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여주 여강길(10코스 천년도자길)

와야 정유순 2021. 5. 19. 08:23

여주 여강길(10코스 천년도자길)

(2021 5 15, 천남공원여주시종합관광안내소)

瓦也 정유순

  천남공원 입구에서 10코스 천년도자길 걷기 시작 스템프를 확인하고 출발한다. 천남공원은 가족 단위 피크닉 및 여가 공간으로 산책로, 물억새군락지, 야생초화원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공도교와 연결 되는 세종광장에는 야외무대와 잔디 광장, 자연형어도(魚道) 및 관찰대 등이 조성 되어 있다. 세종동산 정상 세종루(世宗樓)에서 내려다보는 남한강의 정취는 일품이다

<여강길 10코스 지도>

 

  이미 논에는 모내기가 끝났고, 천남리마을은 궂은 날씨에 인적이 끊긴 것 같이 너무 조용하다. 천남2리 마을을 지나 얕은 고개를 넘어 싸리산으로 들어선다. 싸리산(192)은 여주시 오학동 현암리와 대신면 천남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마당바위에서 쌀이 나왔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그런데 어느 욕심쟁이가 쌀 나오는 바위 구멍을 정으로 넓히자 쌀 대신 백토가 나와 도자기를 구울 수 있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천남리마을>

 

<싸리산 입구>

 

  이러한 연유인지는 몰라도 싸리산 인근인 오금동(五今洞) 등은 예부터 자기(瓷器)의 원료가 되는 고령토의 많은 생산으로 도예촌(陶藝村)이 형성되어 도자기산업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산에 고령토를 채취하는 굴이 많았는데 하도 많이 파내어 서로 맞뚫릴 정도가 되어 관산(串山)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고 한다. 아마 여주 여강길 10코스의 이름 <천년도자길>도 여기에서 따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싸리산 팔각정>

 

<싸리산에서 본 여강>

 

  싸리산 팔각정이 있는 삼거리에서 정상으로 가지 않고 싸리산 주차장 쪽으로 내려온다. 팔각정에 오르면 여강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병풍처럼 펼쳐질 것 같은데, 막상 올라가보니 큰 나무들이 약간 시야를 가리고 흐린 날씨가 경관을 방해한다. 주민들이 올라와 몸을 푸는 운동기구들도 궂은 날씨 덕분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 같다

<싸리산 주민 운동기구>

 

  싸리산 주차장을 지나 양평과 여주를 연결하는 제37호 국도인 현암교차로 연결되는 달팽이언덕을 넘으면 달팽이공원이다. 달팽이공원은 2012 4대강 사업과정에서 생겨난 공원으로, 공중에서 보면 마치 달팽이를 닮은 공원이다. 조선 시대 팔대장림(八大長林)의 시작점이기도 한 이곳은 잔디와 정자각, 벤치로 구성되어 시민들을 위한 휴식공간이다. 최근에는 그라운드 골프장을 건설하여 많은 시민들이 남한강을 조망하며 여가를 보내기도 한다

<달팽이언덕>

 

<그라운드 골프장>

 

  달팽이공원 옆에는 여주시 수상센터가 있다. 수상센터에서는 일반조종면허시험과 더불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심폐소생술과 생존수영 및 구명뗏목 승선법 등 응급상황에서의 대처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상안전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일반 조종면허는 모터보트, 수상오토바이 등 5마력 이상의 엔진이 장착된 수상레저기구를 운용하기 위해 반드시 취득해야하는 면허증으로 희망하는 조종면허(일반1·2)의 필기와 실기시험에 합격한 뒤 수상안전교육까지 이수하면 최종 발급받게 된다

<여주시 수상센터>

 

  달팽이공원과 수상센터가 있는 현암동을 지나면 여주시 오학동이다. 현암동(峴岩洞)은 본래 여주군 북면 옹암동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옹암동, 현저동, 학동일부를 병합하여 현저와 옹암의 이름을 따서 현암리라 하였다가 여주읍으로 편입되어 시로 승격되면서 현암동이 되었으며, 오학동(五鶴洞)은 옛날에 5마리의 백학이 이 마을에 와서 쉬었다 하여 오학리라 불리었다고 한다

<싸리산주차장 입구>

 

  오학동은 여주도예촌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여주도자기를 유명하게 만든 주요 생산 공장들이 모인 곳이었다. 유명한 커피 회사에 납품하는 커피머그잔을 생산하던 서울도자기, 일제 강점기 시절에 적벽돌로 굴뚝을 쌓아 올려 현재에 이르고 있는 극동애자, 지금은 전혀 쓰임새가 없는 요강공장으로 유명한 한양요업 등은 한 시절 도자기 대표적 생산 공장이었다. 이곳들은 지금도 많은 도예가들의 작업장과 도예 전시 시설이 들어서 있다

<오학동 행정복지센터>

 

  오학동행정복지센터 앞을 조금 지나면 강변 길 옆에 <목은 이색선생추모비(牧隱李穡先生追慕碑)> 자리를 지킨다.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은 정몽주 정도전 권근 등의 스승으로 조선에 성리학이 기틀을 잡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신륵사에 대장경과 대장경각을 지어 봉안했고, 왕명으로 나옹선사의 비문을 지어 세우기도 하였다

<해동대현목은이색선생추모비>

 

  1377년에는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나 조선이 들어서면서 이성계의 부름을 끝내 거절하다가 1396 5 7일 여주 신륵사(神勒寺) 부근 연자탄(燕子灘, 제비여울)에서 배를 타고 유람하던 중 갑자기 별세했다. 그 죽음이 출사하라는 태조의 부탁을 거절하고 낙향하던 도중에 일어났다는 정황에서 타살의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태조는 매우 슬퍼하며 사흘 동안 조회를 중지하고 문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한다

<목은 이색 영정-네이버캡쳐>

 

  여주대교 쪽으로 더 내려오면 자투리 공간을 이용하여 <한글마당>공원을 만들었다. 이 공원은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교목(喬木), 관목(灌木), 초화류(草花類) 등을 식재하여 시민들이 편히 사색을 즐기며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설명문 중에는 벤치라는 국적불명의 외래어를 사용하여 <한글마당>이 무색하게 되었다

<한글마당>

 

<한글마당 설명문>

 

  강변길을 따라 여주대교 밑을 통과하면 <여주도서관>이 나온다. 건축대상을 받은 여주도서관은 지하 1층과 지상 3층 규모로 소장 도서는 총 4만여 권이며, 비도서 자료는 전자책과 CD-ROM, DVD 등이 비치되어있다. 디지털자료실에서는 인터넷 검색, 어학실습, 영화감상, 위성방송 시청 등 각종 디지털 자료를 이용할 수 있다. 이 외에도 공연과 전시, 문화강좌, 각종 경연 및 대회, 청소년 프로그램, 영화상영 등 프로그램이 다양하다

<여주도서관>

 

  도서관 근처에 있는 여주박물관은 1994 1월 건립을 추진하여 1996 12월에 건축 공사를 완료하고 1997 5 9일 개관식을 가졌다. 여주시의 역사자료와 문화예술, 민속유물 등을 전시하고 향토사를 조사·연구 하는 여주시의 공립박물관이다. 소장 자료 수집·보관·고증평가·복제·전시, 유물 기증·기탁 및 구입, 향토유적의 조사 및 향토사의 연구, 특별전시회 개최, <여주시사> 편찬 업무를 담당한다. 여주박물관 건물은 건축대상을 받았다

<여주박물관>

 

  박물관 마당으로 들어서면 류주현문학비와 백운거사이규보선생문학비(白雲居士李奎報先生文學碑) 그리고 목은 이색의 시비가 나란히 서있다. 여주출신인 류주현(柳周鉉, 1921~1982)은 역사를 사실주의적으로 분석한 역사소설을 많이 남긴 소설가다. <조선총독부>, <대원군> 등의 작품으로 종래의 흥미 위주의 역사물(歷史物)에서 벗어나 인간과 역사관에 깊이를 더한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류주현문학비>

 

  여주이씨(驪州李氏)인 백운거사 이규보(1168~1241) 23세 때 진사에 급제했으나 출세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26세 때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당시 문란한 정치와 혼란한 사회를 보고 크게 각성하여 영웅 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집필하였다. 그 후 최충헌(崔忠獻, 1149~1219)의 눈에 띄어 32세에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호탕한 시풍은 당대를 풍미했으며, 특히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그 감상을 읊은 즉흥시는 유명하다. 또한 몽골군의 침입을 진정표(陳情表)로써 격퇴한 명 문장가였다

<백운거사이규보선생문학비>

 

  박물관 밖에는 여주시종합관광안내소가 있는 신륵사국민관광지다. 깨끗한 물과 질 좋은 고령토로 도자기를 생산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 현재 600여 개의 도요에서 국내 전통 및 생활 도자기의 60% 이상을 생산하고 있다. <여주도자기축제>는 전통도자기의 예술적 가치를 계승 발전시키고, 도자기 문화의 대중화와 우리 도자기의 세계화를 선도하고자 매년 4월 또는 5월에 신륵사국민관광지와 도예촌 일원에서 약 2주 동안 열린다고 한다

<여주시종합관광안내소>

 

* 10코스 길이 : 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