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보물의 섬 남해를 가다

와야 정유순 2015. 12. 16. 22:03

보물의 섬 남해를 가다

(2015. 12. 1212. 13)

瓦也 정유순

   캄캄한 밤 새벽 1시 반 넘어 두모드므게마을 숙소에 도착하여 짧은 잠을 자고 여명에 눈을 뜨니 남해금산이 지척이다. 두모마을 다랭이를 지나 금산 중턱 도로변에는 진시황의 불로불사(不老不死) 영약(靈藥)을 구하러 동남동녀(童男童女) 500명을 데리고 동해 바다 끝 신산(神山)으로 떠났다가 끝내 돌아오지 않은 서복(徐福) 석상이 하얀 수염을 날리며 남해를 굽어본다. 서복이 지나간 흔적이 남해양아리 석각에 새겨있는 서불과차(徐市過此)’인데 우리도 흔적을 남기며 삼천포로 이동한다.

 

 

 

   삼천포는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로 더 유명한 곳으로, 고려 성종 때 조세미를 운송하기 위한 통양창(通陽倉)을 설치하였는데, 수로로 개성까지 삼천리나 되는 먼 곳이라는 의미로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한다. 원래 행정중심으로 발전한 곳이 아니고 포구로서 성장한 곳으로 1956년부터 시()로 이어오다가 19955월 도농통합 때 사천군과 통합되어 사천시가 되었다.

 

   삼천포에서 보물의 섬 남해까지는 삼천포대교에서 시작하여 초양도와 늑도를 연결하는 초양대교, 초양도에서 늑도까지의 늑도대교를 지나 남해군 창선면 대벽리에 다다르고, 창선대교를 건너 4개의 대교를 거쳐야 다다를 수 있다. 연륙교나 큰 강을 연결하는 다리의 공통점은 흔들거림이 감지할 정도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바람의 영향이려니 생각하고 가끔 무심코 뒤뚱거린다.

 

   창선도에는 자연으로 조성된 고사리 밭이 있다. 적량에 있는 국사봉 자락을 따라 고사리가 많아 남해바래길 일곱번째코스 고사리밭길로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바래는 옛날 남해 어머니들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물때에 맞추어 갯벌에 나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작업을 말하며, 그때 다니던 길을 바래길이라고 한다. 과연 고사리가 우거진 채 땅을 덮고 있다. 바다 건너 북쪽으로 삼천포가 마주하고, 동쪽으로 지리망산이 있는 사량도와 수우도가 보인다. 길옆의 오래된 밤나무 한그루는 손바닥을 활짝 핀 것처럼 원목에서 가지가 부채 살처럼 퍼져나간다.

 

 

 

 

   창선도 남쪽 끝 지족리에서 삼동면 지족리까지 연결되는 이곳이 창선대교이다. 창선대교 밑은 물살이 아주 빠른 지족해협으로 원시의 전통어업방식인 죽방렴이 있는 곳이다. 죽방렴은 참나무 말뚝을 V자로 박고 대나무로 그물을 엮어 물고기가 들어오면 통발에 갇혀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자연에 순응하는 우리의 전통어업방법으로 지금도 23개소가 남아 있다. 그리고 이는 우리 선조의 지혜가 돋보이는 어로법으로, 남해의 지족해협에는 500년 이상 이어 온 것이 있으며, 이곳의 물고기는 신선도가 좋아 값이 비싸다고 한다.

 

   죽방렴 멸치 쌈밥으로 점심을 하고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삼동면 물건리와 봉화리 일대에 조성된 독일마을로 간다. 1960년대 보릿고개가 있어 가난했던 시절 광부와 간호사로 독일에 파견되어 경제성장에 큰 도움을 줬던 독일교포들의 국내 정착을 위해 마련된 이 마을은 능선을 따라 독일식 주택으로 지어져 이국적 풍경을 자아내고 있으며, 마을 꼭대기에 있는 남해파독전시관에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삶의 고된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제는 관광객이 찾아오는 남해의 명소가 되었다.

 

 

   맨 위 전망대에서 주변을 조망하고 해변 아래로 내려오니 물건마을이 있고, 물건중학교 앞으로 하여 해안 쪽으로 나오면 푸조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팽나무 등 2천여그루가 초승달 모형으로 방풍림이 조성되어 있는데 나무수령이 수백 년 이상이 된 노거수들이다. 이 숲 덕분에 20039월에 이곳에 엄청난 피해를 줬던 태풍 매미 때 피해를 입지 않았단다. 참으로 신기한 자연의 조화다. 숲 사이로 설치된 데크를 따라 물건항 쪽에는 고급요트가 정박해 있는데 이곳이 요트의 천국이란다.

 

 

 

 

   미조면 해안에 있는 무민사라는 사당으로 이동한다. 무민사는 일명 장군당이라고 하는데 신상(神像)같이 그려진 영정이 봉안된 데에서 연유한다고 한다. 조선 중엽에 미조 앞바다에 떠내려 온 나무상자에서 최영(崔瑩, 13161388)장군의 영정이 나와 초당을 짓고 모시다가 후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왜구에 시달리며 살아오던 주민들이 최영장군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미조진(彌助鎭)에서 제사를 주관했으나, 1950년대 쯤 지방 유지들로 구성된 고적보존회에서 사당을 재정비하고 해마다 8월 보름과 섣달 그믐날에 제향을 올린다고 한다. 아직 가을을 붙잡고 있는 단풍과 평면의 얼굴에 코가 툭 튀어 나온 돌 보살이 인상적이다. 미조항에서 붕어빵으로 시장기를 달래고 미조면소재지를 가로질러 나가니 송정솔바람해변이다.

 

 

   송정솔바람해변은 고운 모래에 잔잔한 물결이 인상적이고, 남쪽의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남국의 정취가 풍긴다. 부드러운 백사장과 송림을 배경으로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다섯 갈래의 꽃무늬가 있는 조개(?)가 눈에 띠는데 이름을 알 수 없다. 주민에게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는데 혹시 불가사리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섬 안으로 쏙 들어와 포근함을 주는 남해의 명소 상주은모래비치에 도착할 때는 이미 해가 보이질 않는다.

 

 

   상주은모래비치는 남해에서 가장 빼어난 풍경을 가진 해수욕장으로 백사장 길이가 2km, 120m의 부채꼴 모양의 해안백사장과 눈앞에 펼쳐진 작은 섬들은 바다를 호수모양으로 감싸고 있으며, 파도가 잔잔하고 수온이 따뜻하여 피서지로 일품이라고 한다. 그리고 남해금산과 더불어 한려수도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부터 부산하다. 남해금산(705m) 보리암에 가서 일출을 보기 위함인데 구름이 하늘을 가린다. 먼동이 트이면서 시야가 넓어진다. 보리암은 금산의 기암절벽 영봉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나라 3대 관음 기도처 중의 하나다. 어제 트레킹 마지막지점 상주은모래해변이 바로 발아래다. 해수관음보살상 앞에는 소원을 비는 분들이 예를 올리고, 나도 조그만 소원 하나를 빌어 본다. 동쪽의 구름사이로 태양이 고개를 내민다. 봄날 같은 겨울 날씨지만 남해금산의 새벽바람은 끝이 칼날 같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전각들과 기암괴석들을 둘러본다.

 

 

 

 

 

   장군바위 콧날은 아름답게 밑으로 흐르고, 쌍홍문을 통과할 때는 몸을 낮추라고 한다. 가파른 경사를 내려올 때마다 느끼는 것은 올라갈 때에는 용기가 더 필요하지만, 내려올 때는 순발력과 지혜가 더 필요하다. 남해금산은 조선 태조 이상계가 백일기도를 하여 왕이 된 후 원래 이름이었던 보광산에 비단을 두른다는 뜻으로 비단 금()자를 붙여 금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조금 늦은 조반 후 두모마을 다랭이로 오른다. 당초 남면에 있는 가천다랭이마을로 계획하고 있었으나, 이곳 다랭이도 그곳 못지않다는 이야기에 가천다랭이마을은 다음으로 미룬다. 두모마을 다랭이는 유채와 메밀을 재배하는 밭이다. 골 따라 밭둑과 수로가 발달되었고, 농기계가 다닐 수 있는 농로가 맨 위까지 나 있다. 그리고 내년 봄을 맞이하고자 유채가 파랗게 자리한다.

 

 

   앵강만으로 이동하는데, ‘구운몽사씨남정기를 쓴 서포김만중(西浦金萬重, 16371692)56세의 나이로 유형(流刑)의 삶을 마감한 섬 노도가 바다 건너 코앞이다. 이 때문인지 남해에는 국내 최초로 유배와 유배문학에 관한 종합적인 정보습득을 위한 남해유배문학관이 남해읍에 있으나 들르지 못했고, 잠시 구운몽의 주인공 성진(性眞)이 되어 보는 꿈을 상상해 본다.

 

 

   앵강만을 중심으로 조성된 다숲길을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해변 길을 걸어간다. 원천동마을에는 피라칸타 붉은 열매가 다닥다닥 붙어있고 비파나무 꽃이 향을 피운다. 원천횟집촌을 지나 신전 숲에는 지난 가을들이 그대로 묻어있다. 수북이 쌓인 낙엽 위에 몸을 굴려보며 가을에 못 다한 이야기들을 속삭인다. 앵강다숲 마을 앞을 지나 미국마을 쪽으로 간다.

 

 

   이동면 용소리에 있는 미국마을은 모국에 들어와 노후생활을 보내려는 재미교포를 위해 조성된 마을로 아마 독일마을을 벤치마킹한 것 같다. 자유의 여신상이 마을 앞에 상징적으로 서 있고, 미국풍 건물과 메타세쿼이아의 단풍이 골목을 물들여 미국 같은 정취가 물씬 난다. 울타리에는 노란염료로 사용하는 치자나무열매가 아름답지만, 문 앞에 For Sale이라고 써 붙인 푯말이 낙엽보다 더 쓸쓸하다.

 

 

   오후에는 마지막코스인 이순신호국길(남해바래길 13코스)’로 간다. 이 길은 노량해전 당시 충무공 이순신장군 유해가 최초로 육지에 오른 곳으로 남해 관음포(사적232) 이락사(이충무공전몰유허)에서 가묘가 있는 남해충렬사를 잇는 호국의 길이다. 관음포 해역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격전지로서 도망하는 적들의 유탄에 맞아 1598(선조 31) 음력 1119일 이른 아침에 이순신장군이 장렬하게 순국하신 곳으로, 역시 남해는 충무공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로부터 234년이 지난 1832(순조 32)에 홍문관 대제학 홍석주의 글로 이충무공유허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락사 뒷길을 따라 송림이 우거진 첨망대(瞻望臺)로 간다. 첨망대는 한려수도를 따라 유유히 남해노량 앞 바다에 이르면 관음포가 내려 보이고, 이곳에서 충무공께서 순국하신 옛 자리를 보면서 장군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이락산 마지막지점에 2층 팔작지붕으로 남해군에서 19912월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물살이 빨라 흩어지는 물방울이 이슬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 노량(露梁)으로, 이 해전에서 7년의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순신장군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하며 적의 흉탄에 숨을 거둔 곳이다. 남해충렬사를 향해 마을길을 지나는데 농익은 유자가 햇빛에 반짝인다. 소나무가 우거진 산을 넘고 해안 길을 따라 걷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오버랩 된다. 해가 서산에 가깝게 다가갈 즈음 남해대교 밑에 도착한다.

 

 

 

   집을 나와 오래 걸을수록 집이 가까워진다는 말처럼 돌아가야 할 시간을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급해진다. 가깝게 충렬사와 거북선이 보이는 곳에서 오늘을 마감하며, 지나온 남해의 추억들을 보석처럼 소중하게 각인한다. 그리고 고대부터 왜()와의 관계. 특히 고려 때부터 추수라는 명목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약탈하러 오던 왜구(倭寇), 조선을 침략하여 7년간 전란으로 휘몰았던 임진왜란, 35년간의 일본강점기, 최근에는 미일 상호방위조약에 의한 일본자위대의 해외파병의 완화 등 가깝고도 아주 먼 일본을 다시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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