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영산강 물길 따라(두 번째-5)

와야 정유순 2022. 6. 8. 23:23

영산강 물길 따라(두 번째-5)

(용산교관방제, 2022 5 2829)

瓦也 정유순

  영산대교를 지나 마주한 곳은 안창동 구진포나룻터 부근 강 건너편의 <앙암(仰岩)>이라는 가야산 북측의 벼랑 바위다. 충남 부여의 낙화암 같기도 하지만 바위 아래 강물이 소용돌이치면서 깊은 소를 만들어 영산강을 다니던 배들이 자주 침몰하여 용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이 바위에는 삼국 시대부터 전해오는 아랑사와 아비사의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데, 바위 절벽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애절하게 바라보는 모습이 남아있어 그들의 모습이 눈에 잘 보이는 사람은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앙암>

 

<영산강(앙암)>
 

  발길은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에 있는 영모정 앞에서 멈춘다. 전라남도기념물(112)로 지정된 영모정(永慕亭)은 나주임씨 종중에서 소유·관리하고 있다. 1520(중종 15) 귀래정 임붕(歸來亭 林鵬)이 창건하였고, 그 손자인 명문장가 백호 임제(白湖 林悌)가 글을 배우고 시작(詩作)을 즐기던 곳이다. 처음에는 임붕의 호를 따서 귀래정이라고 불렀으나, 1555(명종 10)에 임붕의 두 아들 임복과 임진이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재건하면서 영모정이라고 하였다

<영모정>

 

  지금의 건물은 1982년과 1991년에 다시 중건·중수한 것으로, 정면 3,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왼쪽 1칸은 온돌방, 오른쪽 2칸은 마루방인데 4면 창호 아래 머름을 대었고, 정면 3칸의 각 띠살문 좌우에 벽널을 대어 건물 외관(外觀)을 다듬었다. 비교적 건립 연대가 오래되고, 주위에 400여 년 된 팽나무가 많이 있어 주변 환경이 아름답다. 영모정은 영산강이 굽어 보이는 명승으로 알려져 찾는 이들이 많고, 이 정자를 두고 읊은 시들이 많이 전한다

<백호 임제 기념관>

 

  귀래정 임붕(歸來亭 林鵬, 14861553)의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중거(仲擧), 호는 귀래당(歸來堂)으로 1510(중종 5) 생원이 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가 화를 입게 되자 그를 구출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다음해 과거시험의 제목을 낼 때 시관이 간사한 집권자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조광조 등 기묘사화 관련된 자들을 간사한 무리로 지칭함을 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 어찌 차마 이 시에 글을 지으랴!” 하고 붓을 던지고 나와 버렸다. 1521(중종 16)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를 역임하고 예조참의, 호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552(명종 7) 광주목사 재임 중에 작고하였다

<귀래정 나주 임붕 유허비>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다.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소치(嘯癡벽산(碧山겸재(謙齋), 본관은 나주(羅州). 조부는 임붕(林鵬), 부친은 평안도병마절도사 임진(林晋)이며, 우의정 허목(許穆)이 외손자다. 1576(선조 9)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에 급제했고, 157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했다. 예조정랑(禮曹正郞)과 지제교(知製敎)를 지내다가 동서(東西)의 당파싸움을 개탄, 명산을 찾아다니며 여생을 보냈다. 당대 명문장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시풍(詩風)이 호방하고 명쾌했다

<백호 임제선생 기념비>

 

   백호의 수많은 글 중 임종 때 아들에게 써준 <물곡사비>에 새겨진 글이 가장 눈길을 끈다. 물곡사비(勿哭辭碑)는 임제의 호방하고 의협심 강한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방 여러 나라 중에 황제를 자칭하지 않는 나라가 없는데 유독 조선만 중국 때문에 그러하지 못하니 이런 욕된 나라에서 태어나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그러하니 곡을 하지 말라(八蠻 皆呼稱帝 唯獨朝鮮 入主中國 我生何爲 我死何爲 勿哭)”고 한 그는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치욕으로 느꼈다는 것이다

<물곡사비>

 

  영모정에서 삼봉 정도전 유배지를 찾아 나주시 다시면 <백동마을>까지 자동차로 이동한다. 마을 입구에는 <白龍山下 白洞마(백룡산하 백동마을)>라고 글을 새긴 선돌이 눈길을 끈다. 보통 마을 표지석에는 마을 이름만 표기하는데 마을 뒷산인 백룡산 아래라는 뜻의 白龍山下를 표기한 이유가 있을 것만 같다. 조선 건국의 핵심 주역인 정도전이 3년 간 유배생활을 한 곳이 백룡산 아래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배지는 여기서부터 0.9 떨어져 있다 

<백룡산하 백동마을>

 

  백룡산(白龍山, 347m)은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과 문평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산 정상에는 과거 기우제를 올리던 제단자리에 헬기장이 만들어졌고 한다. 북동쪽으로 내려서면 용굴이 나오며, 영정굴 앞까지 땅속으로 물길이 나 있다고 전한다. 남쪽에는 치마, 줄바우와 연소혈(燕巢穴) 명당이, 남동쪽 기슭 백동 마을 어귀에 관바우가 서있다. 대오개 안고랑에는 정도전이 유배 생활을 했던 소재사(消災寺)터가 있으며, 이곳을 풍수지리상 와혈(窩穴)로 소쿠리 속 같이 오목하게 들어간 형상으로 소쿠리 명당이라 한다

<백룡산>
 

  친명파였던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당시 실세였던 친원파 이인임(李仁任, ?1388)이 원나라 사신을 접대하라는 영접사 직을 거역하자 유배를 보냈던 백동마을은 1375(고려 우왕1) 회진현(會津縣) 소재동(消災洞)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속하는 촌락(村落)이었다. 그 당시에는 부곡(部曲) 천민들의 집단취락으로 인식되어 왔지만, 이곳 백성들은 개방적인 자연 촌락으로 여기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재동은 농사를 생업으로 삼던 양민들과 다양한 성씨의 사람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었다

<삼봉 정도전의 유배 초가>

 

  1377(고려 우왕3) 정도전은 3년의 유배생활을 이곳에서 마친 후 서울(당시 개경)을 제외하고는 원하는 곳에 살게 하는 종편거처(從便居處)로 고향인 영주로 갔지만, 왜구의 침입으로 피난 끝에 한양의 삼각산 아래에 삼봉재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삼봉을 멸시하는 사람들이 삼봉재를 헐어버리고 핍박하자 거처를 다시 부평으로 옮겼으나, 다시 헐어 버리자 김포로 옮겨 살다가 유배가 끝나는 1383년 이성계를 만나러 함길도 함주로 간다. 정도전의 유배생활은 총 9년이었지만, 거평부곡의 3년은 정도전의 인생을 바꿔 놓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삼봉 정도전선생 유적비>

 

  정도전은 소재동에 유배된 3년 동안 그의 정치철학에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민본정치의 싹을 틔우게 된다. 도올 김용옥은 정도전이 회진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어느 날 들녘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정도전을 보고 당시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나쁨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다며 질책하였다. 촌로의 이러한 발언은 정도전에게 백성을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기 충분하였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도올 김용옥의 신소재동기>

 

  정도전은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와서 처음에는 황연(黃延)의 집에 거처하였다. 정도전은 소재동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권문세가들에게 착취당하는 농민들의 현실, 그러면서도 강하고 낙천적이고 지혜로운 백성들을 보고 배웠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고, 정치는 왕이 아닌 현명한 신하들이 주도해야 한다. 고려는 더 이상 고쳐 쓸 수 없는 지경이니 혁명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길 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삼봉의 혁명적인 민본사상은 소재동에서 발효되고 숙성되었다

<소재동비>

 

  삼봉을 찾아가는 길목에는 <나주정씨세장산(羅州鄭氏世葬山)>비가 서있다. 그러고 보니 백룡산자락이 나주정씨 문중 땅으로 대대로 조상의 얼이 묻힌 곳이다. 그러나 정도전은 봉화정씨다.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 이후 나주시와 봉화정씨 문중에서 정도전의 유배지를 찾아 조성에 나섰는데, 유배지 터가 나주정씨 소유였다. 이에 나주정씨 문중은 비록 본관은 다르지만 삼봉 유배지 터 200여 평을 봉화정씨 문중에게 영구무상임대 했으며, 이에 봉화정씨는 그 땅에 나주정씨 가문의 정식(鄭軾)장군 신도비를 세우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나주정씨세장산비>

 

<나주정씨 정식장군 신도비>

 

  일모도원(日暮途遠)인가? 해는 석양에 기우는데 갈 길은 멀어 서둘러 백룡저수지로 나온다. 농업용수로 이용되는 백룡저수지는 일제강점기인 1933년 나주 지역의 대지주였던 일본인 구로스미 이타로[黑住猪太郞]가 다시면에 축조한 저수지로 백룡산(白龍山)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유역면적 2,730ha, 수혜면적 120.5ha, 만수면적 56.1ha, 유효 저수량 315t, 길이 226m, 높이 16.2m이다. 저수지 안에는 고조선의 유물로 추정되는 고인돌 20여 기가 수몰되어 있다고 한다

<백룡제>

 

  영산강 두 번째 기행을 마감하면서 나주 땅을 되새겨 본다. 고려 태조 왕건은 나주에서 오씨부인을 만나 후백제 견훤의 해양진출을 방어하는데 성공하였고, 삼봉 정도전은 3년 간의 나주 소재동 거평부곡의 귀향생활이 조선 건국의 기초가 되는 민본사상을 깨닫는 동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어찌 되었던 고려와 조선 건국의 단초가 이곳 나주 땅이라고 생각하면 견강부회(牽强附會)일까

<유배지의 정도전의 시>

 

<유배지 뒤뜰의 죽순>

 

  “인간사회는 물욕 때문에 다툼이 생기기 마련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권위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일은 농사를 지으며 병행 할 수 없으므로 별도의 통치자가 필요하며, 그래서 백성은 세금을 내고 통치자를 부양하는 것이다. 이때 통치자는 백성의 세금으로 먹고사는 만큼 마땅히 백성에게 보답해야 한다.” <조선경국전>에 나오는 정도전의 말을 지금의 시각에서도 새겨볼만하다

<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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