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 오백리 길(네 번째)
(신촌리→법수리, 2016년 3월 23일)
瓦也 정유순
새벽에 일어나 버스에 앉기 바쁘게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는다. 그리고 세 번째 걷기에 불참해서 그런지 버스에서 내려 출발점에 섰을 때 아주 낯선 곳처럼 두 번에 걸쳐 걸어온 길들이 좀처럼 연결이 안 된다.
대청호 오백리 길 세 번째(2016년 3월 9일) 길은 개인적인 해외여행으로 부득이하게 참여하지 못했으나, 오늘 네 번째 걷기 시작점이 대전시 동구 신촌동 신촌마을인 점으로 보아 세 번째 길은 대청호자연생태관 앞에서 시작하여 신촌마을 까지 걸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일기예보에 꽃샘추위가 온다고 해서 걱정도 했지만 계절은 역시 봄이다. 봄은 모든 생명들이 기지개를 펴며 생동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 부푼 희망을 안겨준다. 봄을 기다리는 사람은 추운 겨울이 지나고 두꺼운 옷을 벗어버리게 하는 따뜻한 훈풍을 바라는 사람도 있고, 꽃이 피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농촌에서는 봄소식이 전해오면 일 년 농사를 시작하는 농작물 파종 등 봄갈이가 더 바쁘다.
대청호 주변에는 1980년 담수가 되면서 물속에 잠긴 고향마을을 애타게 기리는 ‘애향탑’이 곳곳에 서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상 대대로 이어온 삶의 터전이 산업화의 이름으로 생긴 대청호의 물에 잠겨버렸으니 고향생각이 더 날 것이다. 국토의 분단으로 대한민국으로 내려온 실향민들은 조국이 통일되면 그래도 찾아갈 고향이라도 있다고 자위해 보지만, 물에 잠긴 수몰민들은 고향이 지척이라도 볼 수 없는 고향인지라, 석판(石板) 위에 마을의 내력을 소상히 적어 놓고 고향생각이 날 때마다 와서 읽어보는 것 같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을 따라 약 십 여리 걸어오니 봄의 전령 산수유가 반갑게 맞아주는 방아실입구(와정삼거리)가 나온다. 방아실입구는 ‘대청호오백리길 6구간(대추나무길)’이 시작하는 지점이다. 그리고 방아실지역은 수생식물학습원 등 대청호 수변공원이 조성된 곳이나, 들르지 못하고 이곳에서 잠시 숨을 고른 다음 국사봉으로 가기 위해 산길로 접어든다.
꽃봉 갈림길을 지나니 진달래가 손대면 툭하고 터질 것만 같다. 어떤 꽃은 성질이 급했던지 먼저 활짝 피어 어색하게 미소 짓는다. 작년에 열심히 지어놓은 말벌 집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고, 능선에서 바라보이는 대청호는 아직도 물안개가 옅게 깔려있다. 국사봉 바로 밑으로 하여 대전 동구 오동 쪽으로 내려와서 묘역(墓域)이 잘 정리된 호반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한다.
<꽃고비님 사진>
봄기운이 완연한 대청호반에서 도시락을 까먹는 것은 봄 소풍을 온 기분이다. 산과 물과 나무가 어우러져 입맛을 돋운다. 잔디밭에 앉아 있다가 일어서니 땀이 식어서인지 봄바람이 차갑게 느껴진다. 발길을 막 움직이는데 어느 산소 앞에는 할미꽃이 허리를 숙이고 꽃을 피운다.
대전시 동구 쪽 대청호 주변에는 은진송씨(恩津宋氏)와 회덕황씨(懷德黃氏)의 묘지군(墓地群)이 많은 것으로 보아 두 성씨의 집성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길가의 벚나무는 꽃망울을 터트릴 준비에 한창인 마을길 따라 내려오는데 “太山北斗(태산북두) 산적소굴”이란 표지석이 나오는데, 말 그대로 큰 도둑이 많았다는 것인지, 또는 마을이름인지 설명이 없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포장된 도로로 잠시 나왔다가 샛길로 들어선다. 길가의 죽은 나무는 자기 몸을 썩혀 각종 버섯이 자라도록 아낌없이 자연에게 바친다.
대청호에 담수되면서 서해안처럼 구불구불한 리아스식 호안(湖岸)이 만들어 졌다. 작년에 심한 가뭄으로 물이 많이 빠져 35년 동안 물에 잠겼던 마을들이 윤곽을 드러내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물이 만수(滿水)가 되지 않아 호안 비탈길을 만들어 가며 걸어본다. 가끔 신발이 흙에 잠겨 모래가 안으로 들어가 걷기를 방해하기도 한다.
<대청호 호안길-차리님>
걸을수록 현란한 곡선의 호안선(湖岸線)이 발길을 붙든다. 물이 빠져 말라붙은 수초사이로 도마뱀이 따사한 봄날을 즐기고, 패(기관지) 질환에 특효약으로 이름이 알려진 ‘곰보배추’는 밭을 이룬다. 괴물처럼 생긴 고목의 뿌리는 시간을 멈추게 한다. 능선을 넘어 매화와 산수유가 핀 농장에는 냉이가 지천인데, 주인은 “씨 사다 심은 것이니 캐지 말라”고 소리를 지른다.
다시 우측으로 방향을 트니 이곳이 어딘지 금방 알 것 같다. 능선 따라 펼쳐진 대추나무 밭은 충북 보은 땅임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대추나무 길을 따라 언덕으로 오르니 나무마다 가지치기를 하고 봄을 기다린다. 대추는 피는 꽃마다 낙화(落花)하지 않고 결실을 하여 ‘자손이 번성’하는 과실(果實)이라 하여 제사상에 첫 번째로 올린다고 한다. 대추농장에서 약 1km쯤 떨어진 충북 보은군 회인면 법수리 마을에서 ‘보은대추’ 한 봉지를 사면서 네 번째 걷기를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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