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둘레길을 걸으며(5, 관악산길)
(낙성대∼석수역, 2017년 6월 8일)
瓦也 정유순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40만 대군으로 침공해오자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가 되어 귀주에서 적을 대파시킨 고려의 명장 강감찬이 태어나던 날 밤 별이 떨어져 생가 터의 이름이 된 낙성대(落星垈)는 1972년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사당 안국사(安國祠)에는 장군의 영정과 신위가 모셔져 있다.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안국문(安國門) 앞마당에서 간단한 몸 풀기를 하고 길을 출발한다.
<강감찬장군 동상>
<안국문>
미세먼지는 관악산의 시야를 흐리게 한다. 서울대학교후문으로 가는 길을 건너 서울영어마을관악캠프 옆으로 하여 서울대정문으로 가는 숲속으로 몸을 숨겨 첫 고개를 넘으면 관악서울대치과병원이 나온다. 관악서울대학교치과병원(冠岳서울大學校齒科病院)은 교육연구와 진료를 통하여 치의학 발전을 도모하고 국민구강보건향상에 기여하기 위하여 설립된 서울대학교치과병원의 분원으로 2015년 4월에 개원하였다. 그리고 바로 밑에는 서울대학교정문이 나온다.
<서울대학교 정문>
서울대학교는 1945년 11월 100명의 인사들이 일제가 세운 경성제국대학 건물을 활용하여 국립종합대학 설립을 제안하여 1946년 10월에 국립서울대학교로 개교하였다. 그러나 유림(儒林)을 비롯한 민족진영에서는 성균관(成均館)을 국립대학으로 하자며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국대안(國大案) 반대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새 출발의 의미로 학교의 공식명칭을 국립서울대학교에서 서울대학교로 바꾸었다.
<낙성대에서 서울대로 넘어가는 고개>
1970년부터 동숭동(문리대학·법과대학·예술대학 미술부), 연건동(의과대학), 공릉동(공과대학), 경기도 수원(농과대학), 종암동(상과대학), 을지로(사범대학), 소공동(치과대학), 남산동(예술대학 음악부) 등지에 흩어져 있던 캠퍼스를 통합하기 위하여 관악캠퍼스 조성에 착수하였고, 1975년부터 대학본부와 단과대학들이 이전하였다.
<관악산 가는 길>
2003년에는 수원 상록캠퍼스에 있던 농과대학과 수의과대학도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고, 의과대학·간호대학·치의학대학원이 있는 연건캠퍼스는 존속하여 지금에 이른다. 한편. 2011년 12에 시행된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립대학에서 국립대학법인으로 전환하였다. 지금은 관악캠퍼스에 인문대학 등 14개 대학이, 연건동캠퍼스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이 있으며, 전문대학원은 법학전문대학원 등 9개 있다.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네이버캡쳐>
서울대정문을 비껴 돌아서면 관악산공원이 나온다. 관악산(冠岳山, 632m)은 서울 관악구와 금천구, 경기도 안양시와 과천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최고봉은 연주대로 1968년 1월에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예로부터 개성의 송악, 가평의 화학, 적성의 감악, 포천의 운악과 더불어 관악산은 경기오악(京畿五岳)의 하나로 꼽혔다. 산세가 화염(火焰)을 가진 산으로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 경복궁 앞에 해태상을 세웠고, 숭례문 앞에는 작은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미세먼지로 흐린 관악산>
<관악산공원 정문>
관악산공원 정문을 통과하여 관악산정상으로 향하다가 우측 산길로 접어들면 장승이 도열한다. 장승은 돌이나 나무에 사람의 얼굴을 새겨서 마을 어귀나 길가에 세운 푯말로 주로 10리 또는 5리 간격으로 세워 이정표 역할을 하기도 하고,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나무나 돌기둥 상부에 사람의 얼굴을 소박하게 그리거나 조각하여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남녀 한 쌍의 가슴에 글자를 새겨 설치한다. 이곳 장승들은 2011년 7월에 발생한 집중호우로 쓰러진 나무들을 활용하여 만든 것이다.
<관악산 장승 길>
장승 길을 따라 데크계단을 올라가면 관악산 정상을 비롯하여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를 조망할 수 있는 공간은 리기다소나무의 잎이 무성하여 앞이 가린다. 솔잎이 3개씩 묶여 나오는 리기다소나무는 일제강점기 때 아카시와 함께 사방(砂防)조림용으로 들어왔고, 1970년대 대규모 조림사업으로 식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리기다는 소나무류 가운데 송진이 많고 낙엽의 분해속도도 오래 걸리기 때문에 숲 바닥의 토양은 척박해지고, 새나 곤충도 멀리하기 때문에 자연생태계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한다.
<리기다소나무>
숲길을 빠져나와 자동차가 다닐 만큼 넓은 길이 나온다. 길가에 보덕사와 약수암 표지석이 서 있지만 들르지 못하고, 얼굴 붉히며 고개를 내민 조록싸리와 눈만 맞춘다. 길옆으로 조금 비켜선 곳에는 묘(墓) 자리가 좋아 후손들이 잘되었는지 많은 석물로 고급스럽게 치장한 묘소가 있고, 비석(碑石)에는 고인의 관직(이조판서)과 가문(남원 윤 씨)의 내력을 소상하게 적어 놓았다.
<조록싸리>
<잘 정돈된 묘>
‘관악산 도란도란 걷는 길’은 서울둘레길 중 관악산 관문부터 호압사까지 총3.5㎞ 구간을 함께 지정한 길이다.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오르내리며 함께 걷는 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편안하고 아늑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긴 막대기 위에 나무로 만든 새를 달아 놓은 솟대는 이 길을 이용하는 모든 이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한다. 이 솟대들도 2011년 7월 집중호우로 쓰러진 나무들을 활용하여 만들었다.
<관악산 솟대-네이버캡쳐>
잣나무 숲이 우거지고 군데군데 평상이 들어선 자리에서 준비한 도시락으로 오전을 마감하고, 낮은 능선을 넘으면 ‘삼성산성지’가 나온다. 삼성산(三聖山, 481m)은 관악산과 연결된 산으로 원효, 의상, 윤필의 세 고승이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수도에 전진하던 곳이 삼막사의 기원이며, 아울러 삼성산의 산명도 이 세 고승을 기리기 위해 삼성산이라 칭했다는 설이 일반에 널리 알려져 있다.
<잣나무 숲>
그러나 1836년(헌종2년)에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던 프랑스 모방(P. P. Maubant) 신부와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L. J. M. Imbert) 주교, 샤스탕(J. H. Chastan) 신부 등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1839년 9월 기해박해로 효시를 당한 뒤 신도 박 박오로 등이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서강대 뒷산 노고산에 안장하였다가, 과천의 서쪽 삼성산 북쪽 끝자락에 있는 박 씨의 선산으로 이장하였고, 1901년에는 명동성당 지하묘지로 옮겨졌다. 그 후 삼성산 무덤 자리를 다시 찾은 뒤, 1989년 무덤이 있던 자리 일대의 임야 약16,000평을 확보하여 세 성인의 무덤을 조성하고 ‘삼성산 순교성지’를 만들었다.
<삼성산성지 표지석>
<세 신부의 묘>
계곡을 건너 돌배나무가 있는 고개를 넘으면 호암산호압사(虎岩山虎壓寺)가 나온다. 호압사는 조선개국과 더불어 한양에 경복궁을 지을 때 풍수적으로 관악산의 화기(火氣)와 호암산의 호랑이 기운을 누르기 위해 숭례문 편액의 숭(崇)자 위의 뫼산(山)자를 불꽃이 타오르는 불화(火)의 형상으로 표현을 했고, 호랑이 꼬리부분에 해당하는 호암산(393m) 자락에 절을 지어 호랑이의 기운을 눌렀다고 한다. 이는 호압사가 불교 수행의 도량(道場)이면서도 풍수적으로는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돌배나무>
<호압사>
호압사에서 호암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호압사포대화상 석상이 있다. 포대하상은 체구가 크고 배가 불록하며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니시고 항상 서민들과 함께 하고, 특히 어린이나 노인 병약한 사람들에게 복과 덕을 베푼 스님이다. 전설에는 배를 만지면 부자가 되고, 귀를 만지면 장수하며, 머리를 만지면 총명해진다고 한다. 포대화상은 이곳을 찾는 모든 분들에게 평안과 소원성취를 기원하고 있는 것 같다.
<호압사 포대화상>
편안한 호압사 산책길을 따라 내려오면 호암산 인공폭포가 나온다. 산사태로 노출된 자연암반을 폭포로 조성하고 폐 약수터 물을 활용하여 서울둘레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특색 있는 볼거리와 여름철 청량감을 제공하는 것 같다. 폭포 가동시간은 5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09시, 12시, 15시 세 차례에 걸쳐 30분 씩 가동한다. 우리는 폭포 옆에 붉은 색으로 활짝 핀 수염패랭이와 함께 오후 3시를 기다려 인공으로 시원하게 쏟아지는 호암산 폭포를 바라본다.
<수염패랭이>
<호암산 인공폭포>
관악산 자락의 시흥동지역은 토템신앙으로 기도를 올리던 장소로도 유명한 것 같다. 토템신앙은 하늘의 해와 달과 별자리, 땅위의 산과 들, 바다와 계곡, 마을의 우물, 바위와 고목, 가택의 대들보와 부뚜막, 뒷간과 굴뚝까지도 우주만물을 신으로 모시는 형태이다. 그래서 그런지 주변에는 많은 돌계단과 돌탑이 쌓여 있다.
<관악산의 돌탑>
두 그루의 때죽나무는 서로 손을 내밀어 마주 잡고 세상을 살아가는 연리지(連理枝)를 연출한다. 연리지는 화목한 부부나 남녀의 사이를 비유적으로 이르기도 한다. 생물이던 무생물이던 존재하는 그 입장에서 보면 존재해야할 이유가 간절하거늘,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경외(敬畏)심을 다시 생각해 보며 석수역에 도착한다.
<때죽나무 연리지>
<석수동 스탬프 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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