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길 - 길상사(吉祥寺)
(2021년 4월 21일)
瓦也 정유순
서울 성북동 소재 길상사! 도심 안에 청정한 공간으로 자리 잡은 사찰이 하나 있다.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고급요정으로 꼽혔던 대원각(大苑閣)의 주인 김영한(법명 길상화)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 철학에 감화를 받아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시주하면서 아름다운 사찰로 거듭나게 되었다. 1995년 6월 13일 대한불교 조계종 ‘대법사’로 등록하였으며 1997년에 길상사로 사찰명을 바꾸어 창건하였다. 사찰 내의 일부 건물은 개·보수하였으나 대부분의 건물은 대원각 시절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길상사 일주문>
경내에는 극락전, 범종각, 일주문, 적묵당, 지장전, 설법전, 종무소, 관세음보살석상, 길상화불자공덕비 등이 배치되어 있다. 사찰의 본전인 극락전에는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시민운동을 하는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으로 해마다 5월이면 봉축법회와 함께 장애인, 결식아동, 해외아동, 탈북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자선음악회를 개최한다. 승려이자 수필작가인 법정이 1997년 12월부터 2003년 12월까지 회주(會主: 법회를 주관하는 법사)로 주석하였다.
<길상사 극락전>
그럼 길상사를 시주한 김영한은 과연 누구인가? 김영한(1916∼1999)은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그녀의 집안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알거지가 되고, 가난한 탓에 15살의 나이에 병약한 신랑한테 시집갔으나,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사이에 남편이 우물에 빠져 죽는 불운을 맞는다.
<극락전 아미타불과 협시불>
남편을 잃고 16살의 나이에 집을 나온 그녀는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진향(眞香)이라는 기명(妓名)으로 기생이 된다. 17세 때는 조선권번 정악(正樂)전습소 학감을 지낸 하규일(河圭一)의 넷째 양녀로 들어가 3년간 가무를 배웠다. 춤에도 소질이 두드러져 <무산향>, <검무>를 잘했으며, 특히 <춘앵무>는 그녀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또한『삼천리』지에 수필을 발표하여 글과 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난 <문학 기생>으로도 명성을 날린다.
<길상사 관세음보살상>
1935년에는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해관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갔으나, 해관(海觀)이 투옥되자 서둘러 귀국하지만 면회가 안 된다는 말을 듣고 함흥 땅에 주저앉아 은인을 만나기 위해 절박한 마음으로 권번에 들어가 다시 기생이 된다. 혹시 함흥 법조계의 유력한 인사들을 만나서 사귀면 해관의 특별면회를 할 수 있으리라는 마음에서다. 그러나 민족주의자나 사상범은 전혀 면허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길상사 7층보탑>
1936년 함흥 권번 소속으로 함흥에서 가장 큰 요릿집인 함흥관에서 진향은 함흥영생여고보 영어교사였던 백석(1912∼1996)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된다. 같은 학교의 교사가 이임하는 송별연이었는데, 백석은 이 자리에서 진향에게 반해 자기 옆으로 와서 앉게 하였다. 백석은 술을 몇 잔 나눈 뒤 용기를 내어 손목을 잡고는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길상사 반가사유상>
이렇게 21세의 김영한과 25세의 백석은 청춘 남녀 사이에 한 번 댕겨진 사랑의 불길은 활활 타올랐다. 두 사람은 1936년 늦가을, 각자 서로 멀지 않은 곳에 하숙을 정한 뒤 진향의 하숙집을 오가며 달콤한 사랑을 나누기도 했으나, 함흥에서는 그가 교사의 신분으로 남의 이목도 있어 백석이 김영한의 하숙으로 와서 함께 지내다 돌아갔다고 한다.
<길상사 진영각>
하루는 자야가 함흥시내 서점에서 이백의 시 당시(唐詩) 선집 ‘자야오가(子夜吳歌)’가 눈길을 끌어 사 가지고 와서 백석에게 보였다. 이 시집을 반갑게 보던 백석이 말했다. “나 당신에게 아호를 하나 지어주겠소. 이제부터 ‘자야(子夜)’라고 합시다.” 자야오가는 본래 진대(晉代)에 오(吳)나라 땅에 살던 자야(子夜)라는 여인이 변경에 국경을 지키러 간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며 만들었다는 애절한 노래인 ‘자야가(子夜歌)’에서 유래한 노래다.
<길상선원>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다. 오산고보를 졸업한 후 도쿄로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하고 1930년 조선일보에 시를 투고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잘생긴 얼굴과 온화한 성품, 게다가 청산유수의 말솜씨로 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멋쟁이였다. 그러나 백석(白石)은 많은 여인들 중 자야(子夜)만을 사랑하였으며 백석의 아름다운 시(詩)는 시인과 기생의 정염(情炎)을 넘어서 깊고 넓은 그리고 애틋한 사랑의 실체를 느끼게 한다.
<길상선원 백목단>
자야가 서울로 돌아가자 백석은 아예 그녀 때문에 학교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와서 조선일보에 근무한다. 그리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리고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3년 간의 동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 마땅하게 생각했고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켰으나 신혼 첫날밤부터 도망치기를 여러 차례, 부모에 대한 효심과 연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 갈등 하다가 이를 벗어나기 위해 만주로 도피하자고 제의한다.
<길상사 '지도무난' 법어>
그러나 그녀는 백석의 장래를 걱정하여 함흥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백석은 혼자 떠난다. 자야는 고민 끝에 그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예 서울로 떠나 버렸다. 백석은 곧 서울로 자야를 찾아와 하룻밤을 지낸 뒤 편지 봉투 하나를 남기고 떠났다. 그 편지 봉투에는 백석이 친필로 쓴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들어있었다.
<앵초꽃>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 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공덕주 길상화 보살과 백석 시비>
해방이 되자 백석은 만주에서 함흥으로 돌아왔지만 김영한은 이미 서울로 떠나버렸고,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되어 그들의 사랑도 이승에서 잇지 못하게 된다. 분단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서글픈 사랑이다. 그 후 백석이 북한 체제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90년대 중반까지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재북(在北) 작가인 탓에 그의 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불교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길상사 지장전>
해방 직후 그는 조만식(曺晩植)의 비서를 지내며 솔로호프의 『조용한 돈강』 등을 번역하고 김일성과도 가끔 만났다고 전해진다. 한동안 김일성 대학에서 강의까지 하던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중국의 한인촌에 머물다가 휴전 후에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숙청을 당해서 고향 가까운 협동농장에서 시달려 오다가 1996년에 숨을 거두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백석-네이버캡쳐>
이후 김영한은 1953년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만학으로 졸업하고, 한국전쟁 직후 서울 성북동 산골짜기에‘대원각’이라는 요정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영영 만날 수 없는 사랑,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함일까. 그녀는 오로지 재산 모으는데 전념을 하게 된다. 그러나 돈을 모을수록 허전함은 더하고 모진 세월마저 백석에 대한 사랑은 활화산처럼 더 타오른다. 생전에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은 일체의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기생 ‘진향’시절의 김영한(길상화)-법보신문>
김영한은 1987년, 법정스님의 저서 무소유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법정스님을 찾아가 대원각을 비롯한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며 “많은 사람들을 위해 절을 짓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시주 규모는 건물 40여 채와 대지 23,140㎡로, 당시 시가 1,000억 원이 넘었다. 처음에 법정스님은 그 청을 사양하였다. 그러나 김영한은 근 10년 가까이 법정스님을 찾아와 간곡히 부탁했다.
<법정스님-네이버캡쳐>
결국 법정스님이 시주를 받아들이고, 지금의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재등록하였다. 법정스님은 길상사(吉祥寺)의 창건 법회에서, 불문에 귀의한 김영한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지어 주었으며, 당시 김영한은 수천 대중 앞에서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법정스님 유골 모신 곳>
길상사 건립 당시 ‘1,000억에 달하는 돈도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말했다. ‘언제 백석이 가장 생각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따로 때가 어디 있나.’라는 말을 해 사람의 마음을 울렸다. 김영한은 자기 수중에 있던 현금 2억 원을 <창작과 비평사>에 기증하여 1997년 10월 20일 <백석문학상>이 제정하였고, 상금은 1,000만원이며, 매년 8월을 기준으로 2년 내에 출간된 뛰어난 시집에 시상한다. 젊은 시절 백석의 연인으로 《내 사랑 백석》이라는 자서전을 펴내기도 하였다.
<길상화 공덕비와 사당>
김영한은 1999년 11월“나의 유해를 눈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화장을 하여 길상사 경내에 산골(散骨)하였으며 따로 묘지는 없다. 길상사 경내의 길상헌 뒤쪽 작은 언덕에는 김영한의 사당과 함께, 그의 공덕비와 백석의 시비가 세워졌으며, 길상화(김영한)의 영정을 모셔져 있다. 길상사 경내를 돌아보고 나오는데, 청마 유치환의 <행복>이라는 시 첫 구절이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리라”
<길상화(김연한) 영정>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주 여강길(8코스 파사성길) (0) | 2021.05.04 |
---|---|
여주 여강길(7코스 부처울습지길) (0) | 2021.05.03 |
여주 여강길(2코스 세물머리길) (0) | 2021.04.20 |
충남 서산의 개심사와 문수사의 겹벚꽃 (0) | 2021.04.16 |
경상남도 진해(鎭海)의 잊고 싶은 과거 (0) | 2021.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