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계룡산의 마지막 잎새

와야 세상걷기 2016. 11. 14. 20:13

계룡산의 마지막 잎새

(20161112)

瓦也 정유순

   요즘 시국이 하 수상하다. 비선조직이 국권을 농단하는 일이 벌어져 나라꼴이 우습게 되었고, 연일 나라가 어수선하다. 심지어 100만 명이 넘는 국민이 경향 각지에서 올라와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대한민국 심장인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다고 하여 긴장감이 온 산하(山河)를 휘감는다. 이러한 때에 전에 근무했던 동료선배와 일부 현직 후배들과 화합의 장을 같기 위해 계룡산으로 발걸음을 무겁게 옮긴다.


<계룡산 원경>


   계룡산(鷄龍山, 845)은 주봉인 천왕봉을 비롯해 연천봉·삼불봉·관음봉·형제봉 등 20여 개의 연봉(連峰)의 능선모양이 닭 벼슬을 머리에 쓴 용의 형상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옛날부터 계룡산은 풍수지리상으로도 우리나라의 명산에 꼽혀 조선시대에는 계룡산 계곡에 새로운 도읍지를 새우려고 했을 정도였고, 특히 정감록(鄭鑑錄)에는 이곳을 변란을 피할 수 있는 장소인 십승지지(十勝之地) 중의 하나로 명성을 떨쳤으며, 이러한 도참(圖讖)사상으로 인해 신흥종교 등 민속신앙이 성행하였으나 1984년 이후 종교 정화운동으로 모두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계룡산-동학사 입구>

   동학사탐방지원센터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천정탐방지원센터를 지나 큰배재를 향하여 발을 옮긴다. 위로 올라갈수록 활엽수들은 잎이 거의 떨어져 벌거숭이가 되고 참나무 등은 아직 잎과 이별을 못해 말러비틀어진 채 가지에 매달려 있다. 낙엽은 시시각각 많은 여러 색소를 가지고 변신을 계속하다가 결국은 나무와 이별을 하여 흙이 되고, 흙이 된 낙엽은 다시 나무의 일부가 되어 숲을 이룬다. 우주의 대순환(大循環)의 과정이고 시작이다.


<동학사 입구>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야생화군락지를 지나 천정골갈림길 까지 올라가 숨을 고른다. 길을 걸을 때마다, 특히 산길을 걷노라면 한없이 겸손하고 자세를 더 낮추어야 한다는 진리를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올라갈 때는 숨이 가빠오더라도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지나온 나를 돌아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천정지원탐방센터>


   내 딴에는 정직하고 바르고 곧게 살아 왔다고 자부하지만 지나온 행적들을 곰곰이 돌이켜 보면 엄청난 큰 곡선을 그린다. 세상이 주어진 진리(眞理)대로, 세상이 정한 정의(正義)대로, 사람이 만든 윤리(倫理)대로 지키며 살아 왔다고  하건만, 그 점들의 궤적은 산을 올라가는 길처럼, 계곡 사이를 비집고 흘러가는 강물처럼 심하게 구불구불 거린다.


<계룡산국립공원 안내도>


   천정골갈림길에서 다시 힘을 내어 올라오면 큰배재가 나온다. 이 고개는 대전 유성 사람들과 공주 사람들이 넘나들던 소통의 공간 같다. 물산(物産)을 교환하고 세상사는 이야기를 교환하는 삶의 현장을 이어주는 생명의 통로였던 것 같다. 우측으로 신선봉으로 가는 길이지만 발길은 남매탑(일명 오누이탑)으로 돌려진다.


<큰배재-탐방로 안내>


   남매탑(男妹塔)은 동학사에서 갑사로 넘어가는 계룡산 중턱에 있는 두 개의 탑으로, 충남 지방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곳에 청량사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청량사지쌍탑으로도 불린다. 청량사는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이 탑만 남았다고 한다. 두 탑은 백제계 양식을 띤 탑으로 5층 석탑은 부여의 정림사지석탑을 모방하였고, 7층 석탑은 익산의 미륵사지석탑을 모방하였다고 한다.

<계룡산 남매탑>


   남매탑의 전설은 계룡산에서 수도에 정진하던 신라의 고승 상원스님이 사람의 뼈가 목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호랑이를 구해주었는데, 호랑이는 며칠 뒤 감사의 마음으로 상주에 사는 처녀를 스님에게 물어다 주는데 스님은 이 처녀를 정성을 다해 보살펴 주고 처녀는 이에 감화를 받아 스님에게 연정을 느꼈으나 수도정진 하는 스님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고심 끝에 남매의 연을 맺어 청량암을 짓고 수도에 정진하다가 서방정토(西方淨土)로 떠난 뒤에 제자들이 세운 부도가 지금 남매탑이라고 한다.


<계룡산 남매탑>


   다른 도반들께서 삼불봉을 다녀오는 동안 남매탑 옆에 있는 상원암(上元庵)도 둘러보고 늦가을 정취를 흘러간 추억과 함께 막걸리 잔에 담아서 가는 세월을 붙잡아 본다. 동학사 쪽으로 내려오는데 역시 경사가 가파른 길이 계속되어 가끔은 다리가 후들거릴 때도 여러 차례 있었다.

<상원암>


   동학사(東鶴寺)724(성덕왕 23)에 상원(上願)스님이 암자를 지었던 곳에 그의 제자인 회의(懷義)가 절을 창건하여 청량사(淸凉寺)라 하였고, 920(고려태조 3)에 도선(道詵)이 지금의 자리에 중창한 뒤에 태조의 원당(願堂)이 되었다. 그리고 936년 신라가 망하자 류차달이란 사람이 이곳에 신라의 시조와 박제상(朴堤上)을 제사를 지내기 위해 동학사(東鶴祠)를 건축하였고, 이후 사당이 번창하자 절로 바꾸어 이름도 동학사(東鶴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동학이라는 이름은 동쪽에 학모양의 바위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동학사 일주문>

<동학사 대웅전>


   특히 1458(조선세조 4)에 세조가 동학사에 와서 단종을 비롯하여 정순왕후(定順王后)와 안평대군(安平大君금성대군(錦城大君) 등 대군,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정분(鄭苯) 등 삼정승, 그리고 사육신과 세조의 왕위 찬탈(簒奪)로 원통하게 죽은 280여 명의 성명을 비단에 써서 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한 뒤 초혼각(招魂閣)을 짓게 하였고, 인신(印信)과 토지 등을 하사하고 동학사라고 사액(賜額)하면서 승려와 유생이 함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동학사와 계룡산>


   계룡산에는 갑사와 신원사, 그리고 동학사 등 3대 사찰이 있는데, 각 사찰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각각 다른 것 같다. 갑사는 불교전통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고, 신원사는 경내에 산신(山神)을 모시는 중악단(中嶽壇)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의 풍모가 짙게 보이며, 동학사는 유교정신이 어느 정도 스며있는 사찰로 평가되는 것 같다.

<계룡산 동학사>


   동학사에도 휴일을 맞이한 내방객들로 붐빈다. 경내를 두루 살펴보고 나오는데 동학사 일주문 안에도 미타암(彌陀庵길상암(吉祥庵관음암(觀音庵) 등 많은 암자들이 줄을 잇는다. 동학사불교문화원 앞 대로를 따라 나오는데 길옆의 단풍들은 석양에 물들어 가을이 더 붉어진다.

<미타암>

<동학사불교문화원>


   가을이라는 계절은 이미 끝물을 향해 멀리 가버렸지만 아직도 그 흔적들은 삶에 대한 희망을 잃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담쟁이덩굴 잎이 다 떨어질 때 자기의 생명도 끝난다고 생각하는 환자를 위해 같은 집에 사는 노화가(老畵家)가 나뭇잎 하나를 벽에 그려 심한 비바람에도 견디어낸 진짜 나뭇잎처럼 보이게 하여 삶에 대한 희망을 준다오 헨리마지막 잎새처럼 아직도 가지 끝에 매달려 있는 하나의 나뭇잎이라도 세상을 힘들어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지막 희망이었으면 한다.

<동학사 입구 단풍>

<동학사 입구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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