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에서 새 해를 품다
(2016년 12월 31일∼2017년 1월 1일)
瓦也 정유순
오늘은 송구영신(送舊迎新)을 하기 위해 전남 진도로 새벽길을 나선다. 공중화장실이 어느 수준 높은 미술관 같은 군산 고속도로휴게소에 잠깐 들렀다가 뻥 뚫린 고속도로를 질주하여 진도대교 건너기 직전의 식당에서 조금 이른 점심을 하고 진도의 동남쪽에 있는 접도로 진입한다.
<접도안내도>
보배의 섬으로 잘 알려진 진도(珍島)는 제주도 거제도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 큰 섬이다. 인구는 3만 3천여 명(2013년 기준)이 거주하는 섬이지만 기름진 농토가 많아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 보다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더 많다고 한다. “1년 농사를 지으면 3년을 먹고 산다”고 하여 고려 성종 때는 “기름진 땅”이라는 뜻의 옥주(沃州)라고 불리기도 했다.
<진도의 옥토>
접도(接島)는 진도와 가까이 붙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은 연도교가 놓여 있어 섬 같지 않은 섬이다. 과거에는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운 오지였으나 1987년에 건설된 접도대교가 개통되면서 진도에서 배를 타지 않고 갈 수 있는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섬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요즘은 정보화 마을과 어촌체험 마을로 선정이 되어 뭍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여미사거리 이정표>
접도에 들어서서 교행이 어려운 남망산 길을 따라 산을 넘어 여미주차장에 도착하여 트레킹 점검을 다시 하고 산행 제2코스인 말똥바위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파도가 철석이며 반갑게 맞이하여 숲속을 거닐다가 해변바위에 나가 밤새 힘들게 어둠을 삼킨 파도와 잠시 해후한다.
<해안누리마당 표지>
다시 숲길로 접어들어 맨발체험로를 지나 여미사거리까지 단숨에 올라가 잠시 숨을 고르고 말똥바위로 올라간다. 말똥바위는 “옛날 배를 타고 이곳을 지나면 말 등에서 둔부로 이어진 바위모양 끝 소나무 아래로 네 덩이의 바위덩어리가 떨어져 있는데, 그 모양이 말이 배설한 똥처럼 보인다 하여 말똥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말똥바위에서>
말똥바위 정상에서는 시야가 확 트인 바다 위로 밭고랑처럼 양식장 모습이 넓게 펼쳐진다. 말똥바위 끝 지점에는 몇 가닥의 줄이 걸쳐 있고 그 옆에는 ‘추락주의’라는 푯말이 끝으로 다가설수록 다리를 휘청거리게 하고, 맞은편 솔섬바위는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말똥바위 앞 바다>
<말똥바위에서 본 솔섬바위>
다시 말똥계곡을 통해 작은여미 쪽으로 내려오니 <대도전촬영지>라는 작은 푯말이 보인다. 그러나 윤백남(尹白南, 1888∼1954)의 소설 대도전(大盜傳)을 영화로 찍은 것인지 아니면 방송국의 다른 프로그램을 찍은 것인지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 푯말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한다.
<솔섬해안 이정표>
섬이나 해안 등 바닷가를 걸을라치면 바람과 물이 빚은 자연의 예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수 억 만년을 바위에 부딪치며 깎고 다듬으며 자연의 손으로 빚은 바위들은 때로는 용이 되고, 때로는 각양각색의 형상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해안 길은 표창 같은 각진 돌들이 하늘을 향해 서 있어서 걷기에는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솔섬해안길>
조심조심 해안 길을 따라 솔섬바위 올라가는 계단을 찾아간다. 계단이 놓여 있는 각도는 대략 60°를 넘는 가파른 계단이다. 숨을 헐떡이며 오르는데 잠깐 밑을 내려다보니 아찔하다. 겨우 기어 올라가 솔섬바위 정상에 오른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실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씻어준다.
<솔섬바위 끝자락>
<솔섬바위와 말똥바위 사이의 바다>
솔섬바위 끝 쪽으로 하여 다시 솔섬해안으로 내려와 여미사거리로 방향을 잡는다. 해안을 벗어나자마자 동백나무 숲이 터널을 이룬다. 이미 성질 급한 동백꽃은 꽃망울을 터트린다. 내가 동백꽃을 좋아하는 이유는 꽃이 질 때 아무 미련 없이 꽃송이 채 뚝 떨어지기 때문이다. 물러날 때를 몰라 망설이며 주접을 떠는 사람들을 보면 동백꽃을 보고 배우라고 하고 싶다.
<동백나무 터널>
동백 숲 터널을 통과하여 여미사거리를 지나 되돌아 여미주차장으로 돌아오는데 팽나무 한 그루는 멀리 바다를 응시한다. 이제 오늘의 대미를 장식할 일몰을 보기 위해 세방낙조전망대로 서둘러 이동하는데, 주지도는 엄지손가락을 우뚝 새워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주지도>
그러나 하늘에는 구름이 끼어 맑은 하늘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리고 구름 낀 하늘보다도 세방낙조를 향한 차량행렬이 마음을 더 급하게 한다. 수평선 운무(雲霧) 위로 붉은 태양이 잠깐 얼굴을 보여 급히 차에서 내려 전망대로 뛰어 갔지만 야속한 태양은 금방 두꺼운 구름 속으로 숨어 버린다.
아쉬운 마음에 세방낙조전망대에 게시해 놓은 ‘낙조 사진’으로 대신한다. 그리고 구름 너머로 지는 해를 보며 금년의 모든 애환을 함께 보내고 내년의 찬란한 출발을 기대해 본다. 일몰은 오늘의 끝이 아니라 풍성한 내일을 기약하는 우리들의 삶을 저축하는 것으로 생각해 본다.
<세방낙조 사진>
한 해 마지막 날을 보낼 숙소가 있는 우수영유스호스텔로 향한다. 우수영(右水營)은 조선 때 왜구가 자주 출몰하는 전라도와 경상도에 수군절도사가 주재하는 진을 설치한 곳이다. 서울에서 볼 때 서쪽이 오른편이라 우수영, 동쪽이 왼편이라 좌수영이라 하였고, 우수영은 해남에 좌수영은 경남 통영에 설치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백두산 쪽에 머리를 둔 좌우개념으로 서쪽이 우수영이 되고 동쪽이 좌수영이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올 해 마지막 만찬을 하기 위해 울돌목을 건너 진도대교 해남에 있는 식당으로 자리를 잡는다. 울돌목은 해남 화원반도와 진도 사이에 있는 해협(海峽)으로 물살이 빨라 흐르는 물소리가 ‘울음소리 같아’ 붙여진 이름으로 명량(鳴梁)으로 불리는데, 연륙교(連陸橋)인 진도대교가 들어서기 전 까지는 이곳에서는 도선을 이용해야만 진도에 들어 갈 수 있었다.
<진도대교 야경>
오늘 찾아간 식당은 2008년 1월 16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다녀가면서 남긴 글씨 “尙有十二(상유십이) 微臣不死(미신불사)”라는 글씨가 눈에 띤다. 이 글은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자기를 죽이려 했던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 있는 내용이다. 이는 “죽을힘을 다하여 막아 싸우면 아직도 할 수 있습니다. 전선(戰船)이야 비록 적지만 신이 죽지 않았사오며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하리이다”라는 숨은 뜻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글씨>
임진왜란 때 명(明)의 심유경(沈惟敬)과 왜의 고니시 유키나와(小西行長)가 한강을 중심으로 조선분할(朝鮮分割) 협상이 결렬되고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발하자 옥고에서 풀려나 백의종군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은 장병들에게는 “必死則生(필사즉생) 必生則死(필생즉사)” 정신으로 무장하여 왜선(倭船) 130여척을 물리쳐 전쟁의 승기를 잡았던 역사적인 현장이 울돌목이다.
<진도대교와 울돌목(명량해협)의 여명>
야경이 더 아름다운 진도대교를 바라보다 보신각 ‘제야의 종소리’를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 6시 반에 해돋이를 보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사장교(斜張橋)인 진도대교(길이 484m, 폭 11.7m, 1984년 10월 완공)를 건너 진도타워로 간다. 진도타워는 ‘이순신명량대첩승전광장’ 옆에 명량해협(울돌목)을 굽어보며 높이 솟아 있다.
<진도타워>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에는 경찰들이 일찍 나와 진입차량을 통제하며 교통정리에 여념이 없었고, 가파른 비탈길을 따라 새해 첫날 첫해를 보러 명량대첩승전광장으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많이 모여든다. 일부는 진도타워로 올라가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는 광장 가장자리에 마련된 전망대에서 자리를 잡는다.
<울돌목의 여명>
영상의 기온을 유지하는 남쪽이라고는 하지만 새벽은 겨울답게 제법 춥다. 찬 기운은 옷 속을 헤집고 들어와 몸을 찌른다. 해 뜨는 방향의 바다는 여명이 밝아오는데 주변은 옅은 안개가 자욱하다. 그리고 진도대교 밑의 울돌목은 물살이 설설 휘감기며 빠르게 흐르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다.
<울돌목의 여명>
해는 구름 밑으로 조금 얼굴을 내밀다가 짙은 구름 속으로 숨으며 좀처럼 나오질 않는다. 얼굴을 내밀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리며 조용히 나의 소원을 빌어본다. “금년 한 해는 그 누구든 욕심을 버리고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가 해야 할 몫을 다하게 하소서! 서로 용서하며 서로 사랑하는 세상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젊은이들이 기를 펴는 젊은 세상이 되게 하소서!”
<진도울돌목의 일출>
조반을 하고 운림산방으로 이동하여 바로 옆에 있는 첨찰산쌍계사(尖察山雙溪寺)에서 새해 첫 일정을 시작한다. 쌍계사는 해남 대흥사의 말사로 857년(신라 문성왕17) 도선(道詵)이 창건하였으며, 절 양옆으로 시냇물이 흘러 쌍계사로 불렀다고도 한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맞배지붕으로 석가모니불 등 삼존불이 있으며,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1호(1985년 2월 25일)로 지정되었다.
<첨찰산쌍계사 대웅전>
쌍계사 담장 쪽문을 열고나오니 바로 운림산방이다. 운림산방(雲林山房)은 남화의 대가였던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8∼1893)이 1856년 9월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타계하자 고향에 내려와 초가를 짓고 이름을 운림각이라 하였고 거실은 묵의헌이라고 하였다. 마당에는 연못을 만들고 다양한 화훼와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리고 운림산방이란 이름은 첨찰산(尖察山, 485m) 주위에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지는 깊은 산골에 조석(朝夕)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룬다 하여 지었다고 한다.(*)
<운림산방>
그 후 허련이 사망하고 아들 등 가족들이 다른 사람에게 매각하고 떠나면서 옛 모습을 잃어버리자 손자가 다시 매입하였고, 그의 다른 손자인 남농 허건이 1982년에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산방으로 가는 길목에는 제법 큰 연못이 5각으로 되어 있고, 중앙에는 둥근 작은 섬에 배롱나무 한 그루를 심어 중앙을 나타낸다. 이는 고대에서부터 내려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가 난다)의 사상이 배려된 듯싶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고택이나 사찰의 정원에는 이런 방식이 많이 채택되어 있다.(*)
<운림산방과 연못>
남도전통미술관 옆으로 하여 잔디마당을 지나 연못을 따라 들어가면 소치가 그림만 그리던 다섯 칸 팔작지붕의 (ㄷ)자형 기와집이 운림산방이다. 첨찰산을 배산(背山)으로 하고 사천저수지를 임수(臨水)로 하여 터를 잡은 것 같다. 뒤로는 살림을 하던 집이 있다. 안채는 일(一)자형 다섯 칸 초가집으로 중앙의 안방 앞쪽으로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안채 전면 우측으로는 소치가 머물던 사랑채가 있는데 네 칸 규모의 일(一)자형 초가집이 있다.(*)
<살림집>
운림산방에서 소치의 숨결을 확인하려는 듯 툇마루에 앉아 여러 곳을 기웃거리다가 이웃에 있는 소치기념관으로 간다. 1980년에 세워진 기념관에는 5대째 운림산방의 화맥(畵脈)을 잇는 상세한 가계도가 걸려 있다. 그리고 한국화(6점)와 서예(9점), 사군자(8점), 민속유물(176점), 수석(95점), 고서(33점), 복사품(97점)이 전시되어 있다. 남종 문인화의 대가인 소치와 아들 미산 허형(米山 許瑩), 손자 남농 허건(南農 許楗)의 삼대작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표시는 정유순의 “진도 찍고 목포를 가다(2016, 10)”에서 인용>
<소치기념관>
<운림산방 화맥>
<전시실 내부>
운림산방을 돌아보고 다음 행선지인 용장산성으로 간다. 용장산성(龍藏山城)은 고려 때 만들어진 곳으로 몽고군에 항복한 고려군에 반기를 든 삼별초의 기지가 있던 곳이다. 원래 삼별초는 고려 최씨정권의 별군으로 무신정권유지의 핵심 기반이었다. 강화도에서 30여 년 동안 몽고에 대항하다가 최 씨 정권이 무너지고 강화에서 개경으로 돌아가면서 삼별초는 끝까지 남아 대항하였다.
<고려항몽충혼탑>
조정으로부터 해산명령을 받은 삼별초는 배중손(裵仲孫)을 지도자로 삼고 승화후 왕온(承化侯 王溫)을 왕으로 삼아 1270년(원종11년)에 강화에서 이곳 진도로 근거지를 옮기고 쌓은 성이 용장산성이다. 진도로 거점을 옮긴 삼별초는 궁궐을 지은 다음 진도를 황도(皇都)로 정하고 장기 항전의 태세를 갖추고 대내외적으로 고려 황제를 받드는 자주적인 국가를 천명하였다. 그러나 채 일 년도 되기 전에 려·몽(麗·蒙)연합군에게 황제 왕온과 배중손이 전사하고, 김통정(金通精)은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제주도로 옮겨 끝까지 항쟁한다.
<용장성 궁궐 터>
용장성터를 옆으로 하여 화살로 사용하는 신우대 밭을 지나 가파른 산마루에 오르니 산성이 능선을 따라 길게 늘어선다. 제일 높은 용장봉(262m)에서는 사방이 확 트여 북으로는 바다 건너 해남 땅 화원반도가 보인다. 갔던 길을 되짚어 다시 내려오는 길목에는 춘란이 벌써 봄을 기다린다. 내려오면서 현재 발굴 중인 용장성터를 둘러보고 금골산으로 이동한다.
<용장성>
<용장봉>
<길섶의 춘란>
진도의 금강이라고 불리는 금골산(金骨山, 195m)은 진도군 군내면에 있는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명산이다. 주차장에서 금성초등학교 쪽으로 들어서는데, 금골산을 배산(背山)으로 한 위용이 대단하다. 운동장을 지나 좌측으로 사택이 있는 곳으로 올라서면 금골산 오층석탑이 나온다.
<금골산과 금성초등학교>
고려 후기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는 이 석탑은 해원사(또는 해언사)라는 절이 있었던 자리에 있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고, 약200여m 떨어진 금골산 바로 밑에 해언사라는 절이 복원되어 있다. 그러나 학교 터를 정리하던 중 거대한 석재와 초석과 옥돌 등의 흔적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금골산 오층석탑>
금성초등학교 교정을 벗어나 유자 밭 샛길로 하여 해언사 좌측으로 가파른 금골산을 기어 올라간다. 금골산에는 세 개의 굴이 있고, 산 중턱에 전남 문화재 자료인 마애여래좌상이 있으나, 지세가 험하여 감히 내려가지는 못했다. 정상에 올라 사해를 둘러보고 다시 같은 길로 내려와 해언사에 들른다.
<금골산 정상>
해언사의 유래는 기록된 것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대웅전에 심검당(尋檢堂)과 백화당(白華堂)의 전각이 배치돼 있다. 그리고 심검당 뒤로 조그마한 불상이 모셔진 석굴이 있으며, 대웅전 옆 언덕에는 나한(羅漢)상이 자리를 지킨다. 해언사에서 나오면서 마시는 한 잔의 물은 지난해의 묵은 때를 깨끗이 씻겨내고 새로운 해의 희망을 새롭게 각인하는 청량제였다.
송구영신(送舊迎新)∼∼
<해언사 대웅전>
<석굴>
<나한상>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성 축령산에 서설이 날리고 (0) | 2017.01.17 |
---|---|
용마산과 아차산성 (0) | 2017.01.09 |
축령산-화이트크리스마스 (0) | 2016.12.28 |
가깝고도 먼 길-선정릉(宣靖陵) (0) | 2016.12.20 |
태안 솔향기 길을 걸으며 (0) | 2016.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