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서울둘레길을 걸으며(용마∙아차산길)

와야 정유순 2017. 2. 24. 10:59

서울둘레길을 걸으며(용마아차산길)

(화랑대광나루역, 2017223)

瓦也 정유순

   서울둘레길 2구간의 시작점은 노원구 공릉동에 있는 지하철6호선 화랑대역부터이다. 처음에는 태릉앞역이라고 불렀으나 199512월에 가까운 곳에 육군사관학교가 있어서 화랑대역으로 변신한다. 화랑대(花郞臺)는 원래 태릉(泰陵)지역으로 알려진 이곳에 육군사관학교가 들어서고 교정이 <화랑대>로 명명되면서 새롭게 붙여진 이름이다.

<화랑대역>

<육사교정의 화랑대>


   화랑(花郞)은 신라 진흥왕 때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취지 아래 수려한 용모와 교양이 탁월한 귀족의 자녀들을 선발하여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세속오계(世俗五戒)를 호연지기(浩然之氣)와 함께 실천하여 청소년들의 심신을 단련하는 교육제도이다. 남자를 화랑(花郞), 여자를 원화(源花)라 불렀으며, 지인용(智仁勇)이 함축된 화랑정신을 육사생도들로 하여금 계승 발전하기 위한 것이 아닌 가 생각해 본다.

<육사교정의 지인용 탑>

<육사정문의 화랑 동상>


   서울의 동쪽 끝에 있고 망우역과 구리역 사이에 있는 양원역(養源驛)은 중앙선에 위치한 전철역으로 200512월에 문을 열고 영업을 개시하였다. 주변에 인가가 적어 이용하는 일반인은 적은 것 같으나 주변에 중·고등학교가 있어 등·하교 때 이용하는 학생의 수는 많을 것 같다. 그리고 양원역에서 아주 가깝게 중랑캠핑숲이 있다.

<양원역>


   중랑캠핑숲은 도시 속에서 자연을 만끽하며 캠핑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가족단위 캠핑을 권장하기 위해 201011월에 문을 연 곳이다. 따라서 회사 단체 등 친목도모를 위한 공간으로는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건강한 숲을 주제로 한 생태공원이며 청소년독서실, 청소년커뮤니티센터, 생태학습 지역, 소규모 야외무대 설치 등 청소년 중심의 문화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망우청소년수련관>

<중랑캠핑숲 관리동>


   동부제일병원 앞으로 난 제6호 국도는 서울 망우동에서 경기도 구리시로 넘어가는 도로에 망우리고개가 나오며, 도로를 횡단하여 고개 쪽으로 조금 올라가다가 우측으로 돌아서면 게이트볼장 등 각종 시설이 있는 망우리공원이 있고, 다시 계단으로 올라가면 망우산을 중심으로 편안한 산책로가 나 있으나, 어제 내린 비가 살짝 얼어서 일부구간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다.

<동부제일병원>

<망우리고개>


   망우리(忘憂里)라는 지명은 조선 태조가 자신의 무덤인 건원릉(健元陵) 터를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목인 이 고개에서 오랜 근심을 잊게 됐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근심은 영면(永眠)해야 없어지는 법. 그래서인지 일제강점기인 1933년 경성부(지금의 서울특별시청)는 당시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 일대에 집단묘지 조성을 시작했다고 한다.

<망우리공원 입구>


   망우산(281,7) 일대의 묘지공원 규모는 무려 832,800(25만 평)19733월에는 28,500여 기의 분묘가 가득했으나 이장과 납골의 장례문화가 바뀌면서 17,000여 기의 분묘가 남아 있다. 이 묘역에는 한용운, 오세창, 서동일 등 독립 운동가들과 방정환, 이중섭, 조봉암 등 유명인사가 잠들어 있고, 도산 안창호선생도 강남의 도산공원으로 이장되기 전까지는 이곳에 계셨.

<망우역사공원 조성 및 계획도>


   목마와 숙녀로 잘 알려진 시인 박인환(1926. 81956. 3)도 망우리고개가 좋아 고향인 강원도 인제로 가지 못하고 이곳에 묻혔는지 푯말은 산책로 가기 전인 계단 귀퉁이에 서있다. 이곳에는 국립현충원과는 달리 일제강점기 때 관료나 군인 등으로 일제에 부역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시인 박인환 묘소 푯말>


   산책로 초입에는 망우리공원의 자연경관을 조망하고 격동적인 근현대사를 살다간 50여명의 유명인사와 서민의 이야기를 비명(碑銘)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 코스로 <망우리공원 인문학길 사잇길’>을 조성(2016)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삶과 죽음의 사이를 걸어가며 깨달음을 얻어 근심을 잊어버리라라고 한다. 즉 한마디로 망우리 사잇길에서 망우(忘憂)하라고 한다.

<망우리공원의 인문학길 '사잇길'>


  묘()들은 망우산 능선을 따라 북쪽에서부터 서쪽 방향으로 응달진 곳에 많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으로 유택(幽宅)을 정한 사연이야 절절 하겠지만 햇빛이 좀처럼 보기 힘든 이곳을 택하기란 여간 고민을 해야 했을 것 같다. 그러나 후손들이 자주 찾아오고 관리가 잘 되는 곳은 묘역도 잘 정돈이 되어있다. 언젠가 충남 보령에 있는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菡)의 산소에 갔을 때도 느꼈지만 명당(明堂)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이 자주 찾아오는 곳이 명당이다라는 말이 다시금 떠오른다.

<국민강녕탑>


   햇빛이 들어오는 곳은 질퍽하고 그늘진 곳은 살얼음판인 망우산 산책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으며 서울둘레길 용마산구간으로 접어든다. 길도 좁지만 사람만 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조금 더 나아가니 깔딱고개(570계단) 푯말이 보인다. 산이 크고 작던 간에 어느 산마다 나름대로 깔딱고개는 다 있듯이 우리가 사는 인생사도 고비 고비마다 넘어야할 깔딱고개가 운명처럼 다가오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깔딱고개 푯말>

<깔딱고개 초입>


   깔딱고개 위에는 용마산5보루가 나온다. 보루(堡壘)는 적의 공격을 제어하는 데 매우 유리한 천연요새(要塞)이거나, 적군의 접근이나 공격을 막기 위해 튼튼하게 쌓은 진지를 말한다. 용마산과 아차산(峨嵯山) 일대에는 17여 곳의 보루유적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중 10여개의 보루가 고구려의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이 보루들은 현재 남한에 남아 있는 고구려 관련 유적으로써 고구려 관련 고고학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용마산5보루>


   서울둘레길에서 약간 옆으로 비껴선 용마산은 아차산의 최고봉으로 용마봉으로도 불린다. 서울(한양)도성의 동서남북 기준점이 되는 곳에는 동쪽으로 낙산(駱山, 또는 타락산), 서쪽으로 인왕산(仁王山), 남쪽으로는 남산(南山, 또는 목멱산), 북쪽으로는 북악산(北岳山, 또는 백악산)을 내사산(內四山)으로 한다. 그리고 밖으로 둘러싸고 있는 용마산(, 348), 덕양산(, 125), 관악산(, 629), 북한산(또는 삼각산, 837)으로 외사산을 구분한다.

<경조오부도-네이버캡쳐>


   또한 경복궁을 중심으로 뒷산인 북악을 주산으로 삼고, 왼편에 해당하는 동편의 낙산을 좌청룡(左靑龍), 오른편에 해당하는 서편의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 앞쪽에 해당하는 남쪽의 남산을 전주작(前朱雀), 뒤쪽에 해당하는 북쪽의 북악산을 후현무(後玄武)로 하여 사신(四神)을 동서남북에 배치하였다. 이는 한양도성의 안녕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바라는 천문오행사상(天文五行思想)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현무, 전주작, 좌청룡, 우백호-네이버캡쳐>


   용마봉 정상에는 1910년 우리나라 최초로 토지사업을 위하여 설치한 <용마산 대삼각본점>으로, 서울 양천구 신정동 갈산공원 정상에 있는 <갈산 대삼각본점>과 더불어 서울에 있는 2점 중 하나이다.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시설물을 정비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용마산용마봉>


   삼각점은 국토지리정보원(국토교통부)이 시행하는 기본측량을 위한 국가기준점이다. 규모에 따라 14등급으로 분류하는데 1등 삼각점을 대삼각본점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지적(地籍)측량을 하여 우리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일부에서는 이를 사용할 만큼 획기적인 기술이었다. 현재는 최첨단 위성측량장비가 개발되어 사용빈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으나 역사·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용마산 1급삼각대본점>

   용마산 5보루에서 데크와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다시 올라오면 아차산 정상이며 아차산 4보루가 나온다. 보루 위에는 제법 평평하게 단() 같이 만들어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놓았다. 아마 1500여 년 전 당시에 우리의 조상들은 후손들이 이곳에 와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미리 터를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아차산 4보루 원경>


   아차산(峨嵯山, 287)이라는 이름은 조선 명종 때 홍계관이라는 점을 아주 잘 치는 사람이 있다고 하여 임금이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쥐가 들어 있는 궤짝으로 능력을 시험하였는데, 그가 숫자를 맞히지 못하자 사형을 명하였다. 그런데 조금 후에 암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가 들어 있어서 아차하고 사형을 중지를 명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어 홍계관은 죽어버렸고, 이후 사형집행의 장소 위쪽 산을 아차산으로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아차산 능선>

 

  아차산은 예로부터 한강을 차지하는 자가 삼한일통(三韓一統)을 이룬다는 말처럼 고대부터 각국의 각축장으로, 고려 때에는 광나루와 함께 시인과 묵객들이 찾아와 자연을 즐겼으며, 조선조에는 숲이 우거져 호랑이 등 많은 야생동물들이 살고 있어 왕의 사냥터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누구든 아차산에 올라서면 동에서 서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의 여유로움이 가슴에 안긴다.

<잠실롯데월드타워와 한강>

<구리암사대교와 한강>


   서울둘레길 우측으로 조금 내려오면 하나의 암반으로 이루어진 마당바위가 나오고, 암반 상부에는 고구려정(高句麗亭)이 탁 버티고 서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1984년 콘크리트 구조로 건축한 팔각정이 있었으나 노후로 인해 이를 철거하고, 20097월에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어 팔각정을 고구려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고구려정>


   고구려정은 기둥을 가운데 배가 불룩한 배흘림식으로, 자재는 뒤틀림이나 변색이 안 되는 300년 이상의 금강송이며, 기와는 평양의 안악궁 터와 아차산 홍련봉보루에서 출토된 붉은 색상 문양을, 단청은 당시의 건축문양을 재현하였다고 한다. 2층 루()에는 누구든 휴식을 취하면서 독서를 할 수 있도록 서가(書架)가 준비되어 있다.

<2층 루의 도서함>


   또한 아차산에는 고구려의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애절한 마지막 사랑이야기가 전해진다. 신라가 차지한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 온달은 아차산을 공격했지만 아차산성 아래에서 신라군의 화살을 맞아 전사한다. 그러나 출정에 앞서 맹세했던 잃어버린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한 의지가 강했던지 온달의 관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연리근 소나무>


   이에 평강공주가 내려와 관을 어루만지며 위로하자 비로소 관이 움직여 장사를 치룰 수 있었다고 한다. 아차산에는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전설이 서려 있어서 그런지 연리근(連理根) 소나무가 다정하게 서있고, 광나루역으로 가는 길목의 만남의 광장에는 사랑을 나누는 장군과 부인의 동상이 서있다.

<장군과 부인의 사랑>


   옛날에는 용마산과 아차산은 한양도성의 변방 중의 변방으로 인구밀도가 거의 희박할 정도였으나, 지금은 중랑천 건너 산 너머까지 사람들이 붐비고 큰 도시를 이룬다. 한강을 중심으로 삼국 중 한성백제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가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의 북진으로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미세먼지로 흐린 남산>


   그래서 이곳에는 삼국의 고대 유물들이 지금도 숨 쉬고 있다는 생각에 하찮은 진토(塵土)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다시 해본다. 더더욱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우리의 고대사를 심히 왜곡하는 현실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역사의식을 더 공고히 해야 한다.

<아차산 명품소나무 제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