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천왕봉
(2020. 7. 18)
瓦也 정유순
삼복(三伏)더위와 장마가 만나 후덥지근한 날씨가 계속된다. 며칠 전 일기예보는 오늘도 비 온다고 했으나 아침부터 비 대신 햇볕이 뜨겁다. 속리산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버스는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도화리 천황사 앞까지 좁은 도로를 비집고 용케도 들어간다. 산촌(山村)마을인 도화리(桃花里)는 봄철에 복숭아 꽃이 장관을 이루어서 임경업 장군이 무예를 닦고 속리산으로 돌아가다가 도화동이라 불러 처음에는 도화동이라 불렸다. 일설에는 지형이 복숭아 같아 도화동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도화리 표지석-네이버캡쳐>
천황사(天皇寺)라는 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속리산의 최고봉의 이름도 의당 천황봉으로 알았으나 산 이름은 천왕봉(天王峯)이다. 혹시 일제가 지명을 바꿀 때 일본 천황과 글자가 똑같다는 이유로 이름을 일부러 천왕봉으로 바꾸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도화리도 일제강점기 때 이 마을에 큰 나무가 있어 대목리로 바꾸었으나, 2007년 8월 도화리로 명칭을 환원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댐고리, 아래대목골, 웃대목골 등이 있다. 아래대목골은 도화리의 아래쪽에 웃대목골은 도화리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천황사>
속리산(俗離山, 1058m)은 충북 보은∙괴산군과 경북 상주시에 걸쳐 있는 산이다. 속리(俗離)라는 이름은 784년(선덕여왕 5년)에 진표(眞表)가 이곳에 이르자 밭 갈던 소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저러한데 하물며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느냐.”며 속세를 버리고 진표를 따라 입산수도(入山修道)하여 유래되었다고 한다.
<속리산 천왕봉>
1970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속리산은 최고봉인 천왕봉(天王峯)을 중심으로 비로봉(毘盧峰)·길상봉(吉祥峯)·문수봉(文殊峯)·보현봉(普賢峯)·관음봉(觀音峯)·묘봉(妙峯)·수정봉(水晶峯) 등 8개의 봉(峯)과 문장대(文藏臺)·입석대(立石臺)·경업대(慶業臺)·배석대(拜石臺)·학소대(鶴巢臺)·신선대(神仙臺)·봉황대(鳳凰臺)·산호대(珊瑚臺) 등 8개의 대(臺)가 있다.
<속리산지도-네이버>
도화리에서 천왕봉까지는 2.7㎞로 최단 거리 코스다. 마을의 징검다리를 건널 때는 천왕봉에서 내려오는 물소리는 아침 독경(讀經) 소리 같다. 약 1㎞쯤 편하게 올라가다가 너덜길이 이어지고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되면서 발걸음도 무뎌진다. 몸도 숲속으로 숨기고 햇살은 나뭇잎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다. 소나무 등 침엽수에서는 피톤치드가 발산되어 이미 촉촉이 젖은 땀방울을 씻어 준다. 수피(樹皮)의 코르크층이 두껍게 발달한 굴참나무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로 솟는다.
<도화리 징검다리>
<굴참나무>
천왕봉 정상을 600여m 남겨 놓고 경사는 더 가파르다. 느린 걸음을 더 늦추며 중간중간에 호흡을 조정하며 정상에 당도한다. 돌무지로 이루어진 정상은 한사람 서 있기도 비좁아 순서를 기다리며 인증샷 하기도 버겁다. 최고봉인 천왕봉은 빗방울이 동쪽으로 떨어지면 낙동강, 북쪽으로 떨어지면 한강, 남쪽으로 떨어지면 금강으로 흐르기 때문에 삼파수(三派水)의 시발점이며, 백두대간과 한남금북정맥이 갈라지는 삼파맥(三派脈)의 지점이기도 하다.
<속리산 천왕봉>
가파른 바윗길을 조심조심 내려온다. 속리산의 지질은 화강암을 기반으로 하여 물의 침식(浸蝕)작용과 바람의 풍화(風化)작용에 의해 만들어지고 중력에 의해 낮은 곳으로 이동하여 딱딱하게 굳어진 변성퇴적암(變性堆積巖)이 군데군데 섞여 있다. 변성퇴적암은 깊게 페이고, 화강암은 날카롭게 솟아올라 발걸음 한걸음마다 여간 조심스럽다.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진 속리산의 속세가 훤히 보이는 헬기장에 당도하여 오전을 마무리한다.
<속리산의 연봉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 했던가. 뱃속에 뭔가 들어가자 올라올 때 안 보이던 것이 지금은 훤히 보이는 것 같다. 포만(飽滿)에서 오는 안정감이 시야를 넓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천왕봉 전방의 숲에서는 ‘꿩의 다리’가 소복 단장을 하더니, 내려갈 때는 ‘각시원추리’가 풀숲에 얼굴을 내밀고 갖은 아양을 다 떤다. 산은 올라가야 산이고, 물은 흘러가야 물이듯 속세를 떠난 속리산의 자연은 또 다른 면목을 보여준다.
<꿩의다리>
<각시원추리>
때론 급한 경사를 네발로 기어가듯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올라올 때 보다 한결 부드럽다는 생각에 몸이 가뿐해진다. 몇 고비 지나자 속리산의 여덟 개의 석문 중의 하나인 상환석문이 나온다. 돌의 규모도 장대하거니와 몇 개의 바위가 어우러져 지붕과 기둥 모양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통로도 저쪽이 훤히 보이는 곧은 길이 아니라 굽어 있는 까닭에 그 앞에 서면 시각과 생각마저 잠시 끊긴다. 석문 아랫부분 언저리에 ‘중석문(中石門)’이라고 문패처럼 새겨져 있는 이 문을 통과할 때 모든 근심을 내려놓아 본다.
<상환석문>
<중석문>
상환석문을 빠져나와 또 다른 바위를 넘어가면 상환암(上歡庵)과 학소대(鶴巢臺)가 나온다. 상환암은 신라 문무왕 10년(670년) 신라의 고승 해우가 지었다고 한다. 학소대는 상환암 맞은편 절벽 바위로 학이 둥지를 틀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아래 계곡에는 바위 아래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를 은폭동(隱瀑洞)이라 부른다. 은폭동은 고승 해우가 수행을 하는데 암자 앞 계곡의 폭포 소리가 매우 성가셨는데 별안간 바위가 무너져 폭포를 덮어버려 폭포가 바위 속에 숨게 되었다고 한다.
<상환암과 학소대(우)>
반상(盤床) 위로 낙수(落水) 하는 계곡의 물과 상환암 올라가며 계단 모서리에 새긴 글귀가 함께 어우러져 마음을 닦아준다. 세심정(洗心亭)부터 법주사까지는 2016년 9월에 개통한 세조길이다. 대국민 공모를 통해 이름이 결정된 세조길은 기존 탐방로 구간에 차량이 많이 통행하면서 먼지와 소음 등으로 민원이 발생하자 국립공원관리공단과 보운군청이 16억 원의 예산을 들이고, 법주사가 땅을 제공하여 새롭게 조성한 총연장 2.35㎞ 구간의 우회탐방로다.
<계단 모서리에 쓴 글귀>
<반상위의 낙수>
<세조길 입구>
세조길을 따라 시작하는 지점에 세조가 목욕을 하고 피부병이 나았다는 목욕소(沐浴沼)가 나온다. 조선 세조(世祖)가 법주사에서 국운의 번창기원을 위한 대법회를 연 후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데, 약사여래(藥師如來)의 명을 받고 온 월광태자라는 미소년이 나타나 “피부병이 곧 완쾌될 것이다” 하는 소리를 듣고 목욕을 마치고 보니 월광태자는 사라지고 몸의 종기가 깨끗이 없어졌다고 하여 목욕소라 불렀다고 한다.
<목욕소>
<눈섭바위>
우선 세조길은 딱딱한 포장길을 벗어난다는 것이 반갑고, 한적한 숲길을 걷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콧노래를 부르며 가벼운 걸음으로 탈골암 입구를 거쳐 태평교를 건너면 법주사 수원지다. 수원지 건너 수정봉에는 거북바위가 있는데, 당 태종이 중국의 기운을 조선으로 빼앗기는 것을 막기 위해 이 거북바위의 목을 자르고 등 위에는 탑을 세워 기운을 누르려고 하였으나, 후에 이를 안 사람들이 탑을 없에고 목을 다시 붙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법주사 수원지와 수정봉>
세조가 속리산 법주사에 와서 피부병도 낫고, 어린 조카 단종을 쫓아낸 것도 참회(懺悔)했다는 세조길을 벗어나니 바로 법주사가 나온다. 법주사는 553년(진흥왕14년)에 의신(義信)이 창건하고, 776년(혜공왕12년)에 진표(眞表)가 중창하였다. 절 이름을 법주사라 한 것은 창건주 의신이 서역을 갔다 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전소된 것을 인조2년(1624년)에 사명대사와 백암대사에 의해 다시 중건되고 몇 차례 보수와 증축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보수중인 법주사>
금강문(金剛門)과 사천왕문을 지나면 마당에는 법주사 팔상전(捌相殿)이 턱하니 버틴다. 국보 제55호(1962년 12월 20일)로 우리나라 유일의 5층 목조건물이다. 팔상전은 부처의 일생을 여덟 폭의 그림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八相圖 또는 捌相圖)를 보관하고 있는 사찰 안의 건물이다. 따라서 탑과 같은 기능을 하기 때문에 법주사 팔상전은 목탑으로 분류한다.
<법주사 팔상전>
법주사에는 동양 최대의 미륵대불이 있다. 높이는 33m로 최초의 불상은 신라 제36대 혜공왕 12년(776년)에 진표율사가 7년간의 불사 끝에 금동미륵대불을 조성한 후 1000년간 모셔오다가 1872년(고종9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당백전(當百錢)을 만들기 위해 몰수해 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는 독립에 대한 염원으로 시멘트 대불을 제작하였고, 1987년부터 청동대불로 조성하는 공사가 1990년까지 이루어 졌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식으로 인한 얼룩이 생겨 2000년부터 불상에 금박(金箔)을 입히는 개금불사(改金佛事)가 시작되어 2002년 월드컵 성공개최 및 세계평화를 발원하면서 금동미륵대불로 2002년 6월 7일 복원하였다.
<금동미륵대불>
또 하나의 보물은 법주사 당간지주(幢竿支柱)다. 당간이란 찰(刹) 또는 찰주(刹柱)라고도 불리는데, 일반적으로 절(寺)을 사찰(寺刹)이라고 하는 것은 절에 당간 즉 찰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법주사 당간지주는 고려 목종7년(1006년)에 조성된 것으로 당시의 높이는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고종3년(1866년) 경복궁 복원 때 당백전(當百錢)을 만들기 위해 몰수되었다. 1910년경 22m의 높이로 복원되었으며, 1972년 재복원하였다고 한다. 한편 당간이란 솟대와도 같은 기능을 갖게 되어 신성구역을 표시하기도 한다.
<법주사 당간지주>
법주사 경내 왼편에는 큰 바위 두 개가 서로 사랑을 하듯 몸체를 의지하며 비스듬히 누워 있다. 옆에 있던 신도에게 물어보니 수정바위라고 한다. 그리고 오른쪽 바위 안 밑으로 마애불의상(磨崖佛倚像, 보물216호)이 다른 암벽에 부조되어 있다. 높이 약6m의 큼직한 바위에 양각된 마애불은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아 있는 의상(倚像)으로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것 같고, 둥근 얼굴에 두툼한 입술, 큰 코와 기다란 귀 등은 고려 초기 마애불의 특징을 보여준다.
<법주사 마애불의상>
법주사 경내에는 통일신라 전형 양식인 평면 팔각형을 기본으로 간주석을 두 마리의 사자로 표현한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 국보5호)을 비롯하여 석련지(石蓮池, 국보64호),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 보물15호) 등의 국보와 보물 등이 즐비하지만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바라만 보고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고 쓰인 일주문을 빠져나와 돌아오는 길에 정이품송(正二品松)이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
<법주사 쌍사자석등>
<법주사 일주문>
천연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된 정이품송의 수령은 약 600년으로 법주사 소유로 되어 있다. 1464년 세조가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가던 가마가 아래가지에 걸릴 것 같아 염려하자 소나무는 가지를 번쩍 들어 올려 어가(御駕)가 무사히 통과하게 되어 세조는 이 소나무에게 정이품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수형(樹形)이 우산을 펼쳐 놓은 듯 아름답지만, 한때 솔잎흑파리 피해를 입어서 그런지 서쪽으로 뻗은 가지가 잘리고, 전보다 많이 노쇠(老衰)한 것 같아 보는 마음이 안타깝다.
<속리산 정이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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