 거리에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사적 제209호(1970년 5월 26일)로 지정된 사릉(思陵)은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으며 전체적으로 능 규모가 소박한 편이다. 이는 사릉이 해주정씨(海州鄭氏) 가문의 선산에 조성됐으며 조성될 당시에는 대군(大君) 부인의 예로 장사지내졌기 때문이다. 봉분은 하나의 곡장 안에 한 기를 모신 단릉(單陵) 양식으로 조성되었다.
<사릉 종합안내도>
정순왕후는 남편인 단종과의 사이에 후사 없이 사별하면서 단종의 누님인 경혜공주의 아들이자 시조카인 정미수(鄭眉壽, 1456∼1512)를 수양아들로 두었고 이러한 이유로 사후 해주정씨 선산인 지금의 사릉에 묻혔다. 때문에 사릉 주변으로는 지금도 해주정씨 가문의 개인 묘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사릉 홍살문과 정자각>
한편 조선 중종 대에 당시에는 노산군인 단종의 묘지와 봉분을 정비하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면서 1521년 사망한 정순왕후는 대군 부인의 예로 장례가 치러졌다. 이후 숙종 24년(1698년)에 단종이 복위 및 추존되면서 정순왕후도 복권되었고 그녀의 무덤 또한 왕릉으로 승격되었으며, 평생 남편을 생각하고 그리워했다 하여 ‘생각할 사(思)’자가 들어간 능호를 정했다.
<사릉>
그러나 나만의 생각일까? 그래서 그런지 사릉의 소나무들은 하나 같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15세에 혼인하여 18세에 사별하고 피눈물 흘리며 80평생을 살아오신 정순왕후의 정령(精靈)이 사후라도 부부의 연이라도 이어주자는 뜻이었을까? 1999년 4월 9일 사릉의 소나무 한 그루를 영월 장릉으로 옮겨 심고 정령송(精靈松)이라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사릉 소나무>
<영월장릉의 정령송>
능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재실(齋室)로 향한다. 재실은 제례에 앞서 제관들이 미리 도착하여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제례를 준비하는 곳이다. 평소에는 참봉(參奉) 등 관리가 이곳에 상주하면서 능역을 돌보았다. 재실에는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례업무를 주관하는 전사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등이 있으며 단청은 하지 않는다.
<사릉 재실>
능역 우측으로는 사릉역사문화관이 있으나 코로나19 영향으로 문을 닫았고, 주변으로는 전통수목양묘장이 조성되어 있다. 전통수목양묘장은 1972년 이곳에 직영 양묘장을 만들면서 시작되었으며, 현재는 사릉을 포함한 동구릉, 홍·유릉, 융·건릉, 파주 삼릉 등 5개의 능에 설치 운영하고 있다. 이 양묘장은 궁궐과 왕릉에 공급하는 전통수목을 기르는 곳으로 조선시대 궁중 정원의 꽃과 과일나무 등에 관한 일을 보던 <장원서(掌苑署)>를 토대로 하였고, 궁궐과 능에 있는 천연기념물 등 중요 수목은 유전자원을 보존한다.
<사릉역사문화관>
<양묘장>
사릉과 인접해 있는 조선 제15대 임금 광해군(光海君)묘(사적 제363호)와 선조의 후궁이자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김씨(恭嬪金氏)의 묘인 성묘(成墓, 사적 제365호), 효종의 후궁 안빈이씨(安嬪李氏)의 묘인 안빈묘(사적 제366호)는 비공개지역으로 미리 신청예약을 하지 못하여 들르지 못하고 금곡에 있는 홍·유릉으로 발길을 돌린다.
<광해군묘 이정표>
홍·유릉은 대한제국 고종과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洪陵), 순종과 두 황후의 무덤 유릉(裕陵)을 합쳐서 부르는 명칭이다. 이 외에도 엄밀히 홍유릉에 포함된 곳은 아니지만 바로 곁에 영친왕(英親王)과 이방자(李方子)의 묘로 조선 왕릉의 격식으로 조성한 영원(英園), 그리고 황세손 이구(李玖)의 묘인 회인원(懷仁園)을 포함한 2기의 원(園) 및 의친왕·의친왕비가 합장된 의친왕 묘와 덕혜옹주 묘를 포함한 왕자녀의 묘 2기가 있다.
<홍릉 침전>
대한제국이 선포 후 2대를 끝으로 멸망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친 후 남북한 모두 공화정이 들어섰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마지막으로 조성된 왕릉이고, 대한제국의 유일한 황제릉(皇帝陵)이기도 하며, 조선왕릉 중 마지막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다른 왕릉에 비해서 가장 최근에 조성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조선왕릉 중에서는 최초로 조선왕조 이후의 시대(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유일한 왕릉이다.
<가깝고도 먼길-홍유릉 https://blog.naver.com/waya555/221840988334 참조>
<유릉>
그리고 그동안 출입이 제한되었던 홍·유릉 내 후궁묘역은 대한제국 황실 후궁들의 묘역이다. 이곳에 모셔진 후궁들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한국전쟁을 겪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구황실의 일원으로 생활하였다. 고종의 후궁인 광화당 귀인 이씨 묘가 1967년에 조성되었고, 고종의 후궁 삼축당 김씨 묘가 1970년에 조성되었다. 그리고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후실 수인당 김씨 묘가 조성된 이후, 고양 서삼릉(西三陵)에 있던 고종의 후궁 귀인 장씨와 의친왕의 후실 수관당 정씨의 묘가 이곳으로 2009년에 이장되었다.
<귀인 장씨 묘>
숙부에게 보위를 찬탈 당한 단종 부부의 피눈물이 배어있는 사릉,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광해군과 그의 어머니 공빈김씨의 묘인 성묘는 광해군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인조의 숭명배청(崇明排淸)정책이 불러온 병자호란으로 백성들이 혹독하게 치러야 했던 시절을 통곡한다. 그리고 조선 오백년 역사의 마지막을 처절한 몸부림으로 겪어야 했던 대한제국의 황제와 그의 가족들이 잠들어 있는 홍·유릉과 그 주변 묘역들은 지금도 눈물이 젖은 것처럼 눅눅하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홍릉 향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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