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물소리 길6(은행나무길)
(2020년 2월 18일, 용문역∼용문사)
瓦也 정유순
양평군 용문면 다문리에 있는 용문역이 출발점이다. 용문역(龍門驛)은 중앙선의 철도역으로, 1941년 4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한 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1957년 6월 14일 복구하였으며, 2009년 2월 4일 구(舊) 역사를 철거하고 임시역사로 이전하였다가 2009년 12월 23일 국수~용문간 복선전철 개통에 맞추어 신(新)역사를 개장하여 수도권 전철 중앙선이 운행된다. 서울 청량리역에서 약 60㎞ 지점에 있으며, 용문산과 용문사, 용문 5일장 등을 찾는 관광객이 많아 이용객이 많다.
<물소리길 6구간>
<용문역>
용문역 남쪽 3번 출구로 나와보니 새봇들을 비롯한 산하(山河)에는 어제 내린 눈이 소금으로 절여 놓은 듯하다. 겨우내 눈(雪)발을 눈(眼) 빠지게 기다렸으나 종무소식이더니만 늙은 홀아비 늦바람나듯 봄이 오는 문턱을 하얗게 분 칠을 하였다. 함박눈 펄펄 날릴 때 지난여름 부엉이 울던 밤에 떠난 첫사랑이라도 떠 오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도 봄의 문턱을 넘기 전에 내린 서설(瑞雪)이 반갑기 그지없다. 눈 쌓인 대지 아래에는 봄을 기다리는 생명의 용틀임이 지축을 아주 조용하게 움직인다.
<새봇들>
용문역 동쪽으로 어미산이 동산처럼 자리한다. 이곳은 예전에 토기(土器)가 한두 점이 출토된 적이 있으나 보존지역으로 되지 못하고, 지금은 양묘사업소로 사용되고 있다. 용문양묘사업소는 ‘백 년 후의 울창한 산림을 준비하는 곳’으로 우량하고 건전한 묘목을 생산·공급하기 위한 사업소다. 특히 기후변화와 인구의 고령화로 인력수급 불안정에 대응하여 종자의 파종부터 물 및 양액 공급·관리 자동화 등 효율적인 양묘(養苗) 생산 기반시설을 2015년에 구축하였다고 한다.
<용문양묘사업소 입구>
<용문양묘사업소>
다문6리 마을회관 앞에서 다시 만난 흑천 둑을 따라 북으로 방향을 잡는다. 좌측으로는 양평의 명물 백운봉이 용문산 줄기와 함께 소복단장을 하였다. 백운봉(白雲峯, 940m)은 용문산의 남쪽 능선으로 연결된 봉우리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눈 덮힌 백운봉은 규모로는 비교할 수 없지만 마치 일본 후지산[부사산(富士山)] 정상을 바라보는 착각을 잠시 하며 용문면 마룡리로 들어선다.
<용문산 능선과 백운봉>
<백운봉>
마룡리(馬龍里)는 본래 지평군 하서면 지역이었는데, 1908년에 양평군으로 편입되었고, 1914년 지방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용담리, 마천리, 금곡리 일부와 상서면의 전곡리, 상진리의 각 일부를 합쳐 마천과 용담의 두 지명에서 합하여 마룡리라 하였다. 1988년 8월 1일 현재 2개 행정리에 10개 반으로 편성되었다. 마룡리는 1954년 2월에 개교한 용문중학교와 1960년 2월에 개교한 용문고등학교가 있어 지역 교육 발전의 중심지다.
<마룡리에서 본 용문산>
흑천과 용문천이 합류하는 곳에는 용문국민생활체육센터가 자리한다. 용문천(龍門川)은 용문산에서 발원하는 지방하천이다. 용문면 남동쪽으로 흐르다 중원천과 합류하고, 합류점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 흑천에 유입된다. 하천연장 10.44km, 유로연장은 13.92km, 유역면적 46.72㎢이다. 중원천과 합류하는 중류 지역에는 계단식 경작지와 취락지·산지가 형성되어 있고, 하류 구간에는 농경지와 취락지가 위치한다. 상류 지역은 경사도가 급하며, 하천 토양은 자갈과 호박돌이 섞여 있다.
<용문생활체육공원>
용문천 용소교를 건너면 천주교 서울대교구 용문청소년수련원이 있는 용문면 덕촌리다. 덕촌리(德村里)도 마룡리와 마찬가지로 본래 지평군 하서면의 지역인데, 1908년 양평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봉대리, 퇴촌리, 덕동리, 운계리 일부를 합쳐 이 중의 덕동리와 퇴촌리 두 마을지명을 합쳐 덕촌리가 되었다. 덕촌리에는 용문 조욱(龍門 趙昱, 1498~1557)을 주벽(主壁)으로 조성(趙晟)·신변(申抃)·조형생(趙亨生)·조문형(趙門衡)을 배향한 운계서원(雲溪書院)이 있다.
<용소교와 용문청소년수련원>
조욱은 조선의 학자로 본관은 평양(平壤)이다.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의 제자이며, 19세 때 생ㆍ진(生進) 양시(兩試)에 급제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에 연좌되었으나 연소(年少)로 모면하였다. 그 후 추천을 받아 선원전(璿源殿)ㆍ순릉(順陵)ㆍ영릉(英陵) 참봉을 역임했으나 곧 사임하고 용문산중(龍門山中)에 은거(隱居)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명종 때 장수 현감(長水縣監)을 지냈다. 그의 신도비가 덕촌리(262-1) 길가에 있다.
<용문 조욱 신도비>
신도비 조금 아래 길가에는 ‘平壤趙氏世藏洞口(평양조씨세장동구)’라고 음각된 바위가 있다. 이는 이곳에 은거한 조욱이 ‘세상으로부터 나를 감췄다 또는 묻었다’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바위에 새긴 것 같다. 여기서 세장지(世藏地)란 조상 대대로 묘를 쓰는 곳을 말하며, 세장동구(世藏洞口)란 이러한 땅으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를 말한다. 이러한 유물들로 보아 덕촌리는 평양조씨와 조욱(趙昱)과 깊은 인연이 있는 것 같다.
<평양조씨 세장동구>
덕촌2리를 지나 고개를 넘으면 어머니 품처럼 안기고 싶은 용문면 오촌리다. 오촌리(梧村里)도 본래 지평군 하서면의 지역이었는데, 1908년 양평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지방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간촌리, 답곡리, 오리, 신촌리 일부를 합쳐 오촌리로 통합하여 용문면에 편입된 지역이다. 오촌리에는 오리골이란 마을이 있는데, 이웃 마을인 조현, 덕촌, 신점리가 이 마을에서 각각 오리(五里)가 된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는 말도 있다. 오촌리에는 ‘□’자집 형태의 조선 말기 주택인 김병호고가(金丙浩古家)가 있다.
<덕촌리에서 오촌리로 넘어가는 고개>
<용문면 오촌리마을>
신점리(新店里)도 이웃의 다른 마을처럼 본래 지평군 하서면의 지역이었는데, 1908년 양평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지방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옹점리, 신촌리, 조좌리 일부를 합쳐 신점리가 되었다. 신점리에는 용문산 정상과 용문사를 비롯한 용문산관광지가 조성된 지역이고, 용문산 야외극장이 있어 양평의 문화가 숨쉬는 지역이며, 양평 물소리 길의 종점이다. 관광지에는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너른 주차장과 가게들도 잘 정돈되어 있다.
<용문산관광지>
용문산관광지에서 물소리길 도보를 끝내고 용문사로 걸어 올라간다. 매표소를 지나 초입에는 친환경농업박물관이 나온다. 원래 양평군은 친환경농업을 주도해온 지방자치단체다. 전 농가에 화학비료와 농약 사용을 하지 않는 유기농을 장려해 왔다. 더욱이 용문산에서 채취되는 산나물은 ‘산나물축제’를 통해 친환경농업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있다. 1층은 갤러리(미지)로 활용되고 2층에는 양평역사실, 친환경농업실, 자연음식연구소, 무료다도체험장 등이 있다.
<친환경농업박물관>
바로 위에는 위정척사비와 한국민족독립운동발상지 등 독립운동과 항일투쟁 기념비가 서있다. 위정척사(衛正斥邪)는 조선 후기 성리학을 기반으로 서학(西學)의 전래와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나타난 사상으로, 정도(正道)·정학(正學)을 지키고 이단(異端)과 사학(邪學)을 물리친다는 뜻이다. 1860년대에 양평 출신 이항로(李恒老)·기정진(奇正鎭) 등에 의해 체계화되었으며, 김평묵(金平黙)·유중교(柳重敎)·이진상(李震相)·최익현(崔益鉉)·유인석(柳麟錫) 등이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위정척사>
위정척사사상은 성리학을 신봉하는 보수적인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들의 실천은 개인적 상소(上疏) 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영남과 관동·기호(畿湖)의 유생들이 대거 참여하는 전국적인 집단상소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1890년대 이후에는 충의(忠義)와 근왕(勤王)을 내세운 의병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양평은 위정척사사상의 발상지로 한국민족독립운동발상지라 할만하다.
<한국민족독립발상지 등의 비>
일주문을 지나고 사천왕문을 통과하면 수령 1,1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반긴다. 천연기념물(제30호)로 지정된 이 은행나무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세자였던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심었다고도 하고, 또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그의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고도 한다. 이 나무가 자라는 동안 많은 전쟁과 화재가 있었으나 이 나무만은 그 화를 면했다고 하여 천왕목(天王木)이라고 한다.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는 소리를 내어 그 변고를 알렸다 하여 세종(世宗) 때는 당상관(정3품) 품계를 하사받은 명목(名木)이다.
<용문사 은행나무>
용문사(龍門寺)는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다. 913년(신덕왕 2) 대경대사(大鏡大師)가 창건하였다. 일설에는 649년(진덕여왕 3) 원효(元曉)가 창건하고 892년(진성여왕 6) 도선(道詵)이 중창하였다고 하며, 또 경순왕이 직접 이곳에 와서 창건하였다고도 한다. 1378년(우왕 4) 정지국사(正智國師) 지천(智泉)이 경천사(敬天寺)에 있던 대장경판을 이곳에 옮겨 봉안했으며, 1395년(태조 4) 조안(祖眼)화상이 중창하였다. 1447년(세종 29) 수양대군이 어머니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원찰로 삼으면서 보전을 다시 지었다.
<용문사 대웅전>
대한제국 때 전국에서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당시 용문산과 용문사는 양평 일대 의병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당시 권득수 의병장이 용문사에 병기와 식량을 비축해두고 항일활동을 펼치며 일제에게 타격을 입혔다. 반격에 나선 일본군 보병 25연대 9중대와 용문사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는데 1907년(융희 1) 8월 24일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러 사찰의 전각들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 불에 탔으나 1958년에 재건하였다. 용문팔경의 하나인 용문사 새벽 종소리는 지금도 울리는지…?
<용문사 일주문>
용문역을 출발할 때부터 용문사에 도착할 때까지 길을 인도해준 용문산(龍門山, 1157m)은 옛 지명이 미지산(彌智山)이었는데,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면서 용문산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미지는 미리의 완성형이며, 미리는 용의 다른 이름이므로 미지산과 용문산의 뜻은 상통한다. 정상은 평정(平頂)을 이루고 능선은 대지(臺地)가 발달하였으며, 특히 중원산과의 중간에는 용계(龍溪)·조계(鳥溪)의 대협곡이 있고 그사이에 낀 대지는 기암절벽 위에 있어 금강산을 방불케 한다.
<용문산>
물소리길 6구간은 비교적 평탄한 길이었으나 덕촌리를 지나 오촌리까지는 몇 개의 고개를 넘는다. 이 정도 고개라면 흔한 도깨비 전설이라도 있을 법한데 조용하기만 하다. 사람들의 발길잦아 시끄러워서 다들 피했는지 오촌리를 벗어나 신점리로 넘어가는 고개에도 물소리길 6코스 도보인증 대만 달랑 있다. ‘길’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이웃과 소통하고 생명을 위한 재화의 조달을 위해 만들어진 삶의 통로가 아니던가! 당연히 켜켜이 쌓여온 우리의 흔적이 있을 법한데 꼭꼭 숨어 보이질 않는다.
<오촌리에서 신점리로 넘어가는 고개>
<경기제일용문산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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