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 물길 따라(두 번째-4)
(용산교∼관방제, 2022년 5월 28일∼29일)
瓦也 정유순
나주시 교동의 나주향교에서 가까운 거리에 나주읍성 영금문이 있다. 사적(제337호)으로 지정된 나주읍성은 고려시대부터 축조되어 남북으로 약3.53㎞로 평지에 조성된 긴 타원형 형태의 규모로 쌓았다. 동쪽은 동점(東漸)문, 서쪽에 영금(映錦)문, 남쪽에 남고(南顧)문, 북쪽에 북망(北望)문을 두었다. 일제강점기 때 동서남북의 모든 성문과 성루가 철거된 후 대부분 민가가 들어섰고 밭으로 경작되었으나 1993년에 남고문, 2006년에 동점문이 복원되었다.
<영금문>
서성(西城)문으로도 불리는 영금문은 2007년 발굴조사결과 지하에 유적이 잘 남아 있어 제 모습을 찾아 2011년에 복원하였다. 밖으로는 돌로 쌓은 옹성이 둘러있고 누각에는 暎錦門(영금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영금문을 복원을 하면서 ‘나주목여지승람’의 기록을 따랐다고 한다. 동학전쟁 때 금성산 월정봉에서 나주를 공격하던 농민군의 공격에 함락되지 않고 동학군과 영금문에서 협상했다고도 전해진다.
<나주목 관아의 북>
향교 길을 따라 나주목사 내아 쪽으로 향하다 보면 나주경로당 입구 옆에 수령 400년 이상 된 곰솔이 세월의 온갖 풍상을 이고 하늘로 꿈틀대는 모습으로 지금도 승천을 꿈꾸는 것 같다. 곰솔은 소나뭇과의 상록 침엽 교목으로 높이는 20미터 정도이며, 5월에 가지 끝에 노란색의 꽃이 피고 열매는 구과(毬果)로 다음 해 10월에 익는다. 솔잎이 곰 털처럼 거칠다고 하여 ‘곰솔’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바닷바람에 강하고 해변에 잘 자라 해송으로도 부르고 있으나, 중국에서는 잣나무를 해송(海松)으로 부른다.
<나주경로당과 곰솔>
나주목사내아(羅州牧使內衙)는 조선시대 나주목에 파견된 지방관리인 목사(牧使)의 살림집으로, 건물의 이름은 ‘금학헌’이었다. 언제 지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다만 대문 옆에 있는 문간채를 고종 29년(1892)에 만든 것으로 보아 살림집 역시 19세기에 지은 건물로 여긴다. 앞쪽에 퇴칸을 둔 ㄷ자형 집으로 앞면 3칸 규모이며, 현재 본채와 문간채만 남아 있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일본강점기 이후 군수의 살림 집으로 사용하면서, 원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다.
<나주목사 내아(금옥헌)>
내아의 주 건물인 금학헌(琴鶴軒)은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학처럼 고고하게 살고 자 하는 선비의 집’이라는 뜻이다. 이 집 옆에는 1980년대 태풍이 몰아치던 날에 벼락 맞은 팽나무가 두 쪽으로 갈라져 고사 직전이었으나, 나주시민들의 지극정성으로 갈라진 곳이 봉합되어 다시 소생하였다고 한다. 시민들은 이를 보고 영험한 금성산 기운을 받은 명당이자 나주목사가 살았던 금학헌의 기운이 살렸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믿음에서인지 최근 금학헌에서 숙박을 하거나 팽나무를 안고 소원을 빌면 좋은 일이 생겨난다고 한다.
<벼락 맞은 팽나무>
내아와 객사인 금성관 사이에는 나주목문화관이 있다. 나주목문화관은 983년 나주목이 된 후부터 1895년까지 나주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전시관이다. 나주는 고려 성종 때부터 1895년 나주 관찰부가 설치될 때까지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주목이 유지된 곳이다. 나주목문화관은 나주가 ‘천년고도 목사고을’ 이었음을 알리기 위해 설립한 전시관으로 옛 금남동사무소 (구 나주읍사무소)를 개조하여 만들었으며 2006년 10월 19일 개관하였다.
<나주목문화관>
나주목문화관 앞의 정수루(正綏樓)는 정완루(正緩樓)라고도 부르는데 나주관아(官衙)의 문이다. 1603년(선조 36)에 나주목사로 부임한 우복용(禹伏龍, 1547∼1613)이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1층의 양 측면만 벽체로 구성되어 있고 나머지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천장의 화려한 용머리 중 왼쪽 용은 여의주가 없고, 오른쪽 용은 여의주를 물고 있다. 2층 누각에는 큰 북과 편액이 걸려 있는데, 한국전쟁 때 분실된 북을 1986년 11월에 다시 설치한 것이다.
<정수루>
망화루(望華樓)는 나주객사 금성관의 외삼문(정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2층 문루(門樓)로 당시 전국에서 제일 큰 나주객사에 걸맞게 정문으로서 위용을 갖추고 있다. 세 칸으로 나누어진 망화루의 가운데 문은 주로 수령이, 좌우 쪽의 문은 일반 관리와 백성들이 출입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는 김천일 장군이 의병 출정식이 있던 곳으로 김천일 장군은 진주성전투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장열하게 전사했다. 갑오경장 때는 유생들이 단발령에 항거하였고, 일제강점기 때에는 항일학생운동이 벌어졌던 역사적 장소다.
<망화루>
금성관(錦城館)은 나주객사의 중심 건물이다. 객사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도 한다. 객사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으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에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금성관은 조선 성종(成宗) 때에 나주목사 이유인(李有仁)이 세웠다. 일제강점기에는 내부를 고쳐 군청사로 계속 사용했던 것을 1976년 원래 모습에 가깝게 복원하였다.
<금성관>
이후 나주목 금성관 복원 정비사업으로 건물을 가리고 있던 나주군 청사를 헐고 동익헌과 서익헌을 복원하였다. 건물은 앞면 5칸·옆면 4칸 규모의 팔작지붕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금성관의 정문인 2층짜리 망화루도 함께 만들었으나, 망화루의 현판과 내삼문은 남산시민공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금성관은 전남지방에 많지 않은 객사 중 하나로서 그 규모가 웅장하고 나주의 대표적인 역사문화유산으로 나주인의 정의로운 기상을 대표한다.
<금성관 전경>
나주객사에 정문 망화루 앞의 어느 식당에는 손님들이 줄을 선다. 1910년에 개업한 나주곰탕으로 유명하다는 집이다. 나주곰탕은 사골육수에 결대로 찢은 사태와 양지머리, 다진 파를 얹은 탕이다. 사골국물은 물에 소뼈를 넣고 오랫동안 끓여 거른 국물과 한 번 끓여낸 소뼈에 다시 물을 붓고 하얀 국물이 나올 때까지 푹 곤 국물을 섞어 사용한다. 오래 전에 나주의 5일장에서 상인과 서민들을 위한 국밥요리가 등장하였으며, 이것이 오늘날의 나주곰탕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주곰탕은 좋은 고기를 삶아 국물을 만들어 국물이 맑은 것이 특징이다.
<나주곰탕집>
나주곰탕으로 점심을 하고 자동차로 바쁘게 완사천으로 이동한다. 전라남도 기념물(제93호)로 지정된 완사천(浣紗泉)은 원래 작은 옹달샘이었는데 택지 조성을 하면서 샘 주위를 화강암석재로 가로 1.5m, 세로 1.5m, 높이 1m의 정방형 석벽을 쌓았다. 이 샘물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하며, 고려태조 왕건과 나주를 연결하는 시발점이 된 유적지다.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기 전 나주를 903∼914년 까지 10여 년 동안에 무려 네 차례나 내려오게 된다.
<완사천공원>
<완사천>
후백제 견훤(甄萱)과 마주한 어느 날 진(陣) 위쪽 산 아래에 오색 서운(瑞雲)이 있어 왕건(王建)이 가보니 샘가에서 아름다운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왕건이 물 한 그릇을 달라고 하자 처녀는 바가지에 물을 떠 버들잎을 띄워서 공손히 바쳤다. 급히 물을 마시면 체할까봐 천천히 마시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처녀가 바로 나주 토착세력인 나주오씨 집안 오다련의 딸이었다. 왕건은 처녀의 총명함과 미모에 끌려 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이 여인이 곧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부인이며 제2대 혜종(惠宗)의 어머니다.
<장화왕후 동상>
<완사천 등굽은 소나무>
나주종합체육공원을 지나 나주시 삼영동으로 접어들면 영산대교가 남쪽을 향해 뻗어나간다. 영산대교(榮山大橋)는 총길이 404m이고, 너비 16m이며, 1972년 준공되었다. 전라남도 나주와 영암·장흥·해남·완도·진도를 연결하는 내륙교통의 요충지로 하루 왕복하는 차량만 약 2만 대에 이른다고 한다. 다리 밑 공원에서는 이른 봄이면 홍어축제가 열린다. 다리 오른쪽에는 국내에서 유일한 내륙 등대인 영산포등대가 있으며, 약 100m 간격으로 영산교와 마주보고 있다.
<영산대교(아래)와 영산교(위)-네이버캡쳐>
영산포등대는 국내 유일의 내륙 등대로 일제강점기 영산포 선창에 1915년 건립된 등대로 수위 측정과 등대의 기능을 겸했다. 이 등대는 우리나라 내륙하천가에 있는 유일한 것으로 1989년까지 수위 관측시설로 사용되었다. 영산포는 나주평야의 쌀을 수탈해가는 전진기지였으며, 각종 선박이 왕래하면서 많은 수산물들이 1960년대까지 유통 되었다. 1970년대 영산강하구언이 건설되어 배가 드나들지 않게 되자 영산포는 포구로서의 역할을 잃었다.
<영산포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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