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양도성 순성(巡城)놀이(4)
(흥인지문→숭례문, 2016년 9월 17일)
瓦也 정유순
흥인지문(興仁之門)은 한양도성 8개 문 중 동쪽에 있는 문으로 일반적으로 동대문이라고 부르며, 보물 제1호이다. 1396년(태조5년) 도성을 지을 때 건립되었으나 1453년(단종원년)에 다시 고쳐지었고, 지금 있는 것은 1869년(고종6년)에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새로 지었다고 한다. 특히 바깥쪽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며,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흥인지문과 옹성>
흥인지문이 왜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는가? 숭례문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통과해 함락시켰고, 흥인지문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곳으로 입성해 한양을 함락시킨 승전문(勝戰門)이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때 남대문을 조선 보물 제1호로, 동대문을 조선 보물 제2호로 지정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점은 왜 일제가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속칭인 남대문과 동대문으로 기재(記載)하였는가 이다.
<흥인지문>
우리는 호적부나 주민등록부 등에 이름을 올릴 때 정식 이름을 올린다. 그리고 집안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족보(族譜)에 정식 이름을 올리고 부기(附記)로 아호(雅號)나 속명(俗名) 등을 기록한다. 모든 공식 기록은 정식 명칭을 기준하여 기록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일제는 정식명칭 대신 속칭을 공식기록으로 조선총독부 관보에 기재하였다. 이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숭상하는 우리민족의 혼을 말살하기 위한 의도적인 수단으로 사용한 것 같다. 참으로 교활하고 무례한 짓이다.
<조선총독부 관보-경향신문 자료>
그런데 더 한심한 것은 해방 후 문화재를 국보와 보물로 분류하면서 우리의 시각으로 문화재적 가치를 검증하지 않고 숭례문은 국보 제1호로, 흥인지문은 보물 제1호로 그대로 계승되었다는 것이고, 1962년에 제정된 문화재법이 일제 때 만든 법 그대로 거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받아들여 한국의 법령으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조선시대 능(陵)은 국가(문화재관리청)에서 관리하고 나머지 능은 지자체에서 관리하는 데, 이것도 일제강점기 때를 답습하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나라 국화-무궁화>
흥인지문 주변은 시장(市場)주변이라 역시 사람이 바글거린다. 인파에 밀리다시피 떠밀려 청계천에 당도한다. 인왕산 수성동계곡에서 발원한 청계천(淸溪川)은 한양도성의 가운데를 흐르는 자연하천으로 홍수가 자주 범람하였고, 평상시에는 흐르는 물이 없어 오수가 그대로 흘렀다고 한다. 조선 태종이 처음으로 개거공사(開渠工事)를 했고, 영조 때에 준설과 양안에 석축을 쌓았으며, 유로변경 등 본격적인 하천사업을 하여 물의 흐름을 거의 직선화시켰다고 한다.
<청계천>
처음 이름은 개천(開川)이었는데, 일제강점기 초에 청계천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청계천의 준설토가 쌓이고 쌓인 방산(芳山)이 지금의 방산시장 자리이다. 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자리하고 있는 청계천을 건너 사라진 성벽의 흔적을 따라 남으로 발을 옮긴다. 도성 안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물은 이 하천으로 다 모인다.
<방산시장-네이버캡쳐>
서울 동쪽의 들판 또는 서울동대문운동장이란 뜻의 성동원두(城東原頭)자리에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들어섰다. 과거 전통건축물과 유적∙유물, 최첨단 현대복합문화시설이 어우러진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에는 동대문역사관, 동대문운동장기념관, 이벤트 홀, 디자인갤러리 등이 들어섰다. 특히 동대문운동장을 기념하기 위해 야간경기용 조명탑 2기와 성화대가 옛 운동장자리를 지키고 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문화재발굴조사를 통해 흥인지문에서 광희문으로 이어지는 한양성곽 터에서 이간수문(二間水門) 등이 나왔으며, 축구장과 야구장 부지에서는 조선조 때 군사를 훈련하던 훈련도감(訓練都監)의 부속관청이었던 하도감(下都監) 터가 나왔고, 조선 전기에서부터 후기까지의 건물지유구(建物址遺構) 여러 점과 조선백자와 분청사기 등 조선 때부터 일제강점기 때의 도자기 등 주요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간수문>
을지로와 퇴계로 길을 건너면 광희문(光熙門)이 있다. 1396년(태조5년) 한양도성 건설 때 동남쪽에
세운 광희문은 남소문으로도 불리었으며, 청계천이 흘러 나가는 방향이고 한강의 수산물 등이 이 문을 들어오기 때문에 수구문(水口門)으로도 불린다. 또한 한양도성 내의 장례행렬이 서쪽으로는 소의문(일명 서소문)으로, 동쪽으로는 광희문(일명 남소문)으로 통과하기 때문에 시구문으로 불리기도 한다.
<광희문>
광희문에서 장충동 주택 골목길로 들어선다. 이미 태양은 옆으로 길게 누워 골목에는 그늘이 길어진다. 옛 성터 자리에는 각종 건물과 고급 저택들이 줄을 선다. 완만하게 곡선을 그리는 정점이 성곽의 마루금으로 상상하며 장충체육관 부근 쪽으로 주택골목을 비집고 나간다. 그리고 체육관 길 건너에는 장충단공원이 있다.
<장충동 주택골목>
장충단(奬忠壇)은 서울 중구 장충동에 있는 초혼단(招魂壇)으로 대한제국 때 명성황후 민비가 시해된 을미사변과 구식군인들의 처우불만으로 일어난 임오군란으로 순직한 충신과 열사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고종황제의 명으로 세워진 최초의 현충원(顯忠院, 국립묘지)으로 장충단공원과 국립극장은 물론 그 주변의 호텔과 대학교 등 많은 건물과 시설들이 장충단구역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장충단 구역-우측이 박문사가 있던 신라호텔>
봄가을로 제사를 지낼 때에는 군악을 연주하고 조총을 쏘았는데,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장충단이 폐사되고 1920년대부터 이 일대를 공원으로 만들어 벚꽃을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하였으며, 특히 상해사변(上海事變) 당시 일본육군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3용사의 동상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는 박문사(博文寺)를 세웠다고 한다. 해방 후 동상과 박문사는 철거 되었고, 한국전쟁으로 장충단 본 건물과 부속건물은 파손되었으나 순종황제가 황태자 시절에 쓴 글씨인 장충단비(서울지방유형문화재 제1호)만 남아 있다. 이 비는 원래 영빈관(현 호텔신라) 내에 있었던 것을 1969년 지금의 수표교(水標橋) 서편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장충단 비>
장충동과 신당동의 경계를 이루는 성벽을 타고 남산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우선 눈에 띠는 것은 납작한 구멍 3개가 있는 큰 돌이 성벽의 밑에 박혀 있는 것이다. 이는 성벽에 쌓기 전에 돌을 쪼개어 쓰려고 구멍에 나무를 박고 물을 부어 부풀리면 돌이 결대로 나누어 쓸려고 한 돌인데 그냥 성벽에 쌓은 것 같다.
<구멍낸 돌>
그리고 성벽 밑돌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慶山始面(경산시면), 興海始面(흥해시면)이란 글씨가 보인다. 이는 ‘경산고을’과 ‘흥해고을’ 사람들이 동원되어 여기서부터 성벽을 쌓았다는 표지석이라고 한다. 아마 이때에도 성을 쌓으면서 고을이름을 밝히는 실명제가 실시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호텔신라 뒤편으로 성곽 길을 따라 반얀트리(VAN YAN TREE, 구 타워호텔) 클럽을 가로질러 국립극장 옆으로 하여 남산성곽을 따라 방향을 잡는다.
<경산시면 각자>
<흥해시면 각자>
<반얀트리클럽>
남산성곽의 돌은 잘 다듬어지지 않은 돌들이 질서정연하게 올려 져 있다. 이미 땅거미는 지고 사위는 어둑어둑해진다. 캄캄한 계단 길을 가는 것은 좀 어려울 것 같아 성곽 중간에서 우회하여 가로등이 켜진 밝은 길을 택한다. 한강변 양쪽으로 흐르는 자동차 불빛은 긴 선을 그리며 달리고, 여의도를 비롯한 도심의 빌딩들이 불야성을 이룬다.
<남산성곽>
<서울여의도 쪽 야경>
우회도로 따라가다 보니 옆으로 성곽이 다시 나오고 성벽 위로 솟은 N서울타워는 밤하늘을 아름답게 찌른다. 음력 팔월 열이레에 뜬 달은 팔월 대보름달 보다 더 둥글고 더 밝은데 자꾸만 남산의 소나무 숲으로 얼굴을 가린다. 달구경을 왔는지 관광버스는 사람을 가득 채우고 남산팔각정으로 꼬리를 문다. 팔각정 광장에는 사람이 많아 어둠을 쫓아 낸 것 같다. 외국인들은 아름다운 남산의 야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사가 막 튀어 나온다.
<N서울타워>
남산의 원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인데 목멱은 옛말의 ‘마뫼’로 남산이란 뜻이란다. 그래서 조선 초에 세운 신당에는 목멱대왕이란 산신이 모셔져 있고, 나라에서 세운 신당이라 하여 국사당(國師堂)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국사당이 강제로 헐리고 조선신궁이란 일본신사를 세워 우리민족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으며, 철거된 국사당 건물은 인왕산 서쪽 선바위 아래에 옮겨져 있고, 그 자리에는 식물원이 자리하고 있다.
<남산팔각정과 N서울타워>
케이블카라고 불리는 삭도(索道) 승강장입구와 퇴계로에서 올라오는 계단은 오고가는 사람이 많아 교행 할 때 주의하지 않으면 어깨가 걸릴 것 같다. 보름달 보다 더 밝은 달이 잠깐 얼굴을 내밀 때 나도 재빨리 모두의 안녕을 빌어본다. 조심스레 계단을 밟으며 내려오는데 계단 옆으로 무슨 공사를 하는지 어둡게 장막을 친 곳을 뒤로 하고 안중근장군 동상이 서있는 마당으로 내려온다.
<대한국인 안중근 동상>
우리가 일반적으로 의사(義士)로 알고 있는 안중근은 재판과정에서 ‘나는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으로써 우리나라를 침략한 적장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으니 포로로 대접해 달라’고 주장 했다고 한다. 그리고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이런 면에서 의사 보다는 장군이 맞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동상 주변에는 유묵을 새긴 비석들이 서있다.
<백범 김구 동상>
숭례문 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백범 김구(白凡 金九)선생의 입상과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선생 좌상이 있다. 두 분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主席)과 국무위원(國務委員)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훌륭한 분들이다. 특히 이시영 선생은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자 이회영 등 6형제가 전 재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정부수립 후에는 초대 부통령을 지내셨다.
<성재 이시형 동상>
아침에 출발했던 숭례문으로 되돌아오는데 남산 밑의 힐튼호텔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해마다 6월 17일이면 일본자위대 창설행사가 이 호텔에서 열린다. 일본은 외교적인 행사라고 주장하지만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 아래에서 이런 행사가 자행되는 것은 독립된 국가의 자존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고위 정부관계자나 국회의원들이 참석하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다. 한양도성의 정문으로 역할을 하면서 역사의 영욕을 지켜본 숭례문은 무수히 많은 말들을 참으면서 침묵으로 순성놀이를 한 우리를 격려한다.(完)
<숭례문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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