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임진강변 생태탐방로 둘러보기
(임진각∼율곡습지공원, 2021년 5월 20일)
瓦也 정유순
오늘은 <파주 임진강변 생태탐방로 둘러보는 날>. 빗방울이 간간이 허공을 맴돌며 얼굴을 스친다. 새벽잠 눈비비고 아침을 달려 경의중앙선 문산역(文山驛)에 도착, 다시 택시로 이동하여 임진각 망배단 앞에서 오늘 일정을 시작한다. 1972년에 실향민들을 위해 세워진 임진각 앞에 있는 망배단(望拜壇)은 추석이나 설 명절 등에 고향을 향해 제사를 지내는 추모제단으로 1986년에 건립되었으며 망향의 상념을 달래는 장소다. 시간이 일러 망배단 뒤편의 ‘자유의 다리’ 아래에 있는 통일연못을 먼저 둘러본다.
<통일연못과 자유의 다리>
사전에 경기관관공사에 예약하여 출입 허가를 받고 인원 점검이 끝나면 해설하시는 분의 안내를 받으며 굳게 닫혔던 철조망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철조망 입구에는 북으로 달리고 싶은 철마가 총탄에 맞은 자국을 안은 채 북을 향해 숨을 헐떡인다. 조선 때는 임진나루에서 배를 타고 북으로 갔건만 지금은 끊어진 철교 교각만 남아 분단의 비극을 보여주고 있어 망배단의 상석은 더 쓸쓸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 노래비에서는 애절한 목소리가 배어 나온다.
<망향의 노래비>
우선 마음이 무겁다. 우리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한다. 엄연한 한반도인 북녘 땅이 왜 철조망으로 가로 막혀 있을까? 언제쯤 남북을 가로 막은 철조망이 걷히고 북녘 땅 평양과 신의주를 거쳐 고구려의 혼이 서린 압록강 너머 만주 땅까지 마음 놓고 갈 수 있을까? 바람도 구름도 새들도 자유로이 넘나들고, 지금은 철길이 북으로 쭉 뻗어 있는데 달리고 싶은 철마는 보이질 않고 녹 슬은 화통만 남아 있다.
<경의선 임진강철교>
<총 맞은 증기기관차>
<임진강변 생태탐방로>는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통일대교, 초평도, 임진나루를 지나 율곡습지공원까지 이어지는 9.1㎞구간으로 약 3시간정도 소요되는 구간이다. 철책이 설치되어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던 순찰로(巡察路)였던 곳을 임진강 따라 걷는 생태탐방로로 만들어 일반인에게 통행을 허락하는 시범구간으로 아직까지는 시간 및 인원제한과 절차상의 번거로움이 있다. 그러나 사람의 손이 덜 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임진강변 생태탐방로>
철조망이 열리는 순간 그 안에 갇혀 있던 찔레꽃 향기가 가슴에 안긴다. 꽃망울 터트린 아카시도 뒤질세라 짙은 향을 주체하지 못한다. 강변의 하천부지는 벼를 경작하는 논으로 변하였고, 농민들은 경작허가와 출입허가를 받아 정해진 시간 안에 출입하여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촘촘히 엮어진 철조망 안은 그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사람도 세월도 가두어 놓은 그물이다.
<임진강 철책-2018년6월16일 촬영>
임진강(臨津江)은 북한 땅인 강원도 법동군 두륜산에서 발원하여 244㎞를 흘러 한강으로 흘러드는데 약 65%가 북한에서 흐르다가 겨우 휴전선을 넘어와서도 대부분이 철책에 갇히어 그저 바라만 볼 뿐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멀다. 옛날부터 삼국 시대에는 국경 분쟁이 잦았던 지역이었고 한국전쟁 이전까지 배가 다녔던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량포는 한양(서울)과 개성의 물자가 교류 되는 임진강의 최대 교역항으로, 당시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황해도 등 인근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 특산물의 집산지였다.
<임진강>
그렇게 화려했던 임진강은 처음에는 더덜나루(다달나루)라고 부르다가 한자로 표기하면서 ‘더덜’ 또는 ‘다닫다’라는 뜻의 ‘임(臨)’자와 ‘나루’라는 뜻의 ‘진(津)’자를 써서 임진강(臨津江)으로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군사분계선으로 사람의 접근이 통제되어 섬진강과 함께 바다와 소통이 되는 하천으로 토종 민물어종이 풍부하고, 민물참게와 황복(黃鰒) 등 귀한 어류자원의 보고로 비교적 자연생태계가 양호하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된다.
<임진강>
철조망 안으로 약1㎞쯤 걸었을까? 제1호 국도(목포∼신의주) 통일대교(統一大橋)가 임진강을 가로 지른다. 길이 900m의 이 다리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에서 군내면을 잇는 다리로 기존 판문점의 자유의 다리를 대체하기 위해 개통했다. 1993년 자유로(自由路)에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까지 도로 신설 및 확장 공사가 추진되면서 건설되어 1998년 6월 15일에 준공 했다.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명예회장은 준공 다음날인 6월 16일에 이 다리를 이용해 소 떼 500마리를 트럭 50대에 나눠 싣고 방북 했다. 그러나 이곳은 민간인출입통제구역으로 사전 허가가 필요하다.
<통일대교 원경>
통일대교를 지나면 철조망은 민통선 북한 쪽으로만 둘러쳐져 있고 남한 쪽은 비교적 자유롭다. 소 떼를 싣고 달리던 트럭 소리가 우리의 발길을 따라오는 것 같다. 계절의 여왕답게 꽃 향기 머금은 5월의 꽃들은 벌 나비 유혹에 여념이 없다. 얼마를 걸었을까? 철조망 안으로 초목이 우거진 섬이 나타난다. 임진강 여울에 밀려온 토사가 켜켜이 쌓여 이루어진 초평도(草坪島)다.
<초평도 위치도>
<초평도>
초평도(草坪島)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장산리의 북부에 위치한 임진강의 하중도(河中島)다. 섬의 면적은 약1.77㎢로 여의도 면적(2.9㎢)의 약2/3에 해당한다. 섬 전체가 민통선 북쪽에 위치해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멸종위기 동물이 서식하는 등 자연의 보고로 남아 있다. 특히 겨울철에는 천연기념물 두루미(202호), 재두루미(203호)를 비롯해 고니·가마우지·부엉이·올빼미·원앙·해오라기 등의 새들의 천국이고 멧돼지도 자주 볼 수 있다.
<재두루미>
<원앙>
원래 대부분 논이었던 이 섬은 한국 전쟁 후 사람이 살지 않게 되면서 습지 생태계의 보고가 되었는데, 환경부가 2012년 초에 임진강하구 습지보호구역을 지정하면서 정작 그 핵심 지역인 초평도는 제외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리고 군 사격장으로 사용되어 왔는데 유탄으로 2009년 2월에는 큰 화재가 발생하여 섬 전체의 약 30%인 50만m²에서 초목이 불에 탔다.
<독수리>
<청둥오리>
철조망을 따라 비교적 평탄하던 생태탐방로가 계단을 오르내리는 경사지가 나온다. 임진강으로 향한 면은 촘촘한 철조망이 가로 막고 사진 촬영이 통제되어 있어 같은 사물이라도 눈에 보이는 것들은 세상에서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하게만 보인다. 모처럼 세상 구경 나왔다가 나를 발견한 새끼 뱀은 나보다 더 놀라 잽싸게 풀 섶으로 숨어 버린다. 조용하던 곳에 갑자기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에 더 놀라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생태탐방로 포토라인-초평도>
철조망을 따라가는 길이기에 화석정은 들르지 못했지만 화석정 아래에는 임진나루가 있다. 임진나루는 장단나루(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와 함께 고대부터 한반도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특히 조선이 한양을 수도로 정하면서 임진나루는 한양 북방의 군사적 요새로 주목되었다. 주변 강안이 모두 수직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사이로 좁은 외길만 남쪽으로 연결되어 천혜의 요새를 이루기 때문이다.
<임진나루>
조선 태종은 임진나루를 지나면서 조선 최초의 거북선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한양을 나서 피난길에 올랐던 선조 일행이 한밤 중 빗속에서 화석정을 태운 불빛으로 임진나루를 건넜던 사실도 유명하다. 하지만 조선시대 임진나루에 본격적인 방어시설이 설치된 것은 영조(1755년) 때 임진나루에 <임진진>이라는 군진을 설치하였고, 그 주둔지로 나루 안쪽 협곡을 가로지르는 성벽(차단성)을 쌓았을 때부터다.
<철책 안의 임진나루>
임진나루는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명승지였다. 조선시대 시인, 관료, 중국 사신 등이 이곳을 지나며 그 경치에 감탄해 남긴 시문도 다수가 전해오고 있다. 임진나루는 일제강점기를 지나 1950년 무렵까지도 비교적 원 모습을 유지하였으나, 1953년 경 한국전쟁 때 임진나루는 폐허가 된 채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는 군사지역이 되었다. 그리고 단 한 장의 사진 자료도 없이, 인근 마을 주민들의 기억 속에 그 모습이 희미하게 전해져 왔다.
<임진각 소녀의 상>
임진나루를 지나면 오늘의 도착지인 율곡습지공원이 나온다. 율곡습지공원은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의 버려져 있던 습지(濕地)를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생태공원(生態公園)으로 만든 곳으로, 봄이면 유채꽃이 화사하고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하늘하늘 거린다. 또한 율곡습지공원은 평화누리길 8코스의 종점이며 9코스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율곡(栗谷)’은 이이(李珥, 1536∼1584)의 아버지 고향이며 성장한 곳으로 아호(雅號)가 되기도 하였다.
<율곡 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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