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 물길 따라(세 번째-3)
(영산포∼목포, 2022년 6월 25일∼26일)
瓦也 정유순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도 몸도 바빠진다. 무안군 몽탄면에서 몽탄대교를 건너 나주시 반남면 고분군으로 바쁘게 이동한다. 영산강은 한강이나 낙동강 등 다른 강에 비해 길이나 유역 면적이 훨씬 작지만 역사는 그에 못지않다. 영산강 유역을 포함한 나주와 함평·무안지방에 널려 있는 고분 등 유적이 발굴되는 것을 보면 단군조선 이전의 배달조선 역사가 보이는 것도 같다. 우리가 도착한 반남면에는 자미산성 주변의 대안리, 신촌리, 덕산리에는 고분들이 널려 있다. 반남(潘南)지역은 반남박씨 본향이다.
<반남면 고분배치도>
<반남면 신촌리 고분군>
전라남도 기념물(제88호)로 지정된 자미산성은 북쪽으로 10km쯤 되는 곳에 나주 회진성(羅州會津城, 전남기념물 87)이 있고, 남쪽으로 월출산, 서쪽으로 영산강이 둘러싸고 있으며, 동쪽은 넓은 평야를 건너 건지산 한치재와 덕룡산 덕룡재를 연결한 크고 작은 구릉들이 영암 국사봉으로 이어져 있어 대평원의 천연 요새를 연상케 한다. 또한 이 지역은 영산강 유역과 남서해안 지역으로 통하는 요충지에 해당한다. 성은 말안장 모양의 산등성이에 흙으로 쌓고 돌로 보강하는 형식으로 축조되었는데, 둘레가 740m 정도다.
<반남면 신촌리 제4호 고분>
반남면에 흩어져 있는 고분들은 대부분 원형이거나 윗부분이 잘린 피라미드 형태이지만 신촌리 6호분이나 덕산리 2호분처럼 앞이 네모지고 뒤가 둥근 형태[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도 있다. <전방후원(前方後圓)> 사상은 고대 우리 조상들의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지다’라는 우주관이기도 하다. 무덤은 대개 땅 위에 거대한 봉분을 쌓아올린 후 그 꼭대기에서 2~3m 내려간 곳에 여러 개의 독널[옹관(甕棺)]을 묻은 것들로, 가족과 같이 가까운 사람들을 차례로 묻은 공동 묘이다.
<반남면 신촌리 제5호 고분>
이때 쓰인 독들은 일반적인 독이 아니고 독널용으로 따로 만들어진 것인데, 길이가 1m에서 1.7m 가량 되고 입지름이 0.8m에서 1.1m 가량 되는 큰 독 하나를 쓴 경우도 있지만, 주로 두 개의 독을 이은 것들이다. 두 독 가운데 큰 독에 머리 쪽을 넣고 다리 쪽에 작은 독을 씌웠으며 두 독의 이음새에는 진흙을 발랐다. 독 안과 옆에는 장신구나 무기, 단지 등의 껴묻거리를 묻었다.[네이버 지식백과(답사여행의 길잡이 5)]
<반남면 신촌리 고분 옹관>
<신촌리 9호분분 금동관-네이버캡쳐>
반남고분군 바로 앞에는 2013년 11월 22일 개관한 국립나주박물관이 있으나 시간에 쫓겨 관람하지는 못했다. 국립나주박물관은 영산강 유역에 남아있는 고고자료를 보존하고 전시하며 호남지역 발굴매장 문화재에 대한 수장고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도심이 아닌 전원 속에 건립되었다. 국립나주박물관은 첨단 기술을 문화영역에 접목한 새로운 개념의 열린 문화공간이다. 국내 박물관 최초로 스마트폰의 NFC기술(접촉식 무선통신)을 이용한 전시안내 시스템을 전시실 전관에 도입하였다고 한다.
<국립나주박물관-내이버캡쳐>
영산강 물길 따라 걸으면서 영산포를 빼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영산강의 명칭은 중류에 위치한 나주와 영산포에 의해 변화되었다. 나주는 신라후기 때 금성(錦城)으로 불리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영산강을 금천(錦川) 또는 금강(錦江)이라 했고, 나루터는 금강진(錦江津)이라 했다. 고려시대에 신안군 흑산면에 속한 영산도(永山島) 사람들이 왜구를 피해 나주 남쪽의 강변에 마을을 개척한 후, 그곳을 영산포(榮山浦)로 부르게 되었고, 조선시대 초기 영산포가 크게 번창하자 강 이름도 영산강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영산강 제5경 금성상운>
영산강은 섬진강보다 길이와 면적이 작지만, 유역이 우리나라 서남부의 핵심 지역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4대강으로 취급한다. 영산강은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나주시·담양군·장성군·함평군·화순군·영암군의 대부분 지역이 유역이며, 전라남도 목포시와 무안군, 전라북도 정읍시의 일부 지역도 유역에 포함된다. 영산강 유역 내에는 영산강 본류를 포함하여, 황룡강, 지석천, 고막원천, 함평천 등 5개 국가하천 구간과 영산강 본류의 최상류, 황룡강의 상류, 광주천 등 168개의 지방하천 구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산강(석관정)>
과거에 영산강은 음력 보름과 그믐 무렵에 밀물이 가장 높은 때인 대조(大潮) 시에 목포로부터 73㎞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어 하천의 수위가 상승하는 감조하천(感潮河川)이었으나, 1981년 12월 영산강 하굿둑이 완공되면서 조수가 차단되어, 현재는 감조 구간이 사라졌다. 과거에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48㎞ 구간은 항해가 가능하여 전라남도 서남부인 나주·무안·영암·해남 등과 다도해의 여러 섬들과의 수운에 이용되었다.
<영산강(다시면)>
고려시대부터 영산포에는 조창(漕倉)이 설치되어 물자 수송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전라도 남부의 쌀은 이곳을 통해 영산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다른 지방으로 수송되었다. 특히 영산강 유역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한 곳으로, 고조선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무문토기들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백제시대의 옹관묘(甕棺墓) 군집들이 강 하류인 나주시와 무안·영암군에서 발견되고 있다. 강 유역의 기름지고 넓은 들판에서 나는 물산들과 바다에서 오는 물자들로 영산포는 일제강점기까지 물자 교역의 중심지였다.
<영산포 등대>
오늘 일정 중 영산포를 마지막으로 잡은 것은 ‘톡 쏘는 바로 그 맛, 삭힌 홍어 맛’을 보기 위해서다. 영산포는 고려 말부터 600년 이상 흑산도 홍어가 거래되어 온 홍어의 본향이다. 흑산도 홍어가 영산포까지 배에 실려 오는 동안 자연 숙성되었던 삭힌 홍어는 톡 쏘는 독특한 맛과 암모니아 냄새를 매력으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삶은 돼지고기와 묵은 김치를 곁들이면 <홍어삼합>이 된다. 처음 적응할 때 고비가 있지만 몇 번 먹다 보면 어김없이 홍어의 그 맛에 푹 빠지게 된다.
<홍어거리>
<홍어회>
<홍어애>
유채꽃으로 노랗게 물든 4월 영산교 아래 강변에서 영산포 홍어축제가 열린다. 한 때 돛배가 드나들고 고깃배로 불야성을 이뤘던 포구였지만 1981년 하굿둑이 막힌 후 뱃길이 끊겨 ‘불 꺼진 항구’가 됐으나, 홍어와 젓갈 집산지로서의 유명세는 이어진다. 전라도 사람들은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음식을 차려도 홍어 없으면 잔칫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홍어는 가오리목의 생선이다. 납작한 마름모 모양으로 생겼으며 바닥 쪽에 입이 있다.
<황포돛배선착장>
<황포돛배>
한 때 영산강 수운(水運)의 주인공이었던 황포돛배는 유람선(遊覽船)이 되어 선착장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국내 유일의 내륙 등대인 영산포등대는 외롭다. 선착장 위로는 솟대가 하늘을 찌른다. ‘솟대’는 삼한(三韓)시대 일종의 추수감사제인 소도에서 기원한 것이다. 소도(蘇塗)는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성지(聖地)이며, 여기에 신단(神壇)을 설치하고, 그 앞에 ‘방울과 북[영고(鈴鼓)]’을 단 큰 나무를 세워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이곳은 국법이 미치지 못해 죄인이 이곳으로 달아나면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솟대>
톡 쏘는 홍어 맛을 보고 미리 예약해 두었던 숙소가 있는 나주시 빛가람동으로 이동한다. 빛가람동은 광주와 전남이 공동으로 2014년 조성한 혁신도시로, 한국전력공사(빛)와 한국농어촌공사(가람) 등이 이전해온 곳이다. 2013년 명칭 공모를 통하여 동명(洞名)이 결정된 <빛가람동>이란 ‘빛’과 ‘가람(강과 산의 순우리말)’을 조합한 것으로, 동(洞)의 북쪽 너머로 흐르는 영산강과 빛고을 광주의 빛이 하나 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빛가람동의 배메산전망대는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을 발산한다.
<배매산 빛가람전망대(주간)>
<배매산 빛가람전망대(야간)>
<계속해서 세 번째 - 4편이 이어집니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산강 물길 따라(세 번째-5 完) (0) | 2022.07.05 |
---|---|
영산강 물길 따라(세 번째-4) (1) | 2022.07.05 |
영산강 물길 따라(세 번째-2) (0) | 2022.07.01 |
영산강 물길 따라(세 번째-1) (1) | 2022.06.30 |
가장 비싼 물 (0) | 2022.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