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양도성 순성(巡城)놀이(3)
(백사실계곡→흥인지문, 2016년 9월 17일)
瓦也 정유순
부암동 백석동천(白石洞天)에서 숲속 오솔길을 따라 북악스카이웨이로 올라간다. 백사실계곡에는 1급수 지표종인 도룡뇽 서식처가 거울 같은 맑은 물로 맞이한다. 숲길은 단풍이 들기 직전의 검푸른 녹음(綠陰)은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처럼 어딘가 모르게 가을 같은 우수를 안겨 준다. 북악팔각정으로 올라가는 큰길 옆에는 팥배나무 열매가 계절의 보석처럼 햇빛에 반짝인다.
<도룡뇽 서식지>
<팥배나무>
보현봉에서 비봉으로 연결되는 북한산 능선은 병풍이 되어 평창동을 포근하게 감싸 안는다. 북악스카이웨이 도로에는 휴일을 맞아 외출 나온 차량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인왕산 순환도로에서부터 연결되는 북악스카이웨이는 1968년 9월 개통되어 창의문(彰義門)에서 정릉(貞陵) 아리랑고개까지 연결되는 약10㎞ 길이의 구불구불한 도로다.
<평창동과 북한산 능선>
북악팔각정에는 주차하려는 자동차가 꼬리를 물고 늘어선다. 북악팔각정은 북악산능선 해발 342m 지점 위에 위치한 우리나라의 전통미를 살린 한옥형 정자로서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춘 서울 도심 속의 관광명소다. 주변의 풍경이 철따라 다르게 보여 항상 새롭게 보이며 서울 도심을 조망할 수 있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다.
<북악팔각정>
그리고 북악산은 서울의 주산으로 경복궁 북쪽에 우뚝 솟은 산으로 남산에 대칭하여 북악(北岳)이라 하였고, 또한 조선 초부터 산신(山神)을 모시는 백악신사(白堊神社)가 있어서 백악(白岳)으로도 불린다. 북악팔각정에서 잠실 쪽 남한산성을 바라보며 정릉방향으로 조금 오다가 말바위안내소 쪽으로 약간 가파른 계단을 타고 내려온다. 계단 끝에는 성북천발원지라는 조그만 맑은 샘이 보인다.
<백악산 표지석>
<멀리 보이는 게 남한산성>
<성북천 발원지>
말바위는 말(馬)처럼 생긴 게 아니고 조선시대에 문무백관들이 말(馬)을 이용하여 이곳에 와서 자연을 만끽 했다 해서 말(馬)바위라는 설과, 북악의 산줄기가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끝자락에 있는 바위라 말(末)바위라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서 숙정문(肅靖門)으로 올라가려면 말바위안내소에서 신분증을 제시하고 신분을 확인받아야 한다. 필자는 2015년 7월에 숙정문에서 창의문까지 산행을 한 경험이 있고, 성 밖으로 이어지는 숲길이 너무 좋아 와룡공원 쪽으로 우회한다.
<말바위안내소>
숙정문은 한양도성의 북쪽의 대문이다. 1936년(태조5년) 도성의 다른 대문과 함께 세워졌고, 도성의 북쪽에 있다하여 북대문 또는 북문으로도 불린다. 태종 때 풍수지리를 하는 최양선(崔揚善)이라는 사람이 지맥(地脈)을 손상시킨다는 상소(上疏)를 올린 뒤에는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 시켰고,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여 가뭄이 들 때에는 기우(祈雨)를 위해 문을 열었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숙정문>
또 숙정문은 도성 북쪽의 대문이지만 다른 곳과 달리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하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어서 실질적으로 성문의 기능은 하지 못했다. 그리고 1968년에 발생한 소위 1∙21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해 오다가, 2006년 4월부터 신분을 확인하는 조건으로 말바위안내소에서 창의문안내소 까지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백악산소나무-1∙21사태 때 총탄 흔적>
말바위안내소 앞에서 와룡공원 쪽으로 우회하여 밑으로 내려오다가 삼거리 길에서 직진하면서 길을 잃어버린다. 같은 길을 걷던 다른 일행이 숲속 언덕에는 삼청각(三淸閣)이 있다고 알려준다. 지금은 서울세종문화회관이 공연장, 한식당, 찻집, 객실 등 전통문화공연장으로 운영하고 있지만, 1970년대에는 우리나라 ‘여야 고위정치인의 밀실회동’,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한일회담의 막후 협상장소’ 그리고 ‘유신시절요정정치’의 산실이었다.
<삼청각-네이버 캡쳐>
길을 ‘잃어버린 다는 것’은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며 내려왔던 계단으로 되올라가며 숨을 헐떡거린다. 와룡공원 쪽으로 내려오며 성북동에 있다는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법정의 길상사, 전통미술품을 소장하는 간송미술관 등을 고개를 길게 뽑아 두리번거렸으나 쉽게 보이질 않는다.
<심우장-네이버 캡쳐>
만해가 조선총독부를 보기 싫어 일부러 북향집으로 지은 집이 심우장(尋牛莊)이며, 고급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던 김영한(법명 길상화)이 송광사 법정스님에게 시주하여 생긴 절이 길상사이고, 간송 전형필(全鎣弼)이 33살에 세운 우리전통미술품을 주로 소장하는 한국 최초의 민간박물관이 간송미술관이다. 이들은 다음에 북정마을과 함께 더 자세한 탐사를 한번 해야겠다.
<길상사-네이버 캡쳐>
용(龍)이 길게 누워 있는 형상이라 와룡(臥龍)인 와룡공원은 삼청공원, 북악산도시자연공원, 성북동, 말바위안내소 등으로 가는 도보교통의 요충지이다. 와룡공원에서 서울 한양도성의 안팎을 여유롭게 돌아본다. 창의문 밖으로 하여 백석동천의 백사실계곡과 북악팔각정을 거쳐 와룡공원까지의 걷는 길은 도심에서 도심을 잊어버리는 환상의 산책길이다.
<와룡공원 산책길-네이버 캡쳐>
성곽 안길로 하여 내려오다 암문(暗門)을 통해 성 밖으로 나오니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는 북정마을이 나온다. 성벽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마을이지만 좁은 도로로 천천히 달리는 자동차도 정겹고, 낮은 지붕들이 이마를 맞대며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같은 성북동이면서도 고급저택들이 즐비한 이웃과 명암이 대비된다. 이곳에서 아주 늦은 점심을 하며 내 몸을 지탱해 준 다리를 잠시 쉬게 한다.
<성북동 북정마을>
<성북동 저택마을>
역시 배가 든든해야 힘이 솟는다. 어느 집 담 밖으로 내민 감나무의 감은 얼굴을 붉히며 홍시로 익어간다. 혜화문 쪽으로 내려올수록 우리 모두의 무지 때문인지 성벽을 주춧돌 삼아 개인주택부터 구 서울시장공관과 학교 등 공공건물 까지 마구잡이로 들어선 느낌이다. 어느 곳은 아예 성벽을 잘라 길을 내고 양쪽으로 튼튼한 집을 지어 놓았다. 아마 이것도 일제강점기 때 민족의 혼을 말살하기 위한 일환으로 자행한데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감나무>
<성벽 위에 있는 고등학교>
<성곽 터에 지은 집-성곽 마루가 불록하다>
그래서 그런지 성벽마다 작은 하얀 점이 두 개씩 찍혀 있는데, 이는 성벽의 주저앉음과 기울기 등을 측정하는 점이란다. 주기적으로 두 점 사이의 간격을 측정하여 전에 측정한 값과 비교하여 성벽의 안전을 점검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전에 것과 대비(對比)차이가 많이 나면 안전에 위험요소가 많다는 뜻 같다.
<성벽 측정지점>
한적한 성 바깥 길을 따라 내려오니 속칭 동소문으로 불리는 혜화문(惠化門)이 나온다. 혜화문은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5년 뒤인 1397년(태조5년)에 한양도성을 축성하면서 함께 세워졌다. 당시 숙정문은 통행이 금지되면서 양주∙포천 등 동북방면의 중요한 출입구였던 이 문을 처음에는 홍화문(弘化門)으로 하였다가 1483년(성종14년)에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東門)과 이름이 같아 혼동을 피하기 위해 1511년(중종6년)에 혜화로 고쳤다고 한다.
<혜화문 전경>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다가 마지막으로 1684년(숙종10년) 문루(門樓)를 새로 지은 후 보존되어 오다가 일제강점기인 1928년 홍예(虹霓)만 남겨두고 문루를 헐어 버렸는데, 일제는 돈암동까지 전찻길을 내면서 혜화문의 흔적까지 다 지워 버렸다. 그러다 1975년부터 한양도성 복구 작업이 시작되어 성곽이 완성되면서 1992년에 혜화문이 복원되었다.
<혜화문>
혜화동과 돈암동을 연결하는 창경궁로를 건너 성곽을 따라 가는데 오르막이 나온다. 바로 낙산공원 쪽으로 가는 방향이다. 지대가 조금 높은 곳에서는 성북동 방향으로 인수봉에서 보현봉으로 이어지는 북한산 능선이 한눈에 보인다. 그리고 돈암동 방향으로는 상계산과 불암산이 아파트 숲 위로 머리카락만 보인다.
<보현봉-인수봉 북한산 능선>
<수락산 과 불암산이 보이는 돈암동>
성곽의 색깔이 크게 검은색과 흰색으로 나뉘어 보인다. 아래는 검은색이고 위쪽은 성을 새로 쌓은 듯 흰색이다. 그리고 아랫부분은 돌의 크기가 고르지 못한데 비해 윗부분은 벽돌을 틀에 찍어낸 것 같이 크기와 모양이 거의 같다. 그 이유는 아랫부분은 원형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돌의 모양에 따라 축성시기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윗부분 흰색은 역사적 고증은 적당히 하면서 성과 위주로 빨리빨리 추진했기 때문이란다. 좀 한심한 생각이 든다.
<혜화문에서 낙산방향 성곽>
낙산(駱山)은 서울의 동쪽을 지키는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한다고 한다.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을 닮았다 하여 낙타산으로도 불리는데, 한양도성의 동산(東山)으로 서쪽의 인왕산(仁王山)에 대칭되는 산으로 산 전체가 화강암이다. 옛날에는 숲이 울창하여 맑은 물이 흐르는 절경으로 삼청, 인왕, 백운, 청학과 더불어 한양도성의 5대 명승지였으나, 지금은 주택과 아파트 등이 산중턱 위까지 들어서 옛 맛을 찾기 힘들다. 다만 산정에 남아 있는 성벽을 중심으로 서울시의 녹지 확충계획에 따라 낙산공원이 조성되어 역사의식의 함양과 함께 찾아오는 사람에게 휴식을 제공한다.
<낙산공원>
<낙산공원 배롱나무>
낙산에서는 동쪽 멀리 용마산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북악산에서 창덕궁과 창경궁으로 하여 종묘와 연결되는 녹색지대(綠色地帶)가 보인다. 옛날에는 이 푸른 띠가 남산까지 연결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세운상가가 자리 잡아 그 맥을 끊어 놓고 있다. 그리고 서울의 대학로와 마로니에공원이 바로 밑에 자리 잡는다.
그리고 낙산 남쪽 바로 밑에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살았던 적산가옥(敵産家屋) 수 백 채가 있는데, 이곳이 이화마을이다. 좁은 골목으로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조금은 소외된 지역이었으나 ‘ArtinCity 2006’ 이라는 이름으로 소외된 지역의 시각적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70여 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낙산프로젝트’를 추진하여 가파른 계단에는 꽃그림이 피었고, 동네 곳곳에 그림이 들어서고 조형물이 설치되어 ‘이화동 벽화마을’이 되었다. 또 동네 한쪽에 마련된 남새밭에는 채소들이 지난여름 무더위를 잘도 견뎠다.
<이화마루 텃밭>
성곽 안쪽으로 내려오니 동대문이라고도 불리는 흥인지문(興仁之門)이 보이는데 반갑다. 그리고 성벽 옆에 한양도성박물관이 현대식 고층건물이 되어 하늘로 솟는다. 옛날 모 대학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동대문성곽공원으로 되어 시민들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성곽이 끊기어 도로로 변한 자리에는 ‘서울한양도성’이라는 동판으로 바닥에 깔아 놓았다. 종로와 신설동으로 연결되는 큰 도로를 건너 흥인지문 잔디광장에서 잠시 휴식을 한다.
<흥인지문>
<한양도성박물관>
<서울한양도성-길바닥 동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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