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양평 물소리길 1(문화유적 길)

와야 정유순 2020. 2. 7. 02:22

양평 물소리길 1(문화유적 길)

(202024, 양수역국수역)

瓦也 정유순

   양평 물소리 길은 양평군을 대표하는 자연 친화적 도보여행 길이다. 양수역에서 용문역까지 60km에 이르는 이 길은 총 6개의 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코스마다 숙박 시설은 물론 몽양 기념관, 양평 5일장, 용문사, 상원사 동종, 등 다양한 관광지, 문화재, 체험 마을을 만날 수 있다. 양평 물소리 길은 태백산 검룡소에서 시작한 남한강, 실개천이 흐르는 흑천길 등이 시원한 바람과 맑은 물이 계속 흐르며 시골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특히 코스마다 인증스탬프를 날인(捺印)하는 도보인증 제를 실시한다.

<양평물소리길 코스>


   오늘은 제1구간인 문화유적 길(양수역신원역)을 나서기 위해 양평 물소리 길 시작점인 양수역에서 출발한다. 경의 중앙선 양수역(兩水驛)200512월 수도권 광역전철이 개통된 이후 현재는 수도권광역전철만 정차하고 있으며, 일부 급행열차가 출근시간대에 운행되고 있다고 한다. 양평군 양서면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접근성이 편리하다. 그러나 양수역이 위치한 지역은 양수리가 아니고 양서면 용담리다. 용담리(龍潭里)는 남한강이 마을을 돌아 흐르며, 마을의 큰 늪에 용이 있다 하여 용담리라 불렀다.

<양평물소리길 1코스>

<양수역>


   용담으로 흘러들어오는 하천이 가정천이다. 가정천(柯亭川)은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서 시작하여 부용리와 용담리를 거쳐 용담에 머물다가 남한강으로 유입되는 한강수계의 지방하천이다. 하천연장 5.7km, 유로연장은 8.79km, 유역면적 18.62이다. 유역 동남쪽에는 청계산이 있다. 하천 주변의 토지 대부분은 임야와 농경지로 이용된다. 하천의 경사도는 1/40~1/125로 비교적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가정천>


   가정천을 따라 용담리로 들어서면 <양수리성당>멀리 보인다. 양수리성당은 주보성인으로 <성 요한 세례자>를 모시고 있다. 2003128일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하여 20081224일 입당 미사를 봉헌한 양수리성당은 이 지역 출신 순교자인 이 아가타(두물머리 거주)와 유한숙(목왕리 동막골 거주, 1801427일 양근 관문 서쪽 큰길에서 순교)을 기념하고, 그분들을 본받으려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양수리성당>


   용담리를 지나면 부용리다. 부용리(芙蓉里)는 마을 앞 부용산의 이름을 따서 부용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가정, 더운우물께, 월계골, 상나무배기, 참나무정이, 교동을 합쳐 부용리가 되었다. 부용리에는 <독학 셀파 기숙학원>이 있다. 이 학원은 성적을 기준으로 학생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실력에 맞게 개인 맞춤 학습 생활 관리를 기본으로, 셀파들이 히말라야 등산대의 짐을 나르고 길을 안내하듯 학생들의 조력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부용리마을>


   논둑길을 지나면 목왕리가 나온다. 가정천이 동서로 흐르며 마을 뒤로는 산지가 위치하는 목왕리(木旺里)는 깊은 산속에 나무가 많아 이름 붙여진 곳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동막리, 사촌리 일부와 서시면의 신원리 일부를 합쳐 목왕리가 되어 양서면으로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양짓말, 절말 등이 있다. 양짓말은 양지쪽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절말은 옛날에 절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사촌(寺村)이라 불리기도 한다.

<목왕리 어느 집의 거위>


   목왕리에는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神道碑)임금이나 종이품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 앞이나 근처 길목에 세워 죽은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으로 1653(효종 4)에 세웠다. 화강암으로 된 직사각형 비좌(碑座)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이수(螭首)를 올렸다. 크기는 높이 360, 너비 110, 두께 42이고 근래에 비각을 건립하였다. 비문은 조경(趙絅)이 찬()하였고, 정규상(鄭奎祥)이 전액(篆額)을 썼다. 이 신도비 위로 약 300m 지점에 한음의 묘역이 있다.

<한음 이덕형 신도비>


   이덕형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어렸을 때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 15561618)과 막역한 사이로 많은 일화가 알려져 있다. 1580(선조 13) 20세의 나이로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3) 등을 거쳐 160242세 때 영의정에 올랐으며, 잠시 한직에 있다가 1608년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1613(광해군 5)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삭직(削職)되어 양근에서 53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영정은 신도비에서 동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영정각에 봉안(奉安)되어 있다.

<이덕형 영정-네이버캡쳐>


   신도비 옆 물소리길 인증대에서 패스포드에 날인(捺印)하고 목왕리 산길로 접어든다. 이곳에는 달구덩이산이라는 우리 토속적인 이름을 가진 산이 있다. 산 이름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휘영청 밝은 달이 떴다가 질 때는 이 산으로 풍덩 빠지는 것은 아닌지? 혹시 달빛을 좋아했던 이태백이 이곳에 와서 음풍농월(吟風弄月)이라도 했단 말인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실없이 해본다. 푹신한 낙엽 밟는 소리를 들으며 달구덩이에 빠진 보름달이 갑자기 화투짝 팔광 패로 연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목왕리 산길> 


   겨울 가뭄에 개천에 흐르는 물의 양은 적지만 살얼음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는 멀리서 오는 봄을 부르는 소리다. 목왕2리 마을회관 앞 개울 바위에는 <女岐沼(여기소)>라고 새긴 바위가 눈길을 끈다. 여기소란 어느 문헌에 하늘의 선녀가 머리를 감다가 빗을 빠트려 건지려다가 빠져 죽었다는 깊은 못[()]이지만 이곳이 그 여기소인지는 알 수 없다. 여기소란 못이 얼마나 깊은지 명주실 한 꾸리를 다 풀어서 들어가도 모자란다고 전해진다.

<여기소(女岐沼)>


   여기소를 지나 샘물고개로 가는 길목에는 어느 집 거위가 낯선 손님 경계하며 꺽꺽거리고, 길옆에는 한음 이덕형의 莎阜春帖(사부춘첩) 시비가 있다. ‘물은 흘러 온갖  떠나보내고(水送憂愁去)/구름은 복록 따라 일어난다네(雲隨福祿興)/운길산은 중은동에 이웃해 있고(雲吉隣中隱)/용진은 월계와 이웃해 있네(龍津接月溪)/골짜기에 만발한 복사꽃 덤(桃花春滿潤)/나그네 삶이려니 언제 또 볼까(幾見客來迷)’ 위 내용은 한음 이덕형이 사부촌에서 입춘첩을 쓴 6수의 시() 중 일부다.

<이덕형 시비>


   산길을 따라 부용산과 청계산으로 나뉘는 샘물고개를 넘는다. 부용산(芙蓉山, 366m)에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고려 시대에 어떤 왕비가 시집간 첫날 밤에 왕 앞에서 방귀를 뀌자 왕이 크게 노하여 이곳으로 귀양을 보냈다. 쫓겨난 왕비는 이미 아들을 잉태한 몸이었고 온갖 어려움 속에서 왕자를 낳아 키웠으며, 총명한 왕자는 어른이 된 후 어미의 사정을 알고 도성으로 올라가서 저녁에 심었다가 아침에 따먹을 수 있는 오이씨를 사라면서 외치고 다녔다.

<샘물고개>


   소문을 들은 왕이 소년을 불렀고 이 오이씨는 밤사이에 아무도 방귀를 뀌지 않아야 저녁에 심었다가 아침에 따먹을 수 있습니다.”라는 소년의 말을 듣고서 잘못을 깨닫고 왕비를 불렀다. 하지만 왕비는 궁궐로 가지 않고 이곳에서 살다가 죽었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산에 오르는 것이 금기시되어왔으며 산에서 땔감을 구하면 곧 죽는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부용산>


   샘물고개를 넘으면 바로 신원리다. 신원리(新院里)는 남한강이 마을을 따라 뻗어 흐른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야곡리, 분점리를 합쳐 신원리가 되어 양서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동이점골, 묘골, 풀무골 등이 있다. 동이점골은 묘골 동쪽의 마을로 옹기점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묘골은 월계 동쪽의 마을로 함양 여씨의 선대 묘소가 있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풀무골은 묘골 북쪽의 마을로, 야곡이라고도 불리며 대장간이 있었다.

<신원리 마을>


   묘골(묘곡)마을에는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1886.51947.7)의 생가와 몽양기념관이 있다. 몽양은 중국과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이 되자 안재홍(安在鴻), 정백(鄭栢) 등과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하여 통일된 독립 국가를 세우려고 주도하였으나 미 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했음은 물론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극우계인 한지근(韓智根)에 의하여 1947719일 암살되었다.

<몽양 여운형동상>


   이런 연유로 몽양은 그 의지가 왜곡되고 사상이 의심되어 한때는 금기시하는 인물이었으나,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이어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어 신원이 회복되었으며, 2011년에 생가와 기념관도 복원되었다. 지상 1층은 여운형의 생가이며, 지하 1층은 기념관으로 이용된다. 함양 여씨(咸陽 呂氏)가 양평에 입향한 1715(숙종 41)에 지어진 생가는 몽양이 출생한 곳으로, 부친 탈상 후 서울로 이사한 1908년까지 살았으며, 해방 전후에도 종종 내려와 지낸 장소다. 한국전쟁 중 소실되었다가 2001년 생가터가 정비되고 이듬해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몽양 생가>


   몽양기념관에는 여운형의 삶의 궤적을 따라 관람할 수 있도록, 출생과 애국계몽운동(1886~1913), 독립운동(1914~1945), 건국준비활동과 좌우합작운동(1945~1947), 서거(1947719)로 나눠 그의 생애에 관해 설명하고 관련 유물을 전시하였다. 여운형의 사진, 친필, 관련 도서들을 전시한 정관재(正觀齋), 여운형 좌상, 크로마키 촬영 공간, 추모 영상을 상영하는 영상실이 함께 있다. 같은 층의 매진 홀에서는 여운형과 관련된 다양한 기획 전시가 열린다.

<몽양기념관>


   몽양기념관 바로 앞에는 묘골애오와공원(妙谷愛吾窩公園)’이 있다. 묘골은 동네 이름이며, ‘애오와(愛吾窩)’나의 사랑하는 집이란 뜻이다. 몽양의 친필로 쓴 이 글귀를 돌에 새겨뒀다고 한다. 몽양길 길섶 돌 위에 새겨진 몽양의 어록(語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 우리 민족은 새 역사의 첫발을 내딛게 됐다. 우리는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들은 이 자리에서 잊어버리고 이 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여야 한다.”<1945년 해방 후 휘문학교 운동장에서 행한 첫 연설 중에서> 여러 어록 중에서 이 대목이 눈에 띈다.

<묘골애오와공원>

<애오와-몽양친필>


   <조선중앙일보>사장으로 재직할 때인 1936년에는 베를린올림픽 대회에서 마라톤을 제패하여 월계관을 머리에 쓴 손기정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 일제에 항거(신문사는 일제에 의거 강제 폐간)하고, ‘적의 심장부인 일본 도쿄에서 조선 독립을 외치던 몽양의 기개(氣槪)를 회상하고, 지금까지 미완의 장으로 남은 몽양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빌며 제1코스 종점이자 제2코스 출발점인 신원역으로 나온다.

<몽양과 함께> 

<남한강과 국도 제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