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서울 한양도성 순성(巡城)놀이(2)

와야 세상걷기 2016. 9. 20. 02:42

서울 한양도성 순성(巡城)놀이(2)

(경교장백사실계곡, 2016917)

瓦也 정유순

    경교장에서 서울시교육청 쪽으로 올라서면 드디어 한양도성 성곽이 나오고, 성벽 밑 안내판에는 달빛 머무는 교남동 여기는 행촌성곽마을입니다라고 쓰여 있다. 교육청과 서울기상관측소를 지나면 월암근린공원이 나오고, 바로 옆 성벽 가까운 곳에 홍난파가옥이 나온다. 홍난파가옥은 지하1층 지상1층의 붉은 벽돌로 지은 독일계통의 선교사 집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고향의 봄을 작곡한 이 집은 홍난파가 말년을 보냈기 때문에 홍난파가옥으로 부르고 있다.

<행촌권역 성곽마을 성곽>

   홍난파(洪蘭坡, 1898.4.10.1941.8.30.)는 본명이 홍영우로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상경하여 열네 살 되던 해인 1912년에 YMCA중학부에 들어가면서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13년 근대 이후에 설립된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서양악과에 입학하여 바이올린을 배운 후 작고가, 바이올리니스트, 도쿄신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으며, 작품으로는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등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래가 많다.

<홍난파 가옥>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 및 신동아질서 건설에 협조하였다. 또한 지나사변과 음악” “희망의 아침등 친일 성향의 글과 작품을 많이 발표하였다. 이러한 홍난파의 행적은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2009년에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에 포함되었다. 후손들은 그때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동조하게 되었다고 강변하지만 솔직하지 못한 행위 같다.

<홍난파 가옥 안내판>

   주변에는 그때 당시의 건물들은 다 사라지고 아파트 등 다세대주택들이 성벽에 기댄 듯 촘촘하게 들어섰고, 사직터널 위로도 교회 등 종교시설과 고층건물들이 들어섰다. 인왕산을 성벽 따라 올라가려면 대부분 들려야 했던 좁디좁은 옥경이가게는 주인이 바뀌었는지 낯선 외국어 간판이 붙어 있다. 대형마트들이 외진 골목까지 상권을 점령하여 예스런 우리의 풍경이 사라지는 것 같아 씁쓸하다.

<성벽과 맞닿은 아파트 차고>

   인왕산 쪽으로 성벽을 타고 한참 오르다가 범바위가 가깝게 보이는 지점에서 성문 밖으로 나와 국사당 방향으로 간다. 마을 길 같은 좁은 길을 따라 가니 인왕산인왕사(仁王山仁王寺)가 보이고 꼭대기에 비둘기들이 몰려와 휴식을 취하는 선바위(禪岩) 아래 국사당(國師堂)이 보인다. 인왕산도 일제가 가운데 임금 왕()를 앞에 날일()변을 넣어 성할 왕()’자로 바꾸었다.

<인왕산 범바위>

<인왕산 인왕사>

   중요민속문화재 제28호인 국사당은 서울을 수호하는 신당으로 인왕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나, 원래는 남산의 꼭대기인 지금의 팔각정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국사당의 연원은 남산과 관련된 민속신앙의 역사에서 찾아 봐야 할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태조512), 호국의 신으로 삼아(태종49) 개인적인 제사는 금하고, 국가의 공식행사로 기우제(祈雨祭)와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태종 85, 97)고 하며, 아울러 신주(神主)가 있었음도 언급하고 있다(태종 12, 2).<네이버 한국문화대백과 참조>

<인왕산 국사당-네이버캡쳐>

   그러면 왜 국사당이 남산에서 인왕산으로 옮겼을까? 이것은 일본인들이 남산의 기슭에 일본의 신사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이 보다 더 높은 곳에 국사당이 있는 것이 못 마땅하게 여기여 이전을 강요하게 되어 1925년에 인왕산으로 이전한다. 인왕산을 택한 것은 태조와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고, 국사당이라는 명칭도 무학대사를 모시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이전할 때 남산의 재료를 그대로 옮겨 원형대로 복원 하였다고 한다.

<인왕산 선(禪)바위>

   범바위 쪽으로는 고개를 쑥 내밀고 허리를 반쯤 앞으로 수그리며 가부좌를 틀고 있어 부처바위로 여겼는데, 이 바위는 지나가는 주민 한 분이 천지신명바위라고 귀띔해준다. 해골바위 앞에서 숨을 고르고 인왕산 정상을 뒤로하고 도성 안길을 따라 밑으로 내려오는데, 달팽이바위는 고개를 쑥 내밀며 잘 가라고 인사한다. 지난여름 무더위에 물이 모자라 목이 타는지 산딸나무 잎은 벌써 낙엽 준비를 하고 열매만 주렁주렁 열렸다

<인왕산 천지신명바위>

<인왕산 해골바위>

<인왕산 달팽이바위>

<산딸나무>

  인왕산 순환 길을 따라 걷다보면 옥인동과 신교동이 갈라지는 삼거리에는 청와대와 경복궁을 지키는 금빛 호랑이가 꼬리를 흔들며 포효하듯 인왕산을 지킨다. 한양도성에는 북악산, 남산, 낙산, 인왕산 등 내사산(內四山)이 있다. 풍수지리학 적으로 주산(主山), 안산(案山), 청룡(靑龍), 백호(白虎)는 중요한 네 가지 요소인데, 주산은 후현무(後玄武-북악산), 전주작(前朱雀-남산), 좌청룡(左靑龍-낙산), 우백호(右白虎-인왕산)로 구분한다.

<인왕산 호랑이상>

<후현무, 전주작, 좌청룡, 우백호-네이버캡쳐>

   호랑이상 앞에서 신교동 쪽으로 가다가 수성동계곡으로 향한다. 자동차도로를 조금 걷다가 숲이 우거진 길로 접어든다. 햇볕이 나뭇잎으로 차단되어 시원하다. 맑은 물이 조금씩 솟는 샘이 보이는데 청계천발원지라고 표시되어 있다. 갑자기 생명의 시원(始原)을 보는 것 같아 경외(敬畏)롭고 엄숙해진다. 나뭇가지 사이로 펼쳐지는 북악산도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청계천 발원지>

<북악(백악)산>

   꽃은 배꽃처럼 화사하게 피고 열매는 붉은 팥처럼 열린다는 팥배나무는 팥알만 한 열매를 가지마다 힘겹게 매달고 가을이 깊어 가기만 기다리는 것 같다. 인왕산도 여러 번 왔지만 흔들거리는 출렁다리는 처음 보는데 서울 도심의 산에서 보는 게 여간 신기하다. 소나무도 바위 틈새에 뿌리를 단단히 박고 가는 세월을 노래한다.

<인왕산 출렁다리>

<바위에서 자라는 소나무>

   출렁다리를 지나 좌측으로 막 돌아가는 코너에는 이빨바위가 있다. 박원종, 성희안 등이 주동이 되어 연산군을 몰아내고 당시 진성대군이 왕위에 올라 중종이 되고 반정에 성공하는데, 문제는 반정을 반대한 부인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의 딸이란 이유로 반정공신들이 왕비가 될 수 없다고 들고 일어나 어쩔 수 없이 폐출되어 인왕산 아래 사직골로 거처를 옮겨 살게 되었다.

<인왕산 치마바위>

   신씨는 폐출된 후 매일 인왕산 정상에 올라 입던 치마를 치마바위에 걸어 놓고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던 중 잠깐 잠이 들었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짙어오면서 임금께서 타시던 말()이 부인을 향해 달려오다 깊은 계곡에서 거꾸로 떨어지는 것을 꿈에서 본 부인은 허겁지겁 한 걸음에 가보니 말은 없고 이빨 모양의 바위만 있어 그 이후에 이 바위를 이빨바위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인왕산 이빨바위>

   조금 더 나아가니 작은 윤동주공원과 문학관이 나온다. 윤동주시인을 기념하는 문학관은 인왕산 자락에 버려져 있던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아마 물이 높은 곳으로 올라오면 물살이 느려져 압력을 가해야 다시 힘차게 흘러 갈 수 있게 해주는 가압장처럼, 그의 시 <서시>가 입에서 힘차게 맴 도는데 들어가지 못하고 그냥 스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오늘 밤도 별이 바람처럼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문학관>

   창의문로 건너에는 고 최규식경무관의 동상이 서있다. 1968121일 청와대 습격과 요인 암살 지령을 받은 북한 124특수군부대 소속 31명이 무장을 하고 휴전선을 넘어 서울까지 침입한 사건으로 보통 121사태라고 한다. 당시 서울 종로경찰서장이던 최규식 총경은 청와대로 진입하던 김신조 등 무장공비 31명을 가로 막고 검문을 벌이다 공비들의 총격을 받아 병원으로 이송 중 사망하였다. 정부는 1계급 특진과 함께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였고, 당시의 현장인 창의문 앞에 그의 동상을 세웠으며, 그날 같이 순직한 정종수경사의 순직비도 바로 옆에 있다.

<고 최규식 경무관 동상>

   창의문에서 백악산(342)으로 오르지 않고 창의문을 빠져 나온다. 창의문(彰義門)은 북문(北門) 또는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린다. 1396(태조5) 한양성곽을 쌓을 때 사소문(四小門)의 하나로 세워져 창의문이란 이름을 얻었다. 한양에서 북쪽으로 통하는 통로였으나, 풍수지리설을 믿는 자들이 이곳 통행이 왕실에 불리하다는 주장에 따라 1416(태종16)에 폐문(閉門) 하였다가 1506(중종1)에 다시 열어 놓았다. 그리고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는 인조(仁祖, 당시 능양군)를 비롯한 반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창의문>

   초입의 와류(渦流) 같은 길을 따라 백석동길로 접어들자 담벼락에는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세로로 쓴 글씨가 백사실과 팔각정으로 가는 길을 표시하여 알려준다. 어느 시골 동네를 지나가는 고샅 같은 길로 가끔 자동차도 다니며 길동무를 하고, 전신주에는 북악산 길 산책로 가는 길명찰을 달고 확실하게 길 안내를 한다.

<담벼락 안내>

<전신주 안내>

   어느 집 담장에는 붉은 찔레꽃 같은 장미가 세월 가는 줄 모르게 활짝 피어 있다. 카페 산모퉁이를 돌고 돌아가니 전혀 사찰 같은 분위기가 나지 않을 것 같은 양옥에는 불교조계종 수미정사가 나온다. 수미(須彌)불교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이란 뜻이다. 백사실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바라보이는 북한산 보현봉이 새벽 비 탓인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온다.

<찔레꽃 같은 장미>

<수미정사>

<북한산 보현봉>

  광화문에서 버스를 이용한다 하더라도 30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이곳은 분명 서울의 한 복판이다. 부암동은 부침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작은 돌을 대고 자기 나이만큼 문지르면 손을 떼는 순간 돌이 바위에 붙고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하나, 애석하게 도로확장 공사 때 없어졌다고 한다. 마을길을 따라 계곡으로 들어 갈수록 자연과 어우러져 마음이 포근해지고 더 차분해지는 것 같다.

<백사실계곡 생태경관보전지역>

   백사실계곡 안에 있는 부암동 백석동천(白石洞天)은 조선시대의 별서가 있었던 곳이다.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에 건물 터와 연못 등이 남아 있으며, 바위에 白石洞天(백석동천)이 바위에 각자(刻字)되어 있다. ‘백석동천백석백악(북악산)’을 가리키고 동천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백석동천 각자>

   한편 백석동천을 인근 주민들이 백사실계곡으로 불리면서 백사 이항복의 별장지였다고도 전해지는데, 이는 이항복의 호와 같아 구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곳에는 연못과 육각정의 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고, 안채와 사랑채의 터도 있다고 한다. 백석동천은 마을과 한적한 곳에 있으며, 수려한 자연경관과 건물들이 잘 어우러져 격조 높은 별서건축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는 것 같다.

  ) -->  <별서건축 초석과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