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황도유학과 민족혼 말살

와야 세상걷기 2025. 7. 1. 00:08

황도유학과 민족혼 말살

瓦也 정유순

   올해 2025년이 을사년이다. 지금부터 120년 전인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떄 사람들은 온통 침통하고 참담한 분위기에 빠졌고 아주 치욕적이고 슬픈 일이었기 때문에 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을 비롯한 우국지사들이 목숨을 스스로 끊음으로써 항거했다. 그후 1907년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으로 군대가 강제 해산되고,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게 된다. 이때부터 일제는 조선의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해 발톱을 보이기 시작한다.

<충정공 민영환 동상>

 

   일제강점기는 단지 군사적 점령이나 정치적 지배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조선인의 언어와 문화를 억압하고, 정신까지 통제하려 한 전방위적 식민화의 시대였다. 조선의 땅은 총칼로 지배당했고, 정신은 황도유학과 내선일체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로 점령되었다. 일본 제국은 조선을 단순한 피지배 지역이 아니라, 제국의 내면으로 흡수하려는 의도 아래, 사상과 교육, 종교, 일상생활까지 철저히 통제했다.

   그 중심에는 일본식 유교사상인 ‘황도유학(皇道儒學)’이 자리하고 있었다. 황도유학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이 자국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형성한 정치적 유학(儒學)이었다. 전통 유교가 인간의 도덕적 수양과 사회적 조화를 강조했다면, 황도유학은 천황에 대한 절대 충성을 중심 윤리로 삼았다. 일본은 유학의 외형을 빌리되, 그 내면을 절대 군주의 충성 윤리로 채운 것이다.

<성균관 묘정비각>

  일제는 조선의 전통 교육을 해체하고, 황도유학을 중심으로 한 정신교육을 강요했다. 성균관(成均館)과 같은 전통 유학 교육기관은 무력화되었고, 학교 교육은 철저히 일본어(日本語), 일본사(日本史)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조선의 학생들은 매일 아침 ‘궁성요배(宮城遙拜)’를 하며 도쿄 황궁을 향해 절하게 되었고,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암송하며 자신을 천황의 충실한 신민(臣民)으로 내면화하도록 강요받았다.

   황도유학은 특히 ‘충효(忠孝)’의 개념을 왜곡하여, 부모에 대한 효도가 천황에 대한 충성으로 연결되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이는 전통적으로 가족 중심의 인간관계를 중요시한 조선 사회의 질서를, 국가 중심의 충성 체계로 바꾸는 효과를 가져왔다. 다시 말해, 가정조차 천황 중심의 국가 시스템에 편입된 셈이다.

  이러한 사상적 지배는 단지 교육기관에만 머물지 않았다. 일제는 민족혼 말살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인의 문화와 정체성 자체를 말살하려 하였다. 조선어 금지, 창씨개명(創氏改名),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 역사 왜곡, 토속 신앙 탄압 등은 모두 조선인의 내면을 일본화하려는 전략이었다. 이 가운데 신사참배는 일본의 신도(神道)를 조선인의 일상에 강제 주입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심지어 각 가정에도 천황의 초상을 걸고, 정기적으로 절하게 하였으니, 일상까지 침투한 이 정신 통제는 물리적 억압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성균관 대성전>

 

  일제의 이러한 정책은 단순한 지배 전략이 아니라, 민족 정체성을 제거하고,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 정점에 놓인 것이 바로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구호였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문구는 표면상 통합과 평등을 말하는 듯했지만, 실상은 조선을 일본 제국의 하위 단위로 완전히 흡수하려는 문화적 병합 선언이었다.

  결국 황도유학이 우리의 정신과 민족혼을 말살함은 물론, 문화 말살 정책으로 이어져 언어와 역사와 생활을 장악하고, 내선일체는 정체성과 제도를 삼켜버리는 삼각형의 완결된 폭력 시스템이 구축된 것이다. 조선인은 자발적 동화를 강요당했고, 창씨개명으로 혈통을 부정하고, 황국신민서사로 자신을 천황의 신하로 정체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구조는 단지 외적인 폭력이 아니라, 내면의 사유와 언어, 감정까지 점령하는 식민주의의 극단(極端)이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일부 조선의 지식인들이 이를 ‘근대적 유학’으로 착각하거나 자발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이다. 황도유학은 유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들어왔지만, 조선의 민본적 유학 정신과는 전혀 무관한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일제에 협력한 일부 유생과 지식인들은 이 사상을 학문으로 인정하고 퍼뜨렸으며, 이는 조선의 전통 유학이 스스로를 부정하게 만든 ‘자기 식민화(self-colonization)’의 비극을 초래했다.

<성균관 명륜당>

 

  이러한 정신적 침략은 해방 후에도 깊은 흔적으로 남았다. 특히 일제 교육을 받은 청소년과 청년들은 이미 자아 형성의 시기에 일본식 가치관을 내면화한 상태였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조차 왜곡된 역사관과 언어 구조 안에서 작동했으며, 이는 해방 이후 정체성 혼란과 문화적 탈근대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조선의 민족혼은 완전히 꺾이지 않았다. 서당에서는 몰래 <논어>, <맹자> 등 전통 경전을 가르치며 민족의 정통을 이어갔고, 일부 유학자들은 황도유학에 맞서 전통 유학의 민본주의와 도덕 저항 정신을 되살리고자 했다. 예컨대 유림 독립운동가 남궁억(南宮檍)은 배재학당 교장 시절, 기독교와 유학의 도덕 정신을 접목한 민족 교육을 실천하였으며, 신사참배를 공개적으로 거부하였다. 김창숙(金昌淑)은 성균관 박사로서 경학을 바탕으로 식민 지배의 부당성을 역설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등 유학을 정신적 무장으로 활용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종교계와 교육자들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저항하였다. 일부 개신교계는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라 하여 집단적인 거부 운동을 벌였으며, 천도교와 원불교 등 민족종교는 교단 내부에서 민족의 자주적 정신을 유지하고자 비밀 결사적 교육을 지속하였다. 또한 향촌의 서당과 사설 교육기관들은 공식 금지에도 불구하고 한문 교육을 지속하며, 민족 전통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이어갔다. 이처럼 민족혼을 지키려는 저항은 다층적으로 전개되었고, 유학자만이 아닌 종교인, 교사, 지역 지식인들에 의해 분산된 형태로 살아 있었다.

   해방 이후에도 황도유학의 잔재는 교육과 언론, 종교 제도 속에 남아 있었지만, 진정한 유학자들과 교육자들은 그것을 하나하나 분별하고 제거해 나갔다. 민족 교육의 복원, 한글 운동, 역사 교과서 재정비 등은 모두 민족혼을 회복하기 위한 흐름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더욱 정밀하고 섬세한 문화적 복원 작업이 필요하다. 특히 식민사학인 반도역사관을 타파(打破)하는 일은 역사 광복을 위해 제일 시급한 문제이다.

우리는 오늘 이 역사를 돌아보며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유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문화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황도유학은 유학의 이름을 빌려 인간을 억압한 사상이었으며, 내선일체는 문화적 동화라는 이름의 폭력이었다. 그것은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민족혼은 단지 감정적 외침이 아니다. 그것은 비판적 사고와 역사 인식, 공동체에 대한 책임 의식으로 이어져야 한다. 황도유학의 교훈은 단지 과거 일제 만행을 향한 비판에 머물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자주성과 정체성을 위협하는 문화적 제국주의, 가치관의 획일화, 기억의 소외에 우리는 끊임없이 맞서야 한다.

   나쁜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 잔재를 철저히 규명하고, 교육과 역사서술에서 바로잡는 일은 단순한 과거 정리가 아니다. 그것은 문화적 주권을 지키기 위한 미래의 방어선이며, 우리 시대의 정신을 세우는 일이다. 우리는 유학(儒學)을, 언어(言語)를, 역사(歷史)를, 무엇보다 인간을 위한 철학으로 되살려야 한다. 그것이 황도유학의 왜곡을 극복하고, 참된 민족혼을 계승하는 길이다.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선생은 말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고 꼭 실천해야 할 말이다.

<국통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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