端宗哀史 영월 땅 봄나들이
(2016년 4월 26일)
瓦也 정유순
어린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일어나자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청령포로 유배 가던 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남한강을 건널 때 엷게 낀 물안개는 그때 단종이 삼켰던 눈물 같다. 600여 년 전에는 물을 건너고 산을 넘어 노찬야숙(路餐野宿)을 하며 더디게 갔을 그 길을 휭하니 달려가니 마음 한구석에는 미안한 마음이 도사린다.
<청령포 지도>
청령포는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지류인 서강(西江)이 휘돌아 흘러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으로는 육륙봉(六六峰)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는 지형이다. 1457년(세조 3) 6월 조선조 제6대 임금인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이다. 그해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자 강 건너 영월부의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유배지를 옮기기 전까지 두 달여간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청령포 전경-뒤에 육륙봉이 보인다>
청령포에는 그가 살았음을 말해 주는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와 어가,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 한양에 남겨진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쌓은 돌탑, 외인의 접근을 금하기 위해 영조가 세웠다는 금표비(禁標碑)가 있고, 단종의 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관음송’(천연기념물 349호)과 울창한 소나무 숲 등이 남아 있다. 특히 어가를 향해 누워 있는 소나무 한그루는 지금도 그때의 한을 생생하게 듣고만 있는 것 같다.
<어가>
<관음송>
<금표비>
<어가를 향해 누운 소나무>
강 건너 청령포를 조망하는 소나무 숲 언덕에는 단종의 사약을 가지고 온 ‘금부도사 왕방연’이 이미 죽어 시신이 강물에 버려진 사실을 알고 지은 “천만리 머나먼 길”로 시작하는 시조비가 가슴을 더 시리게 한다.
“千萬里 머나먼 길의 고은님 여희옵고(천만리 먼 길에 고운님 보내옵고)
내마음 둘듸업셔 냇가의 안쟈시니(내 마음 둘 곳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뎌물도 내안갓도다 우러밤길 예놋다(저 물도 내 마음 같이 울며 밤길 가누나)”
<* 밑줄 친 곳은 ‘아래아 、’로 표시된 곳임. ( )은 필자가 임의 해석>
단종의 유배는 청령포에서 홍수로 두어 달 만에 어가를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긴다. 관풍헌은 1392년(태조 1)에 건립된 영월 객사의 동헌 건물로 지방 수령들이 공사(公事)를 처리하던 건물이었으나 단종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단종은 관풍헌에 머물며 인근의 ‘자규루’에 올라 “한번 울면 피를 토하며 운다는 두견”을 빗대어 지은 ‘자규사(子規詞)¹’와 ‘자규시(子規時)²’를 읊어가며 괴로움을 달랬다고 전해진다. 1457년 10월 24일 단종은 17세의 일기로 관풍헌에서 사약이 당도하기 전에 화살 줄로 목 졸려 돌아가시었다고 한다.
장릉은 단종의 무덤이다. 단종이 죽자 살아있는 권력이 무서워 아무도 시신을 수습해 주는 사람이 없었으나, 이곳 영월 호장 ‘엄흥도’가 눈 내리는 밤에 몰래 시신을 거두어 가다 보니 ‘노루 앉은 자리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무덤을 만들었는데 그곳이 바로 ‘장릉’이라고 한다. 매년 4월 말이면 슬픈 사연을 간직한 단종을 기리는 ‘단종문화제’가 이곳 영월에서 큰 행사로 개최 한다. 그러나 관풍헌과 장릉이 이번 여정에 잡히지 않아 다음 기회로 미룬다.
청령포에서 육륙봉 너머에 있는 어느 농장으로 인도되어 산나물비빔밥으로 오전을 마감한다. 식사 후에는 이곳 농장의 밭에서 봄나물 캐기가 시작된다. 봄기운을 가득 받은 나물들이 얼굴을 내미는데, 쑥과 냉이 외에는 별로 아는 게 없어 식물들에게 미안하다. 이름을 모르는 풀은 잡초이고, 모르는 나무는 잡목이듯이 이름을 모르는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 저마다 아주 소중한 존재의 이유를 가지고 이 세상에 나왔을 것이거늘, 그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은 얼마나 될지∼∼??
<농장 안내판-흑진주님>
이곳 농장에서 재배한 표고버섯, 엄나무 순, 취나물, 더덕, 각종 산야초 등 우리의 건강에 필요한 싱싱한 농산물을 현지에서 구입하는 도반들이 많았다. 그리고 뒷산으로 산행을 나섰는데, 산행보다 봄날 입맛을 돋우는 달래가 밭에 지천으로 깔려 있어 이를 캐기 위해 발걸음은 밭에 묶어 논다. 같이 동행한 도반들의 손에는 봄 향기 가득한 봄 선물이 가득하다.
<나물캐러가는길-까망베르님>
<나물캐는 장면-까망베르님>
농장에서 나와 영월읍 방절리에 있는 선돌로 간다. 선돌은 영월 서강(西江)가의 절벽에 위치하며 마치 큰 칼로 절벽을 쪼갠 것처럼 형상을 이룬 곳이다. 높이 약 70m 정도의 입석으로 단종이 영월 청령포로 유배 가는 길에 선돌이 보이는 곳에서 잠시 쉬어 가며, 우뚝 서 있는 것이 마치 신선처럼 보였다고 하여 ‘신선암(神仙岩)’이라고도 한다. 푸른 강물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는 곳이다. 암벽에 ‘운장벽(雲莊壁)’이라는 글씨를 새겨 놓았다고 하나, 확인하지 못하고 한반도 지형을 보러 간다.
한반도 지형은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 옹정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전에는 영월군 ‘서면’이었던 것을 ‘한반도면’으로 행정구역 이름도 바꾸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 땅, 한반도를 꼭 빼닮아 명소가 되었다. 평창강(平昌江)이 주천강(酒泉江)과 합쳐지기 전에 크게 휘돌아 치면서 동고서저(東高西低) 경사까지 더해 한반도를 닮은 특이한 구조의 지형을 만들어낸 것 같다.
한 가지 흠은 ‘한반도 지형’ 너머에 거대한 시멘트공장의 고로(高爐)가 보이고, 고개를 우측으로 돌리니 ‘석회석’을 채취하고 난 산의 상처가 내 살가죽을 벗겨낸 것처럼 가슴을 쥐어뜯는다. 지금의 벗겨진 채 남아 있는 형태만이라도 빨리 복원하여 자연으로 되돌려 주었으면 한다.
<석회석 채취로 헐벗은 산>
단종의 자규사(子規詞)¹
달 밝은 밤 두견이 우는데(月白夜蜀魂湫 월백야촉혼추)
시름 못 잊어 누 머리에 기대어라(含愁情依樓頭 함수정의루두)
네가 슬피 우니 나는 듣기가 괴롭구나(爾啼悲我聞苦 이제비아문고)
네 울음소리 없다면 나도 근심이 없으련만(無爾聲無我愁 무이성무아수))
세상의 근심 많은 사람들이여(寄語世苦榮人 기어세상고로인)
부디 춘삼월 자규루엔 오르지 말게나(愼莫登春三月子規樓 신막등춘삼월자규루)
단종의 자규시(子規時)²
원한 맺힌 새가 한번 제궁을 나온 후( 一自怨禽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외로운 몸의 한 그림자가 푸른 산중에 있네(孤身雙影碧山中 고신척영벽산중)
잠깐의 잠조차 밤마다 이룰 수 없고(暇眠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깊은 한은 해마다 다하지 않네(窮限年年恨不窮 궁한년년한불궁)
소리 그친 새벽 봉우리엔 남은 달빛 밝은데(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피 뿌린 봄 골짜기엔 떨어진 꽃잎이 붉네(血淚春谷落花紅 혈류춘곡낙화홍)
하늘은 귀먹어 오히려 슬픈 하소연을 듣지 못하는데(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
어찌하여 근심어린 내 귀만 유독 밝은가(何柰愁人耳獨聰 하내수인이독청)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매산 철쭉제에 비바람 몰아치고 (0) | 2016.05.05 |
---|---|
신진도와 마도 (0) | 2016.05.02 |
모악산과 구이저수지 (0) | 2016.04.25 |
대청호 오백리 길(여섯 번째) (0) | 2016.04.21 |
외씨버선 길 도보여행 동행 기 (0) | 2016.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