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선 155마일을 걷다(일곱 번째, 完 )
(문수산성→도라산 역→행주산성, 2015. 11. 28∼29)
瓦也 정유순
서해안 걷기를 끝내고 휴전선 걷기 시작할 때 건너뛰었던 김포 갑곶진에서 파주까지 보충하기 위해 오늘 걷기를 시작한다. 하늘은 새벽부터 흐리더니 싸락눈이 떨어진다. 지금 걷는 길은 평화누리 길 2코스로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에 있는 문수산성 남문에서 애기봉으로 가는 조강철책길이다. 조강(祖江)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부터 서해안으로 흐르다가 유도를 지나 예성강을 가슴으로 안고 서해바다로 흘러간다. 즉 김포반도 북단과 북한의 개풍군 사이를 흐르는 게 조강이다.
휴전선(군사분계선)은 육지에 그어진 선으로 파주 사천강 일대에서 부터 강원 고성을 잇는 경계선의 거리로 155마일이다. 그러므로 조강사이에는 군사정전협정에 의한 휴전선은 없고 남∙북의 군사적 필요에 의해 철책을 치고 방어적 목적으로 구분해 놓은 것이란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는 한강하구 일대를 민간선박의 출입 및 왕래를 보장하는 수역이다.
남문에서 문수산성 길을 따라 올라간다. 여름 내내 푸르렀던 낙엽들은 수북하게 쌓여 소금을 버무린 듯 그 위에 싸락눈이 날린다. 그나마 바람이 불지 않아 추위는 견딜 만하다. 문수산성은 숙종 때 석성으로 축성 되었으나 고종3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 함대와 대치 중 성벽 일부가 무너졌는데, 그 자리에 마을이 생기고 문수산 쪽으로 성루를 복구하였다. 문수산 정상 전방 400미터 앞에서 홍예문을 지나 애기봉 쪽으로 방향을 트는데 못내 아쉽다.
홍예문에서 청룡회관으로 가는 계단 길을 따라 월곶면 고막리를 지나 문수산 자락의 조강리 언덕을 넘어 마을에는 서리 맞은 고욤이 나무에 다닥다닥 붙어 있어 감(홍시) 맛을 대신한다. 오늘따라 바람 한 점 없어 수면이 고요한 농업용저수지인 조강저수지가 흐린 하늘과 마을을 호수에 담아준다. 농로와 수로를 따라 가다가 왼쪽에 하얀 비석이 보이는데, 옛날 조강포(祖江浦) 자리를 알리는 표지석이다.
애기봉 아래의 조강포는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큰 포구였고, 강 건너 개풍군 조강포와 상호 배로 왕래하며 번성했던 곳이란다. 강을 건너기 위한 사람들과 장사꾼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했으며, 세곡(稅穀)을 실은 조곡선(租穀船)이 한강을 거슬러 한양으로 가기 위해 물때를 기다리며 잠시 쉬어 가는 곳이었다고 한다. 옛날 포구자리는 논으로 다 변해 표지석만 외진 길가에 외롭게 서있어 찾아오는 이 귀하다.
조강포에서 오솔길을 따라 고개를 넘으니 애기봉으로 가는 버스가 기다린다. 아마 개별 출입이 제한되었나 보다. 그곳을 지키는 병사의 신분확인이 끝나고 애기봉휴게소까지 버스로 이동한다. 버스에서 내리니 “우리는 조국의 총끝! 칼끝!”이라는 자극적인 구호가 접경지역이라는 실감을 나게 한다.
크리스마스 트리로 유명했던 애기봉정상에는 전망대 건물이 들어섰고 조강 건너 북녘 땅은 구름에 가려 희미하다. 북서쪽으로 예성강 포구가 가물거리고 북동쪽으로 임진강 물살이 아른거린다. 애기봉은 휴전선 서쪽 방향에 위치하고 김포반도의 북단에 있는 곳으로 북녘 땅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최단거리 전망대로, 병자호란 때 평양감사와 애첩인 애기와의 슬픈 사연이 서려 있는 곳이란다.
애기봉을 내려와 허기를 채우고 오후부터는 철새도래지 부근인 하성면 후평리에서부터 평화누리길 3코스(애기봉입구∼전류리포구) 한강 철책 길을 걷는다. 후평리 철새도래지는 김포 하성면 석탄리와 시암리, 파주 교하면 신남리와 문발리 신촌리 등지와 묶여 천연기념물 250호 한강하류재두루미도래지로 지정된 수도권 최대 철새도래지다. 이외에도 청둥오리와 흰뺨검둥오리도 만나 볼 수 있다고 한다.
임진강과 합류지점인 파주가 강 건너에 보이고, 한강 따라 남으로 내려올수록 오두산이 훤히 보인다. 한강의 철책은 2중 3중으로 예나 변함없지만 접경지역으로 접근하는 조건은 상당히 완화된 것 같다. 억새풀이 우거지고 포장이 잘된 철책 길까지는 질퍽한 논길을 걸어야 했다. 논뻘이 묻은 신발을 억새에 털어내고 포장길을 걸으니 전류리포구 간판이 보인다. 가끔 자동차들이 철책 길을 한가로이 달린다. 전류리포구를 지나 한강 지천인 하동천 생태공원을 거닐 때는 어둠의 그늘이 다가온다.
전류리포구는 김포대교에서부터 북방어로한계선까지의 고기잡이가 가능한 한강 최북단 어장이다. 그리고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역(汽水域)으로 생태계의 보고다. 군사보호구역으로 군부대에서 허가를 받은 27척의 어선만이 눈에 잘 띄는 붉은 깃발을 달고 조업을 한다고 한다. 이곳은 2007년에 일반인에게 개방되었으며, 봄에는 황복과 웅어, 여름에는 농어와 자연산 장어, 가을에는 새우와 민물참게, 겨울에는 숭어가 제철이라고 한다.
새벽부터 가을을 보내기가 아쉬운지 비가 오는데 요즘은 지구온난화 때문인지 가을비 치고는 자주 내린다. 오늘은 휴전선 걷기의 대단원의 막을 내려야 하는 날이다. 그래서 경의선의 끝 지점이자 군사분계선의 코앞인 도라산역에 가서 우리의 통일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도라산 역 플렛폼에는 서울 56km, 평양 205km 이정표가 보인다. 바로 여기에서 평양행 기차표를 사서 철마를 타고 달려가는 상상을 해보는데, 전망대에서는 북녘 땅의 흐린 안개만 보인다.
도라산(都羅山)은 신라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헌납하고 산마루에 올라가 신라의 도읍인 서라벌을 사모하고 눈물을 흘렸다하여 도라산이 되었고, 이 이름을 따 도라산역이 되었다고 한다. 도라산역은 2000년 6월 15일 남북공동선언에 이어 같은 해 7월 31일 경의선 철도를 연결하기로 합의를 하였고, 군부대가 앞장서서 철조망을 걷어내고 지뢰를 제거하여 2002년 4월 11일에 역이 개통되고, 2003년 6월 14일 군사분계선에서 남북이 경의선 철도 궤도를 연결하였다.
도라산역 건물 지붕모양은 태극무늬를 이용하여 남북이 서로 손을 맞잡은 모습으로 서로 연결고리가 되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고 하며, 국내∙외에 남북통일을 염원하고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장소로 알려져 많은 평화행사가 개최되었다. 2002년 2월 20일에는 방한한 미국 부시대통령과 김대중대통령이 함께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국내외 수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방문한다. 지금은 서울역에서 도라산역까지 주중에는 하루에 1회, 주말에는 오전과 오후로 하루에 2회 기차가 운행한다.
지금의 도라산역은 북으로 가는 남쪽의 마지막 역이 아닌, 북쪽으로 가는 첫 번째 역으로 자리매김을 하여야 하고, 한국철도(TKR)가 시베리안철도(TSR)와 중국철도(TCR)와 연계되는 날, 대륙을 향한 출발점으로 그 의미를 부여 받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 동북아의 물류중심국으로 우뚝 서는 그날을 기대해 본다.
자유로를 따라 내려오는데 예술인들이 조성했다는 헤이리마을에 들렀다. 오후에는 평화누리길 4코스(호수공원∼행주산성) 행주나루 길로 접어든다. 일산호수는 원래 한강물이 쉬어 가던 유수지였는데 대단위 주택단지가 조성되면서 형성된 호수로 지금은 자연과 꽃과 도시가 어우러지는 고양시의 명품이 되었다.
해마다 고양꽃박람회와 세계꽃박람회가 일산호수 주변에서 성대하게 열린다. 원래 이 지역은 지대가 낮아 해마다 홍수 때 상류의 유기물이 떠 내려와 퇴적되어 별도의 퇴비를 안 해도 쌀농사가 잘되었고 미질(米質)이 좋아 임금님 수라상에 올려 졌다고 한다. 행주산성으로 가는 호수공원 주변에는 산책길이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덕양산 정상에 있는 행주산성은 삼국시대 초기 산성으로 추정하나,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과 한산대첩과 행주대첩 등 3대 대첩으로 더 유명하다. 권율의 지휘 하에 한강에서 올라오는 3만의 왜적을 물리친 곳으로 행주치마가 이곳 부녀자들이 앞치마로 돌을 날라 전쟁을 도왔다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라는 유래가 있다. 충장공 권율의 행주대첩을 기리기 위해 충장사에서 매년 3월 14일에 행주대첩제를 지낸다고 한다.
덕양산 정상에는 대첩비가 탑처럼 높게 서 있고, 비각 안의 대첩비는 조선의 명필 석봉 한호가 썼다고 하는데, 비문은 마모가 되어 원문을 읽기가 힘들다. 산성 밑으로 자유로가 차량통행으로 바쁘고, 빨간색의 방화대교는 한강 건너 인천국제공항까지 길게 늘어선다. 한강은 오늘도 역사를 품으며 유유히 흐른다.
나는 길을 걸으면서 항상 나에게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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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우리라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서 걸어 와서 어디로 걸어가는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어떤 길인가?
그리고 지금 나는 어디쯤에 서 있는가?
이렇게 자문할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
여기에 대한 답을 나는 알 수 없다.
아무래도 그 답은 안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답이 나올 때까지 걸을 수밖에 없다.
그래 걷자. 가슴이 설렐 때 더 많이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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