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영산강 물길 따라(세 번째-2)

와야 정유순 2022. 7. 1. 00:49

영산강 물길 따라(세 번째-2)

(영산포목포, 2022 6 2526)

瓦也 정유순

  함평천교를 지나면 무안군 몽탄면 봉산리다. 몽탄면(夢灘面)은 무안군 동부에 있는 면으로 쌀·보리·고구마·양파 등 농업이 주이며, 영산강을 이용한 수산업도 활발하여 장어와 숭어의 어획량도 많다. 봉산리(鳳山里)는 사방이 모두 제방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 신설포나루를 통하여 나주시의 넓은 평야와 접해있는 지역이다. 자연마을로는 기동(基洞), 옥반동(玉盤洞), 기룡동(騎龍洞)마을 등이 있다

<함평천>
 

  오전을 마감하기 전에 엄다면에 있는 자산서원으로 차량 이동한다. 자산서원(紫山書院) 1589(선조 22)에 일어난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으로 불리는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연루된 정개청(鄭介淸, 15291590)이 유배 중 세상을 떠나자 그의 문인들이 스승의 신원운동을 전개하면서 1616년 건립하였다. 1678년 조정으로부터 자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나 계속되는 남인과 서인의 당쟁으로 훼철과 복설(復說)을 되풀이하였다

<자산서원 표지석>

 

  이후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이르기까지 무려 5차례의 훼철을 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에 대한 포폄(褒貶)도 기복을 겪는다. 또한, 호남지방의 사류들이 다수 이 분쟁에 관련되어 조선 후기 정치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쟁점을 제공하고 있다. 1957년에 복설된 뒤 1988년 대규모의 복원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전라남도유형문화재(146)로 지정된 정개청 문집 <우득록(愚得綠)> 목판이 소장되어 있다.

<자산서원 대도문(외삼문)>

 

 

  곤재우득록목판 (困齋愚得錄木版)은 곤재 정개청의 문집을 널리 간행하기 위해 1689(숙종 15)에 왕의 특명으로 시작되어 1692(숙종 18)에 완성된 목판이다. 목판은 감나무를 기름에 튀긴 특재(特材)라고 전한다. 우득록은 본편 3권과 부록 2권 등 총 5권으로 모두 334편의 글이 실려 있다. 이 목판은 원래 총 108매로 만들어 졌으나, 현재는 48매만이 전한다. 이 책은 호남 사림의 동향과 인맥을 살피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곤재 우득록 목판>

 

  정개청은 자 의백(義伯), 호 곤재(困齋)이고 나주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이후 보성의 영주산사(瀛州山寺)에 들어가 유학, 천문지리, 약학, 산수, 역학 등을 공부하여 학문의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41세에는 지금의 제동마을에 윤암정사(輪巖精舍)를 짓고 학자들과 교류하며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1590년 기축옥사로 함경도 경원 아산보(阿山堡)에 유배되었다가 병사하였다. 서원에는 정개청과 참봉을 지낸 그의 동생 정대청(鄭大淸)을 배향하고 있다

<자산서원 윤암사(사당)>

 

<자산서원묘정비>

 

  점심식사 후에는 무안의 식영정으로 간다. 이곳 무안사람들은 영산강을 사호강 또는 곡강이라 한다. 사호강(沙湖江)은 가뭄에 물이 말라 모래사장처럼 변한 모습을 말하는 것 같다. 범람이 잦았다는 것은 비옥한 농토라고 할 수 있지만 바꿔 말해 홍수와 가뭄 등으로 잦은 피해가 있다는 지형이다. 실제로 최근까지 영산강은 국내의 대표적인 수해지역으로 자주 거론된 적이 있다. 또 다른 이름인 곡강은 사행천(蛇行川)처럼 곡선(曲線)을 이룬다는 뜻 같다

<영산강>

 

  식영정이 있는 몽탄면 이산리(梨山里)는 영산강이 굽이도는 U자형의 움푹 파인 곳에 자리한다. 강 건너편의 나주시 동강면 옥정리의 느러지전망대에서 바라보면 곡강을 따라 한반도 지형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영산강 자전거길 따라 펼쳐지는 예쁜 수국도 인상적이라고 한다. 느러지전망대의 느러지는 이곳에 흐르는 영산강이 나주평야를 지날 때 강폭이 넓어져 유속이 느려져 부른 이름 같다

<느러지전망대에서 본 한반도지형>

 

  곡강(曲江)의 매력에 빠져 정자를 세운 이가 있으니 한호(閑好) 임연(林煉, 15891648)이다. 그가 세운 식영정(息營亭)은 영산강의 대표적 굽이인 몽탄노적에 자리한 배뫼[이산(梨山)]마을의 언덕에 세워졌다. 정면 3, 측면 3칸으로 내부 중심에는 방이 갖춰져 있어 비교적 큰 크기가 특징인 정자다. 몽탄노적(夢灘蘆笛) 곡강을 휘돌아 흐르는 여울소리가 마치 꿈속에서 갈대가 피리 되어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해석해 본다

<영산강 제2경 몽탄노적>

 

  무안의 식영정(息營亭) 열심히 일을 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라는 뜻 같다. 정자 안쪽에는 <鳶飛魚躍(연비어약)>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는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는 것으로, 만물이 저마다의 제자리를 얻고, 자연 만물이 순리대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이는 <시경>에 나오는 말로 세상의 모든 존재가 자연의 순리대로 각각 제자리를 얻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군왕의 덕행과 교화가 널리 영향을 끼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식영정>

 

<연비어약>

 

  무안 식영정은 임연이 1630년에 무안에 입향(入鄕) 이후 강학소요처로 지은 정자로 영산강[이호(梨湖)]과 그 주변의 경관과 어울려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은 곳이다. 그리고 임연의 증손으로 역사서인 <동사회강(東史會綱)>을 지은 문인학자인 노촌(老村) 임상덕(林象德1683~1710)이 제현(諸賢)과 교류하는 등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의 나주임씨 강학교류 공간이었다

<임연 유허비>

 

  1643년 임연이 지은 복거록(卜居錄)에는 정자를 짓고 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혹시 식영정에 있는 푸조나무와 팽나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푸조나무(둘레 3.2)와 팽나무(둘레 3.4)는 똑 같이 수령이 510년이고 높이도 12이며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푸조나무나 팽나무는 쌍떡잎식물 쐐기풀목 느릅나무과의 낙엽교목이다. 푸조나무는 연하면서도 단단하여 저울자루·절구·세공재 등 귀한 용도로 쓰이고, 팽나무는 오래전부터 우리 인간에게 신목(神木)으로 인식되었던 민족 식물이다

<푸조나무>

 

 

  푸조나무는 남쪽의 따뜻한 해안 및 마을 부근에서 자라며, 수직적으로는 해발 700m 이하 지대에서 자라며, 습기가 없는 땅에서는 생육이 불량하다. 보통 팽나무에 비하여 엽맥(葉脈)이 잎 가장자리 끝까지 닿는 것이 특이하다. 팽나무는 우리나라 중남부지방의 온화한 마을 어귀나 중심에서 마을나무와 당산나무로 자리 잡아 전통 민속경관을 특징짓는 대표 종으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신성한 공간인 당집과 함께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팽나무 열매는 새들의 먹이로 유용하여 생명 부양 나무로서 역할을 한다

<팽나무>

 

  몽탄노적(夢灘蘆笛) 곡강이 감싸고 흐르는 몽탄 식영정을 나와 하류로 조금 내려오면 대치천과 약곡천이 영산강과 합류하고 그 밑에는 석정포가 있다. 대치천(大峙川)은 무안군의 마협봉(286m) 동쪽 산록 일대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영산강으로 합류하는 지방 하천으로 이름은 발원지의 마을 지명인 몽탄면 대치리에서 유래되었다. 약곡천(藥谷川)은 무안군 몽탄면 약곡리에서 발원하여 몽강리 영산강으로 합류하는 지방하천이다

<영산강과 대치천의 합류>

 

  몽탄면의 몽탄(夢灘)’이란 지명은 고려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공략하다가 현 나주 동강면으로 퇴각하였으나, 영산강이 막혀 건너지 못하고 있던 중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 앞의 호수는 강이 아니라 여울[]이니 빨리 건너라고 하여 현재의 몽탄나루를 건너 견훤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어서 몽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조선 시대에 무안현 박곡면이었다가 1939년에 몽탄면으로 개칭하였다

<영산강(몽탄)>

 

  몽탄면 몽강리 일원은 조선 후기부터 1970년대까지 옹기와 질그릇을 생산하던 주요 도요지로 백자와 분청사기를 만들어 왔으며, 1960년대에는 마을주민 약 90여 호가 옹기생산에 참여하였고, 4개의 가마와 7개의 공방이 운영되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옹기 등은 배편으로 전국 각지에 판매되었고, 점토와 고령토는 강 건너 나주시 동강면에서 들여와 원료 및 완제품이 완벽하게 유통되는 요충지가 바로 석정포나루였다

<석정포공원 조형물>

 

  몽강리(夢江里)는 농촌마을로 영산강의 풍부한 물줄기의 영향으로 기름진 땅을 갖고 있는 지역이다. 자연마을로는 신촌, 언동, 청수동마을이 있다. 신촌마을은 질그릇을 적지라 하여 점촌(店村)이라 불렸으나, 후에 신촌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언동마을은 따뜻한 곳이라 하여 온동(溫洞)이라 불리던 것이 변음되어 언동(彦洞)이 되었다. 청수동(淸水洞)은 이곳의 물이 맑고 푸르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계속해서 3-3편이 이어집니다.) 

<석정포나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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