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선 155마일을 걷다(네 번째)
(양구, 2015. 8. 22∼23)
瓦也 정유순
며칠 전부터 포탄이 오고가고 분위기가 심상찮다. 오늘도 접경지역을 지나 갈 수 있나하는 걱정뿐이다. 아침 일찍 양구군 동면 월운리에 있는 ‘피의 능선 전투전적 비’ 앞에서 묵념을 하고 일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월운저수지 제방 길과 그 밑으로 이어진 논길을 따라 아침 이슬에 발목을 적시며 팔량리에 있는 ‘펀치볼 전투전적 비’ 앞에서 다시 묵념으로 38도선 이북인 이곳에서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치열했던 공방전으로 희생된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며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다시 생각한다.
‘피의 능선 전적 비’는 한국전쟁 당시 보병 5사단 36연대가 미 2사단에 배속 되어 북한군 제2군단 및 제5군단 예하 4개 사단과 5일 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적군 1,480여명을 사살하고, 70명을 생포하여 탈환한 전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격전지 입구인 동면 월운리에 이비를 2001년 6월에 양구군과 백두산부대, 참전 36전우회가 세웠다고 한다.
‘펀치볼 전투전적 비’는 1951. 8. 29∼10. 30일 까지 가칠봉, 피의 능선, 1,211고지, 무명고지 일대를 중심으로 한 전투에서 육군 제3사단, 제5사단 및 해병 제1사단과 미 제2사단, 제7사단, 제25사단, 제45사단, 해병 제1사단 용사들이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용감히 싸우다 산화한 피나는 조국애와 영웅무쌍한 투혼을 천추만대에 길이 남기고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958년 3월에 육군 제3군단에서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접경지역을 접근할 수 없어 부득이 일정을 바꿀 수밖에 없다. 당초 계획은 ‘역사와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곳’ 양구군 방산면 송현리 ‘두타연 계곡’을 가려 했으나, 발길을 돌려 대암산 솔봉 광치계곡의 옹녀폭포 까지만 가고 오후에는 인제 백담사로 바꿨다.
광치계곡 입구에는 자연휴양림 푯말도 보이고 ‘소지섭의 길’ 조형물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소지섭의 길은 지난 반세기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신비의 비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곳 DMZ 일대를 배경으로 2010년도에 포토에세이집(소지섭의 길)이 출간되면서 자연경관이 뛰어난 6개코스 51km가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광치계곡도 1951년 4월에 적 12사단과 국군 제5사단이 치열한 공방전을 실시하여 아군이 승리함으로써 전술적 요충지인 인제(원통)지역을 재탈환하는데 결정적 여건을 조성한 현장이라고 한다. 바쁘고 혼탁한 도심 속 일상을 벗어나 잠시나마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으로 계곡에는 다래가 익어 성큼 가을이 왔나 싶고, 길목에는 노루와 호랑이 모형이 실물 같아 정겹다. 바위 틈새로 힘차게 쏟아지는 옹녀폭포의 물줄기도 밑의 강쇠바위가 강하게 받쳐준다.
옹녀폭포는 옹녀와 변강쇠가 금강산으로 가던 중 이곳에서 정분을 나누다가 이를 보고 크게 노한 산신령의 지팡이에 얻어맞아 옹녀는 그 자리에 엎어져 바위가 되었고 변강쇠는 50m 지점 아래에 굴러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엎어진 바위 가운데 골로 물이 흘러 떨어져 폭포가 되어 옹녀폭포라고 한다. 또 그런 연유인지는 몰라도 예부터 광치계곡을 연애 골로 부르고 있다고도 한다.
오후에는 인제 용대리로 이동하여 백담사로 간다. 이 사찰은 신라 진덕여왕 원년(647년)에 자장율사가 이곳에 창건하였고, 설악산 대청봉에서 절까지 작은 담(潭)이 100개가 있는 지점에 사찰을 세웠다하여 ‘백담사’라고 하는데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57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독립 운동가이며 시인인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 8∼1944. 6)이 수도 정진하던 곳으로 사찰 곳곳에 만해의 흔적이 어려 있다. 만해는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며 ‘불교유신론’으로 개혁을 시도하였고 ‘님의 침묵’ 등 저항문학활동에 앞장섰다.
만해당 앞의 동상에는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임만 임이 아니라 그리운 것은 다 임이다)라고 새겨 있는데 이는 만해의 시집 ‘님의 침묵’ 서문에 해당하는 ‘군말’에 나오는 글이다. 만해기념관, 만해교육관, 만해연구관, 만해수련원 등 만해의 이름을 딴 전각들이 많다. 그리고 삼일운동 33인중 유일하게 변절하지 않은 분으로 만해기념관에는 그의 사상과 정신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제12대 대통령이 머물렀던 곳입니다’라고 표시된 곳이 있는데 혹시 만해의 정신이 훼손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백담사로 올라 갈 때는 백담마을에서 운영하는 버스로 갔으나 내려 올 때는 20여리 백담계곡을 두발로 걸어왔다. 백담사 앞 하천에는 바닥에는 누가 쌓았는지 수천(?) 개의 돌탑들이 장관을 이룬다. 비가 오면 모두 떠내려 갈 것 같은 아주 작은 탑이지만 만약 씻겨 내려간다면 적은 정성과 소원을 담아 또 쌓아져 아름다운 장관이 계속 이어질 것 같다.
내려오는 길이 좁아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비껴서야 했지만, 맑은 물이 흐르는 소리가 청량하고 단전 깊이 들어오는 공기는 무거운 몸을 공중으로 붕 띄우는 것 같다. 자연이 빚은 계곡의 바위들은 천상의 예술이다. 하천바닥에 반쯤 물에 잠겨 있는 조각품에 「와야바위」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싶다.
주민대피령이 양구지역은 해제되었다고 하나 접경지역은 출입이 통제되어 펀치볼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을지전망대를 가지 못하고 펀치볼 둘레 길만 걸을 수 있어 그나마 퍽 다행이다. 펀치볼은 한국전쟁 때 종군기자가 이곳을 보고 분지 형으로 큰 화채그릇을 닮았다하여 Punch bowl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주변에 가칠봉 대우산 도솔산 등으로 둘러싸여 양구군 해안면(亥安面) 일대가 분지인 샘이다.
그리고 해안면은 처음에는 바다 해(海)자를 썼는데 뱀이 우글거려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어 유명한 스님을 모시고 지역사정을 소상하게 말하자 그 스님이 뱀과 상극인 돼지를 말하며 돼지 해(亥)로 바꾸어 쓰라고 알려주었다고 하는데, 그 때부터 신기하게 뱀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땅이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어 이곳 쌀은 경기도 이천 쌀보다 더 비쌌다고도 하며, 지금은 사과 인삼 등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데, 시레기가 인기 있는 특산품이란다.
아침에 안개가 자욱하여 내심 걱정도 했으나 전쟁기념관 앞에 도착하니 시야가 트인다. 전쟁기념관에는 한국전쟁 당시 피의능선 전투, 도솔산 전투 등 펀치볼을 중심으로 치열했던 상황들이 실제무기와 조형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이북5도만 알고 있는 북한의 행정구역도가 9개도로 표시되어 있는 게 눈에 띤다.
‘만대벌판 길’을 따라 둘레 길로 접어드는 길은 양옆으로 인삼밭이 붉은 꽃을 내밀며 도열하고, 처서의 태양은 뜨겁다. 북쪽 가칠봉의 GP는 북녘을 주시한다. 산자락에는 '마티라'라는 노란 꽃이 무리지어 있고, 박달나무 보다 더 육질이 강하고 잎을 물에 풀면 푸른색이 우러나는 물푸레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버섯들이 무리를 이룬다. 그리고 민통선을 지키는 철조망은 철통경계를 약속한다.
도솔봉은 여인이 곱게 단장하고 누워 있는 자태로 이곳의 안녕을 지킨다고 하는데, 특히 이곳 성황당은 여자가 제를 올리면 여신이 질투를 하기 때문에 여자는 접근이 불가하다고 한다. 숲 터널로 숨 가쁘게 오르내리며 ‘오유 밭길’을 따라 내려오니 5시간의 산행이 끝난다. 내려오는 길목에는 야생화단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이곳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을 내어 여유 있게 왔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는 길에 양구읍에 있는 박수근화백의 미술관에 들른다. 1914년에 양구에서 태어나 가난과 질병의 질곡 속에 1965년 52세의 아쉬운 삶을 살다간 생애였으나, 1970년대 박완서의 장편소설 ‘나목’에 박수근과의 교감이 소개 되면서 사후에 더 유명해진 화가다.
예술은
고양이 눈빛처럼
쉽사리 변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 깊게 한 세계를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박수근-
화가의 사후 50주년 추모 특별전 <뿌리 깊은 나무, 박수근,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가 8. 30까지 열려 전시장을 돌아보았으나 시간상 제3전시장을 보지 못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마냥 무겁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 꽉 막혀 더디기만 하다.
봄부터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메르스)이 서부전선으로 가는 길을 방해하더니, 이제는 남북 간 일촉즉발 긴장이 중부전선으로 가는 길을 수정하게 한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가 매 순간순간 부딪히며 만나는 게 운명인 것을…, 다 걷고 싶고 보고 싶지만, 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세상일 인 것을…, 속는 줄 뻔히 알면서도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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