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길-홍유릉
(2020년 2월 19일)
瓦也 정유순
1. 홍·유릉(洪裕陵)
음 1월 26일, 내가 세상에 처음 나온 날이다. 자식들은 생일이라고 지난 주말에 미리 와서 축하해주었고, 옆 지기는 행여 당일 심심할까 봐 조반 숟가락 놓자마자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으로 나들이 가자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그 앞으로 지나다녀만 봤지 언젠가는 한번 가겠지 하며 마냥 미뤄왔던 곳이라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다. 경기도 안양 집에서 경춘선 전철 금곡역까지 딱 두 시간이 소요된다. 금곡역에서 홍유릉 매표소까지는 약 1㎞ 남짓 거리다. <금곡역>
그곳은 조선의 제26대 임금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高宗) 내외를 모신 홍릉(洪陵)과 그의 아들 순종(純宗) 내외를 모신 유릉(裕陵)이 있는 곳이다. 백봉산(柏峯山, 587m) 서쪽으로 길게 뻗은 자락의 능원(陵園) 주변에는 고종황제의 일곱째 아들이며,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 부부의 영원(英園)과 그의 아들 이구(李玖)의 묘인 회인원(懷仁園)이 있고,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부부 묘와 덕혜옹주(德惠翁主)의 묘가 있다.
<홍유릉 지도>
따라서 이곳은 조선 역사의 마지막이 묻혀 있는 근현대사의 현장이다. 홍릉(洪陵)은 조선 제26대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과 비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 1851~1895)를 합장한 무덤이다. 1895년 8월 20일 경복궁 곤녕전(坤寧殿)에서 시해된 명성황후는 1897년 11월 21일 서울 청량리에 묻혔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승하하여 3월 4일 현 위치에 예장 되었고, 그때 명성황후의 능이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천장(遷葬)되어 고종의 능에 합장되었다.
<홍릉-네이버캡쳐>
고종은 흥선대원군과 여흥민씨의 둘째 아들로 운현궁에서 태어났다. 1863년에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결정권을 쥐고 있던 신정익황후 조씨(조대비)가 양자로 삼아 대통을 계승하도록 하여, 익성군에 봉해지고 관례를 거행한 뒤 왕위에 올랐다.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조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고,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총괄하였으나, 최익현 등의 상소로 대원군이 하야하고 1873년(고종 10)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였다.
<홍릉 홍살문>
재위기간 동안에 강화도조약을 맺어 문호를 개방하고, 해외 조사시찰단을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들여왔고, 군제를 개혁했지만, 친정선포 후 민씨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개혁파와 수구파의 대립으로 인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1894년(고종 31)에는 동학혁명이 발발하였고, 갑오개혁을 실시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을미사변을 겪은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아관파천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1897년에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정한 후 황제의 자리에 올라 자주독립 국가의 틀을 세웠다.
<홍릉 재실>
그러나 일본의 압력이 심해지는 가운데 1905년에 을사늑약을 맺고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으며, 1907년에 일제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보호하고자 세계만국평화회담이 열리는 헤이그로 이준(李儁, 1859~1907) 등 밀사를 파견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고, 이를 빌미로 일본과 친일파들의 강요로 1907년에 강제 퇴위당했다. 그 후 1919년에 덕수궁(경운궁) 함녕전(咸寧殿)에서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설이 유포되어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홍릉 제정(祭井)>
명성황후 민씨는 본관이 여흥(驪興)으로 여주 사저에서 태어났다. 1866년(고종 3)에 고종과 혼인하여 왕비로 책봉되었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자 친정 일가 민씨(閔氏)가 실권을 장악하였다. 1882년에는 임오군란 때는 피신 중에도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여 이를 진압하고 다시금 정권을 잡았다. 1884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 때에도 청군을 개입시켜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으며, 1894년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홍릉 비각>
이와 관련하여 정부에서는 일본 훈련대의 해산과 무장해제를 통고하자,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는 1895년 10월 8일 새벽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일본인 자객들을 명성황후의 처소로 들여보내 궁녀들 사이에서 명성황후를 찾아내 처참하게 살해하였다. 낭인(浪人)들은 시신을 궁궐 밖으로 끌어내 불에 태웠으며, 그 후 일본은 고종에게 명성황후를 폐서인(廢庶人)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불운한 최후를 맞은 명성황후는 곧바로 복위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명성황후로 추존(追尊)되었다.
<환구단의 옛모습>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홍릉은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떠 조성되었다. 꽃무늬를 새긴 12면의 병풍석으로 봉분을 둘렀으며, 봉분 밖으로 역시 꽃무늬를 새긴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다. 혼유석·망주석·사각 장명등의 석물을 배치하였고, 봉분 밖으로 3면의 나지막한 담을 둘렀다. 대부분 조선 왕릉에 설치한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는 없다.
<홍릉 연지(蓮池)>
능(陵)이 조성된 언덕 아래쪽에는 정자각 대신 정면 5칸·측면 4칸의 일자형 침전(寢殿)을 세웠다. 침전 앞의 참도(參道) 양옆으로 문인석·무인석과 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말의 동물 석상을 차례로 배치하였으며, 장대한 크기의 문·무인석은 금관을 쓴 전통적 기법으로 조각되었다. 침전 외의 부속 건축물로 비각·홍살문·수복방·재실 등이 있다.
<홍릉 침전>
유릉(裕陵)은 대한제국 2대 순종효황제와 첫 번째 부인 순명효황후 민씨와 두 번째 부인 순정효황후 윤씨의 능이다. 유릉은 합장릉의 형태로 한 봉분 안에 세 분을 같이 모신 동봉삼실 합장릉의 형태다. 유릉은 홍릉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조선왕릉을 계승하고 명나라의 황제릉을 인용한 대한제국의 황제릉으로 조성하였다. 홍릉에 비해 능역 규모가 좁지만, 석물의 조각이 사실적이다.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을 설치하였다. 제향 공간에는 침전, 석물, 비각, 홍살문을 세웠다.
<유릉-네이버캡쳐>
비각에는 1개의 능표석이 있는데 ‘대한 순종효황제 유릉 순명효황후 부좌 순정효황후 부우’라고 써있다. 처음 순명효황후 민씨가 1904년(광무 8)에 세상을 떠나자, 양주 용마산(현 어린이대공원)에 유강원(裕康園)을 조성하였다. 순종이 등극한 후 유강원은 유릉으로 추봉(追封) 되었으며, 순종이 1926년에 세상을 떠나자 용마산에 있던 유릉을 홍릉 옆으로 천장하였다. 이후 순명효황후를 먼저 모시고, 순종을 합장으로 모셨다. 그 후 순정효황후 윤씨가 1966년에 세상을 떠나자 유릉에 합장하였다.
<유릉 비각>
순종(재세 1874년~1926, 황재위 1907~1910)은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의 둘째 아들로 창덕궁 관물헌(觀物軒)에서 태어났다. 바로 다음 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897년(광무 1)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7년(광무 11)에 일본의 압박으로 고종의 뒤를 이어 대한제국의 두 번째 황제가 되어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쳤다. 등극 후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었고, 1909년(융희 3)에는 기유각서가 강제 체결되어 사법권을 강탈당했다. 결국 1910년(융희 4)에 한일병탄조약이 체결되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유릉 참도와 각종 석물>
그 후 이왕(李王)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1926년 4월 25일 새벽 6시 15분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구차히 산 지 17년, 2천만 생민(生民 : 국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다. 지금의 병이 위중하니 한마디 말을 않고 죽으면 짐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백성들이 분명히 알게 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백성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어둠 속에서 여러분을 도우리라.]
<유릉 홍살문과 침전>
신문에는 ‘5백 년 종사의 마지막 황상(皇上) 승하’라는 제목의 기사가 전면을 장식하였다. 그해 6월 10일 발인하는 날, 순종의 발인 행렬이 유릉을 향하여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단성사 앞을 지날 때, 황제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러 나온 수많은 군중 속에서 수천 장의 격문이 날아오르며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 황제의 인산일을 기하여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순종의 마지막 유언을 백성들이 알 리 만무하였으나, 마지막 황제의 죽음은 백성들의 독립에 대한 욕망을 더욱 고조시켰다.
<유릉 재실>
2. 영원, 회인원, 의친왕 묘와 덕혜옹주의 묘
홍유릉 담 밖으로 나와 영원으로 향한다. 초입에 재실(齋室)이 있고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다. 영원(英園)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과 부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1901~1989, 이방자(李方子)]의 묘다. 영친왕(1897∼1970)은 고종과 엄귀비(嚴貴妃)의 아들로 덕수궁에서 태어났다. 1900년에 영친왕으로, 1907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지만, 그해 12월 일본의 강압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철저한 주입식 교육을 받는다.
<영원(英園)>
1920년 일본 왕족 여인과 정략결혼을 한 후 이진과 이구 두 아들을 낳았으나 첫아들 이진은 1922년 덕수궁에서 세상을 떠난다. 1926년 순종의 승하로 명목상 이왕(李王)이 되었으며, 육군사관학교의 교수부장, 육군중장으로 근무하였고, 1945년 해방을 맞아 귀국을 원했으나 무산되었다. 1963년 대한민국 국적을 얻어 귀국은 하였지만 이미 병세가 중하여 1970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73세로 영면한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는 황태자의 예우로 시호를 의민(懿愍), 원호를 영원(英園)으로 하고 종묘에 신주가 모셔졌다.
<영원(英園) 정자각>
의민황태자비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이방자(李方子)]는 영친왕과 함께 국적을 얻어 귀국 후 사회봉사 사업에 힘써 사회복지법인 명휘원을 설립하였다. 열악했던 장애인의 복지와 자립을 위한 삶을 살다가 1989년 4월 30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89세로 세상을 떠나 영원에 합장되었다. 저서로는 <지나온 세월>, <세월이여 왕조여> 등이 있다. 영원은 조선왕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었지만, 수라간과 수복방은 없다. 봉분은 병풍석이 없이 난간석만 설치되어 있다.
<영원(英園) 홍살문>
<영원(英園) 재실>
바로 옆에는 봉분(封墳)만 달랑 있는 회인원이다. 회인원(懷仁園)은 영친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황세손 이구의 묘다. 이구(李玖, 1931~2005)는 해방 후 국내 귀국이 무산되자 일본에 체류하다가 1953년 MIT 공과대학에 입학하여 건축학을 전공하였다. 1963년 귀국 후 창덕궁 낙선재에서 생활하며 대학 강의도 하였고,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명예총재를 지내기도 하였다. 2005년 7월 16일 일본에서 75세로 세상을 떠나 영원 경내에 회인원(懷仁園)을 조성하였다.
<회인원(懷人園)>
영원에서 뒤돌아 나와 솔 향기 가득한 산책로를 따라 주변 경치에 취하며 의친왕 묘와 덕혜옹주 묘에 도착하니 출입문이 잠겨 있다. 3월에 개방이라 돌아설까 했는데, 마침 관리하시는 분이 계셔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성묘만 하게 해달라고 하여 허락받고 들어가 묘 앞에서 큰절을 올린다. 그 이유인즉 의친왕비 연안김씨(延安金氏)가 처외가의 고모할머니이기 때문으로, 장모님께서는 고모가 의친왕비라고 가끔 말씀하셨다. 생전에 장모님 모시고 못 와본 것이 송구스럽지만 찾아뵙기는 처음으로 감개무량(感慨無量)하다.
<의친왕 묘>
의친왕 이강(李堈, 1877~1955)은 고종과 귀인(貴人) 장씨의 아들로 태어나 1892년 의화군(義和君)으로, 1900년 의친왕으로 봉해졌다. 190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부장,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대동단원들과 상해임시정부로 탈출하다 그해 11월 만주 안동(安東, 지금의 단둥)에서 발각되어 강제송환 되었다. 일본의 도일(渡日)강요도 뿌리치고 비밀리에 조국광복을 위해 지원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평민의 신분으로 살다가 1955년 8월 안국동에서 79세로 세상을 떠난다.
<의친왕 사진>
초장지(初葬地)는 화양리였으며, 서삼릉에 옮겨져 가묘 형태로 있다가 1996년 덕혜옹주 묘 근처에 의친왕비와 합장으로 안치되었다. 표석은 없으며 묘소 앞에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이 놓여 있다. 의친왕비(1878∼1964)는 종로구 궁정동 칠궁에서 87세로 세상을 떠난 후 홍유릉 후궁 묘역에 안장되었다가 1996년 지금의 자리에 의친왕과 합장되었다. 의친왕은 의친왕비 사이에 자녀가 없는 대신 수관당 정씨와 수인당 김씨 등의 후실 사이에 12남 9녀를 두었다.
<의친왕과 덕혜옹주 묘 가는 길>
의친왕 묘 동쪽 언덕 위로 덕혜옹주 묘가 있어 잠깐 둘러본다. 덕혜옹주(1912∼1989)는 고종과 귀인 양씨의 딸로 덕수궁에서 태어났다. 5세에 덕수궁 즉조당(卽阼堂)에 세워진 유치원에 다니며 복령당 아가씨로 불리었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한 후 1921년 덕혜(德惠)라는 칭호를 받았다. 1923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29년 어머니 양씨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조현병(정신분열병) 증상이 나타났고, 1931년 대마도 번왕의 아들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덕혜옹주 묘>
1932년 딸 마사에[正惠]를 낳았지만 극심한 조현병 증세로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1946년 도쿄의 정신병원에 입원하였고, 1955년 남편과 이혼하였으며, 딸 마사에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국적을 얻어 귀국하게 되었으나 조현병에 실어증까지 겹친 병세로 창덕궁과 병원을 오가며 치료에 전념하다가 1989년 4월 21일 창덕궁 수강재에서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는 <대한 덕혜옹주지묘>라는 표석이 있으며 상석과 향로석, 망주석, 장명등이 놓여 있다.
<덕혜옹주-네이버캡쳐>
참고로 왕실의 무덤은 세 가지로 구분한다.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은 원(園)이라 하며, 그 외 왕족들의 무덤은 묘(墓)라고 한다. 그리고 임금과 정궁(正宮)의 소생인 경우 아들은 대군(大君) 딸은 공주(公主)라 하고, 후궁(後宮)의 소생인 경우 아들은 군(君) 딸은 옹주(翁主)로 구분하였다.
<홍유릉 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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