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여주 여강길(1코스 옛나루터길)

와야 정유순 2021. 2. 16. 11:32

여주 여강길(1코스 옛나루터길)

(2021년 2월 13일, 여주역∼도리마을)

瓦也 정유순

   입춘(立春)이 지난 지 열흘. 남에서 다리 건너온다는 봄소식이라도 들을까 봐 두 귀 쫑긋 세우고 여주 여강길로 이른 봄 마중길에 나선다. 새벽길 나선 발걸음은 전철 신분당선 판교역에서 경강선으로 갈아타고 여주역으로 마음부터 달려간다. 지금의 여주역(驪州驛)은 경기도 여주시 교동에 있는 수도권 전철 경강선의 전철역이다. 원래 여주역은 1931년 수원∼여주 간 협괘(狹軌) 철로가 개통되면서 기차역이 있었으나 1972년 수려선(水驪線)이 폐지되면서 역사(驛舍) 자리에는 여주시민회관 건물이 들어섰다.

<여주역>

   여주시는 경기도 남동단(南東端)에 위치한 곳으로 2013년 9월 23일 군에서 여주시로 승격되었다. 동쪽은 강원도 원주시와 충청북도 충주시, 남서쪽은 이천시, 서쪽은 광주시, 북쪽은 양평군과 접한다. 남한강(南漢江) 및 그 지류 유역을 제외하면 해발고도 300∼400m의 낮은 구릉(丘陵)으로 되어 있어 전체 면적 중 임야가 약 48%를 차지한다. 시를 관류하는 여강은 수운(水運)에 유리하여 수운을 이용한 미곡집산지로 발달하였다. 여강(驪江)은 여주시를 관통하는 남한강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여주시내-영월루>
<여주 여강길 1코스 지도>

   여주역에서 약 1㎞ 남짓 거리에 있는 버스종합터미널 사거리 주변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아침 햇살을 머금는다. 여주 땅은 세종대왕의 영릉(英陵)이 있어 덕을 톡톡히 본다. 정리가 한창인 거리 곳곳에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 <어제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시내 곳곳에서 펄럭인다. 동상 앞에서 가볍게 눈인사만 나누고 발걸음은 1.6㎞ 떨어진 영월루 앞에 이미 서 있다.

<세종대왕상>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7호로 지정된 영월루(迎月樓)는 원래 군청의 정문으로 일제강점기인 1925년 군청을 옮기면서 지금의 자리에 누각으로 다시 세운 것이다. 팔작지붕으로 낮은 기단과 기다란 몸체가 치켜 올라간 지붕이 누각 바로 아래에 있는 마암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달빛 쏟아지는 보름달이면 이 누각에 앉아 음풍농월(吟風弄月)하고 싶은 마음이다. 영월루 입구에는 비석거리가 있고, 누마루에서 바라보이는 한강의 풍경은 일품이다.

<영월루>

   마암(馬巖)은 영월루 아래 있는 큰 바위다. 이 바위 밑 암혈(巖穴)에서 여흥민씨 시조가 탄생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 바위에서 황마(黃馬)와 여마(驪馬)가 나왔다고도 전해지는데 여주의 옛 지명인 황려(黃驪)는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절벽에 <馬巖(마암)>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조선 말엽에 여주목사를 지낸 이인응(李寅應)이 썼다고 한다. 주변에는 영세불망비 등 공덕비군이 있으며, 한국전쟁 기념비와 충혼탑(忠魂塔)이 있어 숙연하게 한다.

<여주마암 전경>
<여주 충혼탑>

   영월루를 지나 본격적으로 여강 둑으로 접어든다. 흰수염이 하늘에서 내려와 쭉 뻗은 모양의 물안개가 걷힌 여강은 고요한 호수 같다. 강 건너 신륵사도 새벽 염불이 끝난 양 적막감이 실바람 타고 안겨 온다. 전시용으로 띄워 놓은 황포돗대도 황포(黃布)는 보이지 않고 벌거벗은 기둥만 솟대마냥 하늘로 솟는다. 작은 개울을 건너 도착한 곳은 여주시 연양동에 있는 금은모래가족공원이다.

<여주 신륵사 원경>
<여강의 아침>

   이곳에 가족공원을 조성하기 전에 미리 문화재청의 허가(2005년)를 받아 2007년 8월부터 2008년 6월까지 44,260㎡에 대하여 유물발굴조사를 한 결과 삼국시대 주거지 28기, 수혈유구(竪穴遺構) 30기, 신라 후기 주거지 3기, 고상유구(高床遺構) 2기, 석열유구(石列遺構) 3기, 주혈군(柱穴群) 2기 등 총 68기가 조사되었으며, 유물은 단경호(短頸壺)를 비롯한 180점이 출토되었다.

<고인돌>
<움집>

   가족공원에는 가족 단위로 다양한 레저활동을 할 수 있도록 야영 시설을 갖춘 캠핑장이 있으며, 고조선 시대의 유물인 고인돌 유적과 움집, 고구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축성했다는 안학궁의 축소된 모형, 조선 숙종 때 창덕궁에 만들었다는 애련정, 신라 말엽 경애왕의 비극이 담긴 유상곡수(流觴曲水)의 포석정, 고려의 마지막 충신 포은 정몽주가 이방원(후에 조선 태종)에게 죽임을 당한 선죽교(善竹橋)의 조형물들이 볼거리를 제공한다.

<금은모래공원 캠핑장>
<고구려 안학궁 축소모형>
<애련정>
<포석정>

   발걸음은 여강 상류로 향한다. 여주시 연양동과 강천면 이호리를 잇는 42호 국도의 이호대교를 지나면 강천보가 자리한다. 강천보는 한강의 명물이던황포 돛배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데 강천섬 수변공원과 함께 천혜의 풍광을 자랑한다. 이곳에 설치된 보는 여주시 강천면과 단현동을 연결하고, 여주시 일대 농업용수와 상수도를 확보하기 위한 보(洑)이며, 2011년 10월 일반에 공개되었다. 보의 길이는 440m, 높이는 8m로 7개의 수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보의 좌안에는 소수력발전소가 설치되어 있다.

<강천보>

   이곳에는 한강통합운영센터가 있어 남한강의 강천보·여주보·이포보를 관리한다. 강천보의 좌측 광장에는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한강문화관이 있어 한강의 수로와 문화를 소개하고 있으며, 39m 높이의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특히 <물빛 누리>로 이름 지어진 보의 야간조명은 시간대별, 계절별로 각기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고 한다. 또한, 강천보는 남한강 관광의 새로운 중심지로 인근에 신륵사관광지, 금은모래강변공원, 황포돛배나루터 등 볼거리가 있다.

<한강문화관>

   강천보를 조금 지나면 여강 변에 한국전쟁의 상처가 서린 고(故) 미군 소장 브라이언트 애드워드 무어 장군 전적비 하나가 나온다. 1894년 6월 미국 메인주에서 태어난 무어 장군은 1917년 미 육사를 졸업하고, 1949년부터 미 육군사관학교장으로 재직 중 1951년 1월 30일 주한 미 9단장으로 보임되어 1951년 2월 24일 여주시 단현동인 이곳에서 남한강 도하작전을 공중에서 지휘하다 헬기 추락으로 전사했다.

<브라이언트 애드워드 무어 장군 전적비>

   단현동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여주군 근동면의 단강리와 오현리를 합하여 단현리가 되었다. 단현리라는 이름은 마을 근처 강변의 바위들이 붉은색을 띄고 있어 ‘붉은 바위’, ‘붉바위’, ‘부라우’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이후 여주군 여주읍에 속하였다가 2013년 9월 여주군이 시(市)로 승격하면서 여주읍에 속하였던 단현리는 여흥동 관할의 법정동으로 개편되었다.

<42호 국도 이호대교-단현동>

   단현동 강변에 있었던 <부라우나루터>는 이곳에서 강 건너 강천면 가야리를 연결하던 나루터다. 주로 강천면 주민들이 여주장을 이용하기 위해 나루를 이용했지만, 가끔 소금 배가 정박하기도 했다. 명성황후 생가가 있는 능현리는 여흥민씨의 집성촌이었고, 고갯마루에는 당시 세도가인 민참판댁 외가가 있었다고 한다. 나루터는 1975년에 패쇄되었지만 풍경은 일품이다.

<부라우나루터>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발걸음이 당도한 곳은 <우만리나루터>다. 이곳은 여주시 우만동(又晩洞)과 강천면 가야리를 잇는 나루터로 땔감을 구하러 강천으로 가는 사람들과 원주의 주민들이 여주장과 장호원장을 가기 위해 이용했는데, 1972년 홍수로 나루터는 사라졌다. 나루터 옆 강 위로는 영동고속도로가 쌩쌩 달린다. 나루터 입구에는 수령(樹齡) 300년이 넘은 커다란 느티나무가 여주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옛터를 지키고 있다.

<우만리나루터 느티나무>
<우만리나루터 느티나무>
<여강(남한강)-우만리>

   우만동은 여주시에 있는 법정동으로 2013년 9월 23일 여주군이 시(市)로 승격하면서 우만리(又晩里)에서 우만동으로 개칭되었다. 영동고속도로는 1971년 12월 신갈에서 원주까지 2차선으로 개통되었다가 새말∼강릉 간 97㎞ 구간은 1975년 10월에 준공되었다. 기존 왕복 2차선에서 왕복 4차선으로의 확장공사는 신갈∼원주 구간의 경우 1994년 12월에 완공되었고, 원주∼새말 구간은 1997년에 완공되었다. 신갈∼강릉 간 확장공사 중 마지막 구간인 횡계∼강릉 간 21.9㎞ 구간이 2001년 11월 개통되었다.

<영동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남한강교 밑으로 빠져나와 계단을 올라 멱곡동(覓谷洞) 산길을 지나면 점동면 흔암리(欣巖里)로 들어선다. 지명 유래는 마을 앞 중심부에 크고 흰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를 인근 멱곡리 김참판댁에서 상석으로 쓰기 위하여 채석해 비석을 세웠다는 것에 기인하여 큰 흰바위가 있어서 마을 이름이 흰바위가 되었고, 흰바위가 흔바위로 다시 흔암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흔암뜰 표지석>

   흔암리에도 강 건너 강천면 굴암리를 오가던 나루터가 있었는데 1972년 대홍수 때 물에 다 떠내려갔고 나루터 주변에 살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금은 별장주택들이 터를 잡아가면서 여강길은 마을을 굽이돌고 나루터가 있던 자리는 전부 밭으로 변해 흔적마저 깃털처럼 바람에 날아갔다.

<흔암리 마을-2019년9월>

   마을 뒷산으로 올라가면 <흔암리유적지>가 나온다. 흔암리 유적은 고조선 시대 유적으로 추측된다. 유적은 흔암리 마을의 구릉 지대에 분포하며 여강에 인접하여 있다. 발굴된 16기의 집터 중 12호 집터에서는 여러 종류의 토기 및 석기와 함께 탄화된 벼, 보리, 조, 수수 등의 곡물이 발굴되었다. 흔암리 유적의 연대는 서기전 7세기 전후로 이야기되고 있으나 그보다 시기가 올라갈 가능성이 매우 크며, 벼농사의 발원지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연대 측정결과 서기전 7세기면 고조선 후기에 해당한다.

<흔암리 선사유적지>
<흔암리 유물>

   숲길을 빠져나와 마을 가운데로 질러 다시 소무산(韶舞山)으로 들어서면 <아홉사리과거길>이다. 아홉사리과거길은‘아홉 개의 산이 마치 국수를 삶아 말아 놓은 형상’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경상도나 충청도를 떠나온 유생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기 위해서는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또 음력 9월 9일 9번째 고개에 피는 구절초를 꺾어 다려마시면 모든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 길을 넘다 넘어지면 아홉 번을 굴러야만 살아서 넘을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전해져 온다.

<아홉가리과거길>

   그리고 이 길을 이용한 선비들은 대부분 가난했다고 한다. 돈 많은 선비들은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물길을 따라 충주부터 한양의 마포나루까지 배를 타고 오갔을 것이고, 가난한 선비들은 뱃삯이라도 아껴야 했기 때문이다.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금의환향하는 선비들은 이 길이 비단길 같았으나, 낙방한 선비들은 속절없이 흘러가는 여강을 바라보며 자신의 처한 처지를 생각하면서 흘린 눈물이 스며있을 것만 같다.

<아홉사리과거길>

   오늘의 마지막 도착지는 여주시 점동면 도리 늘향골마을이다. 늘향골마을은 남한강과 청미천이 만나는 곳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마을로 명성황후 후손들이 600년 이상 모여 사는 여흥민씨(驪興閔氏) 집성촌이다. 수많은 동·식물들과 철새들이 살고 있는 자연친화청정마을로 농촌체험과 자연생태체험을 할 수 있는 마을이다. 돛단배 모양의 마을과 ‘아홉사리고개’에 핀 구절초는 늘향골마을의 상징이다. 그리고 ‘늘 고향 같은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임진왜란과 한국전쟁도 비켜 간 평화로운 마을이다.

<점동면 도리마을>
<도리 늘향골녹색체험마을>

* 여주 여강길 1구간 거리 :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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