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열한 번째-3 完)

와야 정유순 2019. 12. 22. 06:16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열한 번째-3 完)

(가양대교보구곶리, 2019121415)

瓦也 정유순

   ‘길을 오래 걸으면 집이 가까워진다고 했던가? 지난 2월 한강의 발원지인 강원도 태백시 검룡소에서 출발한 한강 514길의 마지막 여정이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마조리 금성초등학교에서 시작한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하성면 시암리 쪽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촘촘한 철조망에 막혀 애기봉으로 방향을 돌린다. 금성초등학교는 1934년 일제강점기 때부터 간이학교와 분교로 이어오다가 195585일 초등학교로 승격되어 맥을 유지해 온다.

<금성초등학교>


   금성초등학교를 출발한 발걸음은 문터골마을을 가로지른다. 길가에는 언제 넘어졌는지 모르지만 반룡(蟠龍)모양의 죽은 소나무가 옆으로 누워 마을을 지킨다. 반룡은 용이 하늘로 오르기 전에 땅에 웅크리고 있는 형상이다. 아침이라 그런지 마을은 조용하기 그지없다. 요즘 어디에 가든 농촌에는 빈집이 자꾸 늘어나는 것 같다. 그리고 빈집을 볼 때마다 나를 키워준 고향이 마음에서 점점 멀어져만 간다.

<반룡(蟠龍)송>


   하성면 가금리에 들어서면 평화누리길 3코스로 접어든다. 가금리(佳金里)에는 깨우침을 주는 향나무가 있다. 조선 초 영의정을 지낸 박신은 마음을 수양하고자 이 향나무를 심었다. 그는 경건한 마음으로 학문에 전념하여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심성이 약하거나 어질지 못한 사람, 행동이 불미한 사람이 이곳에서 공부하면 어질고 착한 사람으로 거듭나 배움에만 전념하데 된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나무를 학목(學木)이라 부르며 모여들었다고 한다.

<깨우침을 주는 향나무>

<하성면 마조리 문터골마을>


   박신(朴信, 13621444)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문인이다. 정몽주의 문하생으로 1385(우왕11)에 문과에 급제하고,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자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세종 때 통진에 13년간 유배되었으며, 통진과 강화 갑곶진 사이를 왕래하는 사람들이 배에서 타고 내릴 때 물에 빠지는 고통을 보고 사재(私財)로 성동나루를 만들었다. 1432(세종14)에 유배에서 풀려나 1444년에 83세를 일기로 이곳에 묻혔으며, 박신을 모시는 화헌재(樗軒齋)라는 사당이 있다.

<박신 묘>


   하성면 가금리 임도를 따라 애기봉 가는 한적한 길로 들어선다. 길옆 나뭇가지 사이에는 이미 새끼들이 떠난 새들의 빈 보금자리가 지난여름의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국민과 함께 해병대와 함께’‘해병대가 있는 한 서부전선 이상없다라는 구호는 언제 보아도 믿음직스럽다. 든든한 당신들이 있어 우리는 항상 두 발 뻗고 안식에 빠질 수 있으니 어찌 고맙다 아니하리오. 긴 숨을 하얀 김과 함께 내 뿜으며 애기봉 정상으로 쉽게 다다른다.

<하성면 가금리 임도>

<새 집>

<애기봉 입구 해병대구호>


   정상의 우측에 있는 평화의 종은 세계만방에 울려 퍼질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 임진강(臨津江)과 한강이 만나는 파주시 교하(交河)는 물안개에 가려 시야가 흐리다. 임진강은 북에서 남으로 내리꽂고 한강은 남에서 북으로 치고 올라와 두 강이 하나가 되어 이곳에서부터 서해 하구까지 이어지는 조강(祖江)이다. 조강(祖江)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부터 서해안으로 흐르다가 유도를 지나 예성강을 가슴으로 안고 서해로 흘러간다.

<조강(한강하구) 지도>

<평화의 종>

<한강과 임진강의 해후>


   옛날의 조강에는 물건을 가득 싣고 삼개나루[마포(麻浦)]로 왕래할 선박들로 분주하였을 것인데, 지금은 종이배 하나 얼씬거리지 않는다. 휴전선(군사분계선)은 육지에 그어진 선으로 파주 사천강 일대에서부터 강원 고성을 잇는 경계선의 거리로 155마일이다. 그러므로 조강 사이에는 군사정전협정에 의한 휴전선은 없고 남·북의 군사적 필요에 따라 철책을 치고 방어적 목적으로 구분해 놓은 것이다.

<조강>


   크리스마스트리로 유명했던 애기봉 정상에는 전망대 건물이 들어섰고 조강 건너 북녘땅의 선전마을은 오늘따라 선명하다. 북서쪽으로 예성강 포구가 가물거리고 북동쪽으로 임진강 물살이 아른거린다. 동쪽으로는 한국전쟁 후 포구에 살던 사람들이 이주하여 사라진 마근포(麻近浦) 나루는 하성면 마근포리라는 이름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북한 개풍군의 선전마을>


   애기봉(愛妓峰, 155m)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흘러가는 곳에 솟아 있다. 병자호란 때 평안감사의 애첩 애기를 데리고 한양을 향해 피난길에 올랐으나, 감사는 강 건너 개풍군에서 청나라 군사에 의해 북으로 끌려갔고, 애기만 한강을 건넌다. 애기는 매일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일편단심으로 감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결국 병들어 죽으며, 임이 잘 바라보이는 봉우리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여 얻은 이름이다. 결국 애기의 한()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가지 못하는 일천만 이산가족의 한과 같다.

<애기봉>


   바람불면 입김이 닿을듯한 북녘을 뒤로하며 김포시 월곶면 조강리로 향하는 도중에 한재당이 나온다. 경기도기념물(47)로 지정된 한재당(寒齋堂)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 때 모함을 받아 28세의 나이에 죽은 이목(李穆)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홍살문과 외삼문, 내삼문 사당인 정간사(貞簡祠)를 일렬로 배치한 구조다. 1848년에 건립된 구()사당은 담장만 남아있고, 이목의 후손들이 1974년에 건립한 신()사당에는 위패와 숙종과 경종이 이조판서로 추증한 교지가 보관되어 있다.

<이목(李穆) 한재당>


   그리고 이곳에서는 김포시 주관으로 헌다례가 매년 6월 첫째 주 토요일에 거행한다고 한다. 헌다례(獻茶禮)는 우리의 차와 멋을 음미하고 한재 이목의 선비정신을 기리기 위해 차를 올리는 의식으로, 전국 차인(茶人)들이 의식에 올릴 찻잎을 따서 차를 만드는 제다실습(製茶實習)을 하고 첫 물차로 예를 올린다. 한재 이목(1471~1498)은 하성면 가금리에서 태어났으며,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을 받아 19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술 대신 차를 좋아했으며, 차의 경전이 되는 <다부(茶賦)>를 지었다고 한다.

<한재당과 묘역>


   월곶면(月串面)은 김포반도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북쪽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조강 넘어 개풍군과 접하고, 동쪽은 하성면·통진읍, 남쪽은 대곶면·양촌읍과 접하며, 서쪽은 염하(鹽河)를 건너 강화읍과 마주 본다. 김포반도에서 가장 높은 문수산(文殊山, 376m)이 면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고동저(西高東低). 서울강화 간 4차선 국도가 면의 동서를 관통하고 있으며, 국도가 지나는 군하리(郡下里)가 교통의 요지다.

<애기봉에서 본 문수산>


   월곶면 개곡1리 마을회관을 지나 개곡교에서 개화천을 따라 조강리 들녘으로 들어간다. 논에는 기러기를 비롯한 철새 떼들이 노닐다가 가끔은 하늘로 날아 군무(群舞)를 춘다. 개화천은 김포시 통진읍 귀전리에서 발원하여 4남짓 흐르는 작은 하천이지만 한강의 그 많은 지류(천) 중에 마지막으로 유입되는 소하천이다. 한강 변으로 제방을 쌓기 전에는 한강의 본류로 조강포가 있었으나 지금은 주변에는 농경지가 잘 발달하였다.

<개화천>

<새들의 휴식>


   애기봉 아래 조강포(祖江浦)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큰 포구였고, 강 건너 개풍군 조강포와 상호 배로 왕래하며 번성했던 곳이다. 조강을 기점으로 위로는 임진강과 한강이 있고 아래로는 북한 예성강과 염하와 연결되었으며, 서해안의 밀물과 썰물이 조강에서 만나는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 강을 김포에서는 할아버지 강이라고 하며, 기록에는 삼기하(三岐河)로 나와 있다. 조강포구는 세곡선과 화물·여객선이 정박했던 터미널이다.

<조강포>

<비상(飛翔)>

<군무(群舞)>


   강을 건너기 위한 사람들과 장사꾼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했으며, 세곡(稅穀)을 실은 조곡선(租穀船)이 한강을 거슬러 한양으로 가기 위해 물때를 기다리며 벌였던 축제가 <조강 치군패>. 삼국시대부터 1953년까지 이어졌던 조강 치군패의 특징은 농업에서 태동한 농악과는 다르다. 어업과 포구시장, 용왕제와 연관된 물의 문화요 포구문화다. 치군패는 조강포구의 풍성한 경제상황과 맞물려 성행했던 유일한 포구문화의 민속예술이다.

<조강 치군패-네이버캡쳐>


   외롭게 서 있는 조강포 표지석을 뒤로하고 문수산성으로 이동한다. 사적 제139호로 지정된 문수산성은 강화도의 갑곶진을 마주 보고 있는 문수산(文殊山)의 험준한 정상부에서 서쪽 산줄기를 따라 해안지대로 이어지는 산성이다. 1694(숙종 20)에 구축한 것으로, 강화 갑곶진(甲串鎭)과 마주 보는 김포 쪽에 위치하여 갑곶진과 더불어 강화도 입구를 지키는 성이다. 이후 1812(순조 12)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고, 1866(고종 3)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군()과의 격전으로 해안 쪽 성벽과 문루가 파괴되었다.

<문수산성>

<문수산성 북문>


   그리고 문수산(376m)은 백두대간 속리산에서 한남금북정맥이 뻗어 나와 경기도 안성시 칠장산(七長山)에서 다시 북서쪽으로 뻗어 김포시의 문수산(文殊山)으로 이어지는 한남정맥의 끝점이다. 이 정맥을 이루는 주요 산은 <산경표>에 구봉산(九峰山석륜산(石倫山석성산(石城山광교산(光敎山오봉산(五峰山수리산(修理山오자산(五子山소래산(蘇來山주안산(朱安山원적산(元積山경명산(鏡明山북성산(北城山가현산(歌絃山약산(藥山문수산 등으로 기록되었다.

<문수산성 도-네이버캡쳐>


   월곶면 보구곶리(甫口串里)는 김포시 서북단(西北端)의 자연마을이다. 서쪽으로는 염하강을 건너 강화읍 연미정이 코앞이고, 북으로는 용의 여의주 같은 유도가 있으며, 한강 건너에는 북한의 개풍군이 마주한다. 이곳이 바로 한강 물길이 시작하여 천삼백 리 길이 끝나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 하구(河口). 마을 길을 따라 강변으로 더 가까이 다가서서 볼 수도 있지만, 한강과 서해가 만나는 곳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강화도 강화읍 연미정으로 강화대교를 건너 자리를 옮긴다.

<보구곶리 마을>


   강화읍 용정리를 지나 월곶리에 있는 연미정에 올라서니 한강하구의 유도가 선명하다. 유도(留島)는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에 위치한 섬으로 거의 바다와 가까워지는 기수역(汽水域)에 있으며, 민통선 안쪽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환경이 잘 보존되었고, 저어새의 서식지다. 유도는 까마득한 옛날 홍수에 떠내려오다가 이곳에 머물렀다는 전설과 함께 머물은섬>머루무섬이 됐다고 전해온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농가가 두 채 있었고 농사도 지었다고 한다.

<연미정>

<한강하구의 유도>


   인천유형문화재(24)로 지정된 연미정(燕尾亭)의 최초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고려 제23대 왕 고종이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면학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뒤 조선 시대 삼포왜란 당시 왜적을 무찌르고 1512년 함경도 지방 야인(野人)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국가에 공로가 많은 황형(黃衡, 1459~1520)에게 조정에서 세워 하사하였다고 하며 지금은 후손이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장무공 황형장군 택지비>


   옛날 서해에서 서울로 가는 배는 이 정자 아래에서 만조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강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썰물 때는 물이 빠져나가는 흐름이 눈에 보일 정도로 물살이 빠르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 줄기는 염하강으로 흐르는데 모양이 마치 제비 꼬리 같다 하여 연미정이라 이름 붙었다. 연미정의 달맞이는 강화 8경의 하나다. 그리고 애기봉에 세워진 우리는 조국의 총끝! 칼끝!’은 과연 어디일까? ()

<우리는 조국의 총끝! 칼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