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소백산 죽계구곡

와야 정유순 2022. 7. 14. 23:08

소백산 죽계구곡

(2022 7 9)

瓦也 정유순

  장마철에 새벽 잠 깨어 눈 비비고 일어나 소백산으로 가는 버스 안은 나그네의 포근한 안식처 같다. 가는 도중에 쉬었다 가는 천등산휴게소에는 고구려 기상이 흐르는 고구려유적공원이 있어 선조들의 기운을 충전해 본다. 입구에 있는 삼족오(三足烏)는 발이 세 개 달린 태양에 사는 전설의 까마귀로 고구려가 태양의 나라임을 상징하는 문양이며, 공원 중앙에 있는 개마무사(鎧馬武士)는 고구려의 기상을 역동적으로 재현해 놓은 것이다

<삼족오(三足烏)>

 

<개마무사(鎧馬武士)>

 

  버스는 풍기나들목을 나와 풍기읍 삼가리 달밭골에 도착한다. 조선 명종 때 격암유록(格菴遺錄)을 저술한 남사고(南師古, 15091571)는 소백산을 지나다가 갑자기 말에서 내려 넙죽 절하며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고 했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택리지(擇里志)에서 병란을 피하는 데는 태백산과 소백산이 제일 좋은 지역이라고 했고, 정감록(鄭鑑錄)은 달밭골이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일승지에 포함된다고 하여 해방과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북한에서 월남한 많은 사람들이 피난처로 살고 있다

<소백산자락길표지석>

 

  우리의 조상들은 어두운 밤하늘에 휘영청 밝은 달을 보며 척박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미래의 희망을 빌었는데, 달밭[월전(月田)]은 배추 밭에서 배추를, 무 밭에서 무를 뽑듯이 달밭에서 달을 가꾸어 뽑는 곳이었다. 여기서 달의 진정한 의미는 지혜를 말하는데, 실제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달빛을 볼 수 있는 곳이 달밭골이다. 그래서 신라시대에는 화랑들이 심신을 단련하던 곳이었고, 조선시대에는 단양 영춘면 나루터로 소금을 구하러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달밭골 장승>

 

  소백산 정상을 오르는 가장 빠른 길로 알려진 소백산자락길로 접어들어 조금만 가면 소백산국립공원에서 운영하는 야영장이 나온다. 가는 길목에는 <소백산자락길 홍보관>이 있고, <달맞이길 탐방로>가 이어진다. 습기가 많아 더 후덥지근한 더위에 몸에서 솟아나는 땀이 온 몸을 적시는데, 길옆에는 <변치 않는 귀여움, 순결>을 나타내는 <하늘말나리>가 활짝 웃는다

<소백산야영장>

 

<하늘말나리>

 

  한 시간 여를 오르막으로 힘겹게 올라온 달밭골 남쪽 성재쉼터 자락에는 아름드리 잣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뤄 하늘을 가린다. 아주 먼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자연과 더불어 생활해 왔던 그 유전자를 받아서 그런지 숲 속에 들어가면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해 진다. 특히 잣나무를 비롯한 침엽수 숲은 외부의 침입자로부터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피톤치드를 내뿜는 데, 이 물질이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달밭골 잣나무숲>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는 청아하고 내를 건너는 데크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국망봉과 초암사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소백산에서 낙동강의 첫 물길이 열린 이래 수많은 정한(情恨)의 흔적이 서려 있다. 풍기군의 양민이었던 배순(裵純, 15341614) 75살 때인 1608(선조 41) 선조(宣祖)가 승하하자 삼년복(三年服)을 입고 국망봉에 올라 매삭망(每朔望)을 위해 곡제사(哭祭祀)를 지냈다

<국망봉 입구>

 

  주세붕(周世鵬), 이황(李滉), 조목(趙穆), 노경임(盧景任), 신민일(申敏一) 등의 문사들이 쉼 없이 소백산을 유희(遊戱)하던 길이다. 또한 이 물길을 따라 의상(義湘) 3천명의 문도들을 모아놓고 90일간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했으며, 조계종(曹溪宗)의 창시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9년 간 수행하며 오르내리던 유서 깊은 길이다. 그래서 소백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은 유불문화(儒佛文化)를 꽃피우고, 민족문화를 중흥시키는 발원지다

<죽계1곡 금당반석(?)>

 

  초암사 가는 길로 접어들면 죽계구곡(竹溪九曲)이 시작된다. 초암사(草庵寺)는 소백산 국망봉 남쪽 계곡 아래에 의상대사가 세운 조계종 사찰로, 의상이 부석사 터전을 보러 다닐 때 초막을 짓고 수도하며 임시 기거하던 곳이다. 부석사를 지은 후 이곳에 다시 절을 세웠는데, 우람한 거석 축대, 주춧돌 등으로 미루어 규모가 큰 절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한국전쟁으로 파괴되어 다시 지은 법당이 남아 있다. 초암사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이 있고 그 밑에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이 따로 있다

<초암사 대적광전>

 

<초암사일주문>

 

  죽계천은 국망봉에서 발원하여 소수서원이 있는 백운동을 지나고, 죽계구곡은 초암사에서 배점리에 이르는 계곡을 말한다. 이황은 소수서원 앞의 백운동 취한대를 1곡으로 정하고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9곡을 이름 지었다. 순흥부사 신필하는 초암사 바로 위 금당반석을 1곡으로 하여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현재의 모습은 신필하가 지정한 것이다

<죽계3곡 척수대>

 

  신필하가 정한 죽계구곡은 1곡 금당반석(禁堂盤石), 2곡은 청운대(靑雲臺), 3곡은 척수대(滌愁臺), 4곡은 용추(龍湫), 5곡은 청련동애(靑蓮東崖), 6곡은 목욕담(沐浴潭), 7곡은 탁영담(濯纓潭), 8곡은 관란대(觀瀾臺), 9곡은 이화동(梨花洞)이다. 계곡 밑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물, 울창한 푸르른 숲, 그 사이로 보이는 하얀 바위들이 모여 어느 지점에서든지 주저앉아 발을 담그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계곡이다

<죽계6곡 목욕담> 

 

  제1곡인 금당반석을 시작하여 제9곡 이화동까지 약 십리 길을 내려오는 동안 흐르는 물소리는 천상의 소리 같고 계곡 마지막에 있는 거북바위는 편히 쉬었다 가라고 손짓한다. 현재 1, 2, 4, 5, 9곡은 이름만 전해져 추정만 하고 있다고 하는데, 나그네의 눈에는 전 구간이 비경이고 절경이라 이곳에 있는 동안은 신선이 되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일어난다. 순흥면 배점리 주차장에 도착하여 버스로 소수서원으로 이동한다

<거북바위>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맑은 죽계천변에 자리한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우리나라 사립교육기관의 효시(嚆矢)로 주세붕(周世鵬, 14951554)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풍기 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성리학의 선구자 문성공 안향(安珦) 선생이 젊어서 공부하던 백운동에 1542(중종 37) 영정을 모신 사묘(祠廟)를 세웠고, 이듬해에 중국에서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을 본떠 양반자제 교육기관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소수서원 표지석>

 

<소수서원 사료관>

 

  원래 이 자리는 신라 후기 시절에 창건된 숙수사(宿水寺)가 있던 자리인데, 안향이 젊은 시절 공부했던 곳으로 당시 유물로는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그 후 퇴계(退溪)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하면서 1550(명종 5)에 왕에게 진언을 올려 紹修書院’(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 받아 사액서원으로 오늘에 이른다. 소수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살아남은 47개소 중 하나이며 사적으로 2019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참조 : https://blog.naver.com/waya555/222511814269

<소수서원 당간지주>

 

  소수서원에서 죽계천을 건너 소수박물관으로 향한다. 2004 9월 개관한 소수박물관은 유교와 관련된 전통문화 유산을 체계화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유교의 이상을 간직한 소수서원과 부석사(浮石寺)를 비롯해 단종복위운동의 정축지변(丁丑之變)과 관련한 유적 외에도 수많은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소수박물관은 이러한 문화유산의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영주시에서 설립한 유교전문박물관이다. 그러나 부석사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불교의 반가사유상이 이채롭게 전시되어 있어서 눈길을 끈다

<소수박물관의 반가사유상>

 

  정축지변(丁丑之變)1457년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의 단종(端宗) 복위운동 거사가 실패하면서 세조에 의해 순흥부 주민이 학살된 사건을 말한다. 이후 역모를 주도한 혐의로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려 사사하였고, 모의에 가담한 이보흠을 참형에 처하였다. 이후 순흥부의 주민들을 처형한 뒤 순흥부(順興府)를 폐지하고 현()으로 강등시켰으며, 순흥 인근 30리 지역주민들에게도 혐의점을 뒤집어 씌워 처형한 사건이다

<소수서원 은행나무>

 

  소수서원과 선비촌 사이의 죽계교(竹溪橋)를 건너면 바로 영주시가 운영하는 선비촌으로 소수서원과 함께 운영한다. 조선시대 전통가옥을 복원하고 생활상을 재현하여, 유교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학습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선비촌은 선비들이 실제로 살았던 생활공간을 그대로 복원하였고, 그들의 정신을 담은 <수신제가(修身齊家)>, <입신양명(立身揚名)>, <거구무안(居求無安)>,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의 네 구역으로 조성되어 있다

<영주 선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