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북경)과 만리장성
(2017년 3월 4일∼3월 6일)
瓦也 정유순
봄바람인지 겨울의 끝 바람인지 가늠하기 힘든 날씨가 오락가락하는데 손가방이 좀 무겁더라도 두툼한 옷가지를 준비하여 중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중국의 다른 지방은 몇 번인가 다녀왔는데, 중국권력의 심장부인 베이징(北京)은 초행길이라 여러 가지로 기대가 크다. 더욱이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의 한국 설치문제로 중국에 진출한 기업들이 불이익을 당한다는 소식과 그 뜨거웠던 한류(韓流)열풍도 차가운 혐한(嫌韓)기류가 흐르는 가운데 중국을 간다는 것은 약간의 주저함도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여 두 시간 만에 천진(天津)공항에 착륙하여 입국수속을 받고 버스로 베이징으로 향하는데 목적지에 가까울수록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넘쳐난다. 베이징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연(燕) 나라의 수도였으며, 후에 요(遼)·금(金)·원(元)·명(明)·청(淸)의 도읍지로, 중화민국의 초기의 수도로서 800여년의 역사를 이어온다. 그리고 수도가 아닐 때는 동북변방(東北邊方)의 정치·군사상의 요지가 되었다.
초기에는 명칭도 연나라 수도여서 붙여진 이름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연경(燕京)으로 부르다가 명나라 때 영락제(永樂帝)가 1421년 이곳을 국도(國都)로 정하고 북경(北京)이라 하였는데, 베이징이라는 명칭은 이때에 비롯되었다. 1928년 시(市)로 체계를 개편하여 북평(北平, 베이핑)으로 고쳤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과 함께 다시 베이징으로 환원하였다.
<자금성 부근 태묘 입구>
두 시간 넘게 베이징에 도착하여 천안문(天安門, 텐안먼) 광장으로 가려 했으나, 3월초부터 시작한 전국인민대표회의(全人代)가 천안문 앞 인민대회당에서 열리고 있어 공안들의 통제가 심하여 우선 자금성(紫禁城 쯔진청)부터 관람하기로 한다. 우선 입구부터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못”인 해자(垓字)가 폭 50m, 깊이 6m, 위로 솟은 10m의 담장이 크기의 위용을 자랑한다.
<자금성 해자>
내·외국인을 비롯한 찾아오는 관광객이 줄을 잇는 자금성(紫禁城)은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가 1406년 수도를 남경(南京,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면서 약100만 명의 인력이 14년에 걸쳐 지은 중국 최대의 궁궐이라고 한다. 가로 960m, 세로750m의 직사각형 면적(72만㎡)에 15만㎡에 이르는 건축물로 방의 개수가 9,999개라고 설명하는데, 실은 8,886개라고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일만 개의 방을 가진 옥황상제와의 비교를 위해 9,999개를 더 믿는 것 같다.
<자금성 오문>
옛날부터 중국 사람들은 우주의 중심인 북극성의 색깔을 진한 자주색으로 믿고 있어서 하늘의 아들인 천자가 머무는 곳이라 하여 궁궐의 색을 자주색으로 지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황제의 허가 없이는 아무도 안으로 들어가거나 나갈 수 없다는 의미를 지녔다고 하여 자주색의 자(紫)자와 함부로 출입을 금한다는 금(禁)자를 써서 자금성(紫禁城)이라고 부른다.
<자금성 태화문>
<자금성 태화전>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은 5백년 이상 명나라와 청나라의 권력의 중심인 황궁(皇宮)으로 수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즐비하다. 1912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나라 왕조가 물러나고 그 누구도 황제의 허락 없이 출입이 금지되었던 궁궐은 결국은 박물관이 되어 중국인과 외국인 관광객이 아무나 찾아 갈 수 있는 세계의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국공내전(國共內戰)으로 장개석(蔣介石, 장제스)의 국민당정부가 대만으로 물러나면서 엄청난 주요유물들을 빼갔지만 지금도 수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밟고 다니는 바닥의 돌에 새긴 문양 하나까지 뛰어난 예술작품이다.
<자금성 황상>
<자금성 소방용 물항아리>
<자금성 태화전 계단>
<자금성 태화전 내부>
특이한 것은 자금성(紫禁城)의 중심출입문인 남쪽의 오문(午門)에서 황제가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외조(外朝, 아이차오)에는 어떠한 나무나 풀이 보이질 않는다. 이는 자객(刺客)이 들어와 숨을 수 있는 은신처를 없앤 것이란다. 황제와 황후, 빈과 상궁들이 사적공간으로 사용했던 내정(內庭, 네이팅)부터 궁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경산(京山, 징산)까지는 건물의 구조와 맞게 숲이 어우러져 있다. 경산(京山)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시간에 쫓기듯 천안문(天安門) 광장으로 바삐 간다.
<자금성 경산>
천안문(天安門)은 자금성(紫禁城)의 정문으로 우리 서울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 해당하는 것 같다. 백만 명이 한 번에 모일 수 있다는 광장을 가로 질러 천안문 중앙에는 모택동(毛澤東, 마오쩌둥, 1893. 12∼1976. 9)의 대형 초상화가 광장을 굽어본다. 원래 1417년 명나라 영락제 때 건설되었던 승천문(承天門)을 청나라 때에 불탄 것을 1651년에 다시 건설하면서 “하늘 아래 모든 세상이 평안 하라”는 뜻을 새겨 천안문(天安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천안문 광장>
천안문(天安門) 광장은 베이징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북으로 880m, 동서로 500m, 총 면적 44만㎡의 세계 최대광장이다. 원래 광장 이름도 명과 청나라 시기에는 천보랑(千步廊)이라 했으며, 황제 전용 통로가 있었다고 한다. 1651년 재건 이후 1958년 확장공사를 거쳐 현재의 규모로 되었다.
<천안문>
1919년의 5·4운동,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문화대혁명, 두 차례의 천안문사태 등 주요사건들이 있었던 중국의 근현대사의 상징적 장소이다. 광장 중앙에는 인민영웅기념비, 남쪽에는 마오주석기념당, 동쪽에는 중국혁명박물관과 중국역사박물관, 서쪽에는 인민대회당사가 있다. 그리고 마오주석기념당에는 마오주석의 주검이 방부처리 되어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인민영웅기념비>
<마오주석 기념당>
<중국혁명박물관>
<인민대회당>
중국 기예단(技藝團)의 서커스를 관람하기 위해 바쁘게 이동하여 조금 이른 저녁을 하고, 공연을 기다리는 동안 조양(朝陽, 차오양)극장 앞에 있는 베이징민속전통시장 골목을 구경한다. 우리의 전통재래시장처럼 각종 먹거리와 일상용품이 진열되어 있고, 좁은 골목으로 사람들이 미어터진다. 골목에는 중국 특유의 향유냄새가 나고, 먹거리도 참새, 애벌레, 전갈, 뱀 등 다양한 꼬치구이 종류가 주를 이룬다.
<북경민속골목 간판>
<민속골목시장>
<꼬치구이 등 상품>
서커스 공연은 여럿이서 그네타기, 천정에 매달린 외줄타기, 의자를 수직으로 단을 차례로 20단까지 쌓고 각종 물구나무서기, 인간 탑을 만들어 아슬아슬한 홀로서기, 시계톱니바퀴 같은 도구를 회전시켜 묘기부리기, 자전거 1대에 10사람 타고 달리기, 철조망으로 만든 새장 같은 원통 속에서 한사람씩 들어가 나중에는 8사람이 360°고속회전을 하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약1시간 정도 고조시킨다.
<천정 외줄타기>
<의자 20단 곡예>
<인간탑 쌓기>
<기구돌리기>
<10명 자전거타기>
<원통 안의 8명의 오토바이 곡예>
<8인의 오토이스트>
여행 첫날 마무리하면서 베이징의 최대 LED를 볼 수 있는 더플레이스거리를 돌아본다. 여수 EXPO 때 설치된 것과 비교해 보면 규모나 기량은 우리가 앞선 던 것 같다.
<LED 영상>
<LED 영상>
곤한 잠을 자고 일찍 일어나 조반을 서두른다. 진시황(秦始皇)의 군사요충지였던 거용관(居庸關 쥐용관) 만리장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베이징을 가로질러 가야하는데 출발지에서 10분 늦으면 도착지에서는 한 시간이 늦기 때문이다. 베이징은 면적도 넓고 도로도 좋은 편이지만, 워낙 인구가 많을뿐더러 자동차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거용관은 베이징시에서 서북쪽으로 50㎞ 떨어진 곳에 있는 북경을 대표하는 팔달령(八達嶺 바다링)장성으로 향하는 도중의 협곡에 위치하고 있다. 명대(明代) 이전에 베이징의 최종 방위선이기 때문에 이 부근의 장성은 몇 겹의 복잡한 축조가 이루어 졌다고 한다. 고려 말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9∼1396)이 쓴 연산가(燕山歌)에서 거용관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長城中斷居庸關(장성중단거용관 : 장성 중단된 곳에 거용관이 있고)
春風秋月軒轅臺(춘풍추월헌원대 : 봄바람 가을 달에 헌원대로구나)
<거용관 문루>
<거용관 만리장성>
가파른 계단을 따라 숨 가쁘게 만리장성을 따라 올라간다. 만리장성은 중국 고대부터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에 방어하기 위해 건축한 대규모 군사시설이다. 축조된 시기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로 이미 2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녔으며, 이중 진(秦) 한(漢) 명(明)나라 때 축성한 장성의 길이가 가장 크다. 그런데 성벽을 자세히 살펴보니 적을 방어하며 활(또는 총)을 쏘아야 하는 전사구(箭射口)가 남으로 향해 있다. 북방민족의 침입을 방어한다는 성(城)이라면 당연히 북을 향해야 하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만리장성-전사구가 南向>
중국은 만리장성을 서쪽의 가곡관(嘉峪关 자위관)으로부터 동쪽 단둥의 호산장성(虎山長城)까지라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만리장성의 시작점을 평양이라고 우기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호산장성은 고구려의 천리장성 끝 박작성이고, 평양까지 주장하는 근거로 박작성이 요동반도에서 평양성으로 교통로를 방어하는 성이기 때문이란다. 이를 만리장성에 포함시킨 것은 우리 고대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역사왜곡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반론을 제대로 제기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다.
<산해관(동쪽)으로 향한 만리장성>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와 이화원(頤和園 이허위안)으로 간다. 이하원은 베이징에서 서북쪽으로 10㎞ 떨어진 교외에 있다. 원래 금(金)나라의 행궁이 있던 자리에 1764년 청(淸)의 건륭제(乾隆帝)가 대대적인 공사를 통해 대규모 별궁으로 청의원(淸漪園 칭이위안)을 지었고, 아편전쟁으로 파괴된 궁을 1888년 서태후가 재건하면서 이화원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이화원 입구>
<본당으로 가는 길>
총면적 2.9㎢에 자연풍경을 그대로 이용한 정원에 인공건축물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 중국조경의 걸작으로 1924년에 공원이 되었고, 199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화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곤명호(昆明湖 쿤밍호)와 만수산(萬壽山 완서우산)도 이때 조성된 것이다. 곤명호를 만들 때 어마어마한 양의 흙을 파냈는데 이 흙을 쌓아 만든 산이 약60m의 높이가 되는 만수산이다. 곤명호란 이름은 운남성 곤명에 있는 서호(西湖)를 모방했기 때문이란다.
<곤명호와 만수산>
<곤명호>
광활한 면적의 공원에는 중국전통의 전각과 누각, 교량, 탑 등이 아름다운 정원과 어우러진다. 그중에서 728m에 달하는 긴 회랑인 장랑(長廊)은 비나 눈이 올 때에도 산책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서유기(西遊記), 홍루몽(紅樓夢), 삼국지연의(三國誌演義), 수호전(水滸傳) 등 중국의 고전을 주제로 한 수백 점의 그림이 그려진 천정도 볼거리이다.
<장랑(長廊)>
이화원에는 거대한 수석(壽石) 같은 돌이 좌대에 얹어있는데 이름이 폐가석(廢家石)이란다. 폐가석은 원래 베이징 부근의 산에서 명나라 영락제 때 미만종(米萬鍾)이라는 사람이 발견하여 양향(良鄕)이라는 곳까지만 옮겨 놓고 방치되어 있던 것을 훗날 건륭제(乾隆帝)가 아버지 옹정제(雍正帝) 묘소에 참배를 하고 귀경하는 길에 신하들의 소개로 알게 되어 태후의 반대에도 이화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폐가석>
폐가석이 된 사연은 대단한 애석가(愛石家)였던 미만종이 집까지 옮기는데 엄청난 재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집안이 망했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이 바위를 이곳으로 옮기고 나서 청나라의 국운도 갑자기 기울었다. 만수산(萬壽山) 팔각정에 오르면 곤명호를 비롯한 이화원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다는데 짧은 시간을 탓하며 뒤돌아서 왕부정(王府井, 왕푸징) 거리로 이동한다.
<이화원의 백송>
왕부정 거리는 왕족과 귀족들의 저택이 모인 곳에 좋은 물이 나오는 우물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청조(靑鳥) 때는 귀족과 고급관료들의 저택이 지금도 남아 있다. 대문 앞에 서있는 사자석상이 사각형이면 문신(文臣)이고 원형이면 무신(武臣)을 상징하며, 대문 문설주 위로 서까래처럼 튀어나온 숫자에 따라 벼슬의 계급을 나타낸다고 한다. 문화재 거리로 각종규제가 많아 생활하기에 불편함에도 이 지역의 집값이 베이징에서 제일 비싸다고 한다. 골목 깊숙이 걸어서 들어갔으나 나올 때는 인력거를 이용하여 제자리로 돌아온다.
<왕부정 거리>
<벼슬의 계급을 나타내는 문설주>
<무인 사자석상>
<침실>
<인력거>
저녁에는 중국의 전설을 기초로 재구성한 대규모 무용 서사극 금면왕조(金面王朝)를 보기 위해 화교성(華僑城)극장으로 간다. 금면왕조는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영화감독 장예모가 연출하는 뮤지컬로 중국의 탄생설화를 보는 것 같다. 공연은 중국 전통미가 살아있는 웅장함과 섬세함을 동시에 갖춘 매력으로 십 수년째 베이징의 대표적인 공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배우 200여명의 출연과 매머드급무대의 변화, 그리고 250여 톤의 물을 이용한 홍수장면 등은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금면왕조 전광판>
<화려한 무대>
<실제 물을 이용한 홍수장면>
<마지막 씬>
삼일 째 되는 오늘은 새벽부터 교통량이 많고 전인대(全人代)가 열리고 있어 베이징으로 들어오는 차량에 대해 검문을 강화한다고 하여 서둔다. 다행히 우회도로를 택하여 진입하는데 역시 공안들의 검문이 있다. 중국의 국립의료기관인 동인당의원에서 명의들의 진맥(診脈)을 받아본 후 중국의 천단공원(天壇公園)으로 향한다.
<동인당의원 약제실>
천단공원(天壇公園)은 베이징의 자금성에서 남쪽으로 4.8㎞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명·청조(明·淸朝)의 황제들이 풍년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정원과 도교사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의 황제는 자연과 영계(靈界)를 중재하는 특별한 위치에 있으므로, 그들의 기원은 제국의 안녕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왔다. 자금성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천단(天壇), 북쪽에는 지단(地壇), 동쪽에는 일단(日壇), 서쪽에는 월단(月壇)을 만들어 각각 하늘·땅·해·달에 제사를 지냈는데 천단은 황실의 최대의 제단이었다.
<천단공원 조감도>
천단공원의 남쪽 정문인 조형문(昭亨門)으로 들어서면 원구단(圓丘壇)이 먼저 보인다. 원구단은 환단(圜壇)이라고도 하며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단(祭天壇)을 의미한다. 원구단은 하늘을 의미하기 때문에 원형이고, 지신(地神)에게 제사를 드리는 사직단(社稷壇)은 방형(方形)으로 하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원칙이다.
<조형문-천단공원 입구>
<원구단 입구>
원구단에서 황궁우 쪽으로 가는 광장에는 가운데에 둥근 중심돌이 자리하고, 이 돌을 중심으로 첫째 열에 9개의 돌이 원으로 놓여 있고, 둘째 열에는 18개의 돌이, 셋째 열에는 27개의 돌이… 아홉째 열에는 81개의 돌이 원을 만들어 하늘을 나타낸다.
<9배수의 원형>
원(圓) 마당을 지나면 회음벽(回音壁)이 둘러쳐진 담장 안에는 황궁우(皇穹宇)가 있다. 회음벽은 벽 안에서 소리를 내면 벽을 한 바퀴 돌아온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황궁우(皇穹宇)는 황제가 제궁에 들어가기 전에 제사를 올리는 곳으로, 제천 시 사용하는 신패와 신위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
<회음벽>
<황궁우>
원구단에서 360m의 단계교(丹階橋)를 지나면 천단공원에서 가장 큰 건물은 기년전(祈年殿)으로 원형의 목조건물이다. 원뿔형의 삼중지붕은 하늘을 상징하며, 유약을 발라 구운 청기와를 쌓고 그 위에 구근모양의 황금 상륜부를 올렸다. 건물 자체도 오직 나무만 사용하여 지었으며 쇠못이나 시멘트 등 다른 재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기년전>
우리나라도 고대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있었으나 조선(朝鮮) 때에는 중국의 천자만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이유로 간섭하여 중단했으나, 광무 원년(1897년) 고종 때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하면서 지금의 소공동(남별궁)에 원구단을 세운 후 1897년 10월 11일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일본이 조선을 병탄(倂呑)하려고 할 때 조공국(朝貢國)인 청나라를 떼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을 밀어붙인 것 같다.
<1900년대 대한제국원구단-네이버캡쳐>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1년 원구단의 터와 건물이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되었고, 1913년에는 원구단을 헐어내고 총독부 철도호텔(현 조선호텔)을 지었다. 지금은 신위를 모시는 팔각의 황궁우(皇穹宇)만 조선호텔 옆에 남아있다. 이는 일제가 우리민족의 정기를 말살하려는 악랄한 수법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이 이곳에 원구단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서울의 황궁우-네이버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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