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고군산군도 도보여행

와야 세상걷기 2016. 5. 9. 03:58

고군산군도 도보여행

(201657일)


瓦也 정유순

   며칠 전부터 고군산군도 도보여행을 한다는 설렘이 잠을 설치게 한다. 이미 새만금방조제가 완공되어 육지와 연결된 신시도에서 무녀도와 선유도를 잇는 연도교를 통해 장자도까지 걸어서 갈 수 있다기에 빨리 걸어서 신선이 놀던 선유도에 도착하면, 45미터(12층 높이)의 높이에서 출발하여 외줄타기로 조그만 솔섬 700m까지 가는 스카이라인(일명 zip라인)을 타볼 꿈도 꾸면서



<고군산군도 지도>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 지금의 군산에서 서남쪽으로 바라보면 바다에 산들이 무리지어 떠 있다하여 군산(群山)으로 불리었는데, 조선조 세종 때 이곳에 있던 수군진영인 군산진(群山鎭)을 육지로 옮기면서 현재의 군산시가 됐고, 이곳에는 옛 고()’자를 붙여 고군산이라 했다는 설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조 말에 일본이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을 수탈하기 위하여 월명산 아래에 일본인 마을을 조성함으로써 현재의 군산이 시작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군산 월명공원의 수시탑(守市塔)>

   지금의 군산시가(市街) 자리는 옛날에는 옥구현(또는 군)에 소속된 곳으로 진포(津浦)라고 불리는 나루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고려조 말 우왕 6(1380)에 최무선이 화통과 화약을 우리나라 해전에서 처음 사용하여 왜구의 배 500여 척을 무찔렀던 곳이 바로 이곳 진포해전이다. 그리고 일본인 마을이 생기기 전 까지는 군산이라는 지명을 선유도의 옛 이름인 군산도(群山島)’를 제외하고는 사용한 흔적이 없다고 한다.


<군산 월명공원의 삼일운동 기념비>

   산이 무리지어 있어서 붙여진 고군산’, 일제에 의해 근대화 된 근대군산’, 새만금방조제 건설로 인하여 생기는 새로운 땅 미래군산을 상상하며 버스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단잠을 자는데, “일이 발생하여 선유도에 갈 수 없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그래도 무녀도 까지는 갈 수 있겠지 하는 희망을 가지고 새만금비응공원에 도착하여 간단한 여장을 다시 꾸리고 신시도에 도착한다.


<새만금 비응공원>

   신시도로 오는 버스 안에서 나눠준 안내장에는 “4개 도서 도보여행이 공사 시행기관의 반대요청으로 부득하게 신시도구불길코스로 변경하였다는 문구가 크게 보인다. 참으로 난감하고 실망감이 앞선다.

신시도에는 경향 각지에서 타고 온 관광버스가 도열해 있고,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각조별로 깃발을 든 안내자가 있어 그를 따라 월령재로 향한다.


<월령재 가는 길>

<월령산 바위>

    ​월령재 정상마루에서 왼쪽은 199봉으로, 오른쪽은 월령대로 가는 길인데, 우리 팀은 월령대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한참 올라가니 주상절리 같은 돌들이 바위를 이뤄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한다. 거의 정상부근 까지 갔는데 10m 남겨두고 안내자는 가지 말라고 한다. 안가면 너무 서운할 것 같아 억지로 양해를 구하고 정상을 향한다.


<월령재 이정표>

   신시도(新侍島)는 고군산군도 중에서 제일 큰 섬으로 새만금방조제로 육지와 연결된 섬이다. 그리고 신라 말 대학자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과 인연이 있는 섬으로 알려졌다. 최치원이 단을 쌓고 글을 읽었는데 그 소리가 중국까지 들렸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며, 단을 쌓았다는 곳이 신시도 월영산 월영대(月影臺)이다. 그리고 군산지역에서 출생했다는 설과 함께 전라북도에 17개소의 유적이 있는데, 그 중 5건이 문화재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최치원에 관한 안내판>

   정상에서는 동쪽으로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무녀도 등 고군산군도가 무리지어 떠돌다가 아늑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섬들이 한눈에 아름답게 펼쳐진다. 지금 한창 공사 중인 연도교(連島橋)는 더 이상 떠돌아다니지 말라고 섬들을 붙잡아 메어 놓은 밧줄 같다.


​<월영대에서 본 고순산군도>

   다시 월영재로 내려와서 신시도 논갈림길로 내려와 방조제 길로 들어선다. 좌측의 바다는 썰물로 바닥이 들어나 있고, 신시도 개매기체험장 안내판도 나온다. 우측의 논은 아직 농사철이 아니어서 그런지 한쪽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유채꽃이 만발한 방죽을 돌아 무녀도로 연결중인 도로까지 나오니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공사 중인 도로로 되돌아 나오는데, 공사관계자가 더 이상 못 가게 하여 왔던 길로 되돌아 나오는데 콩밭의 완두콩은 흰 꽃을 곱게 피워 벌 나비를 기다린다.


<신시도 방조제>


<신시도 완두콩>

   월령재를 다시 넘어 신시도 주차장까지 나온다. 주차장 주변에는 새만금 방조제 완공을 기념하기 위해 석물로 여러 가지 조형물을 만들어 놓았다. 불로문(不老門)도 만들어 놓았고, 솟대 같은 돌기둥도 보이고, 그리스 신전(神殿) 같은 기둥조형물도 보인다.


<새만금방조제 석물 조형물>

새만금방조제는 단군 이래 최대 토목공사로 우리 땅의 서해안 지도를 바꾼 대단위 공사였다. 방조제는 199111월에 공사를 착공하여 20104월에 준공하였고, 20108월에는 세계최장방조제(33.9km)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새만금지하도로는 신시도 배수갑문과 도로로 연결하여 자동차들이 안전하게 달린다.


<새만금방조제 지하도로>


<새만금방조제 신시도 배수갑문>

   다시 새만금비응공원으로 와서 뒤늦게 고군산군도 도보여행행사를 한다. 오늘 모임의 주관처인 군산시 수시탑 포럼대표자가 나와 환영사를 하고, 군산시 부시장을 비롯해 전북도지사 부인, 도 담당국장 등이 나와서 축사를 한다. 식이 끝난 후에 주최 측에서 마련한 도시락으로 오전을 마무리 한다.


<행사 뒷풀이 공연>

   오후에는 군산시 해망동에 있는 수산물종합센터를 둘러본다. 수산물종합센터는 군산항 선착장 주변으로 형성된 수산물종합시장으로 약1km 이상으로 거리에 길게 늘어섰다. 시장에는 서해안에서 많이 잡히는 조기, 박대, 바다장어, 아구, 꽃새우, 멸치 등 수산물과 건어물이 진열되어 있고, 가격 또한 저렴하여 찾아오는 손님들이 줄을 잇는다. 수산센터 옆으로는 장항과 군산을 연결하는 군장대교 교량공사가 한창이다. 당초 가기로 했던 군산 근대화 거리는 서울로 돌아오는 시간이 촉박하여 취소되었다고 한다.


<군산시해망동 수산물종합센터>


<수산센터 내부>


  ) --><군산-장항간 군장대교 공사중>  

군산은 일제강점기 이전인 18995월에 부산, 원산, 제물포, 경흥, 목포, 진남포에 이은 일곱 번째로 일제 강압에 의해 개항되었다. 이전까지는 옥구군에 딸린 아주 작은 포구였으나, 호남평야의 쌀을 일본으로 수탈해 가는 거점이었고, 일본의 공산품이 강제로 들어오는 창구로 조선에 대한 일제의 이중 수탈창구가 되면서 급속히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1910년에는 군산을 옥구군에서 완전 분리하여 오다가 1995년에 도농통합에 의해 옥구군까지 군산시로 편입되었다.


<군산시 지도>

   일본은 개항 전부터 전북의 비옥한 땅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오면서 군산을 쌀 수탈의 창구로 개항한 후에 항만을 대폭 늘렸다. 정부를 압박하여 전주와 군산의 전군도로를 개설(1908)하였고, 호남선(1912)과 군산선을 개통하여 더 많은 쌀을 쉽게 빼앗아갔다. 그리고 1908년에는 약200여 곳의 일본인농장이 생겨 인근 주민들을 소작인으로 전락시켰고, 일제강점기에는 군산항을 통해 나가는 화물의 95%가 쌀이었다고 한다. 그때의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 집과 건물들을 군산의 근대문화유산마을로 조성하였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안내판>


<구 군산세관>

   그래서 군산은 어떤 주제로 묶일 수 있는 유적이나 볼거리를 찾을 수가 없다. 우리 국력이 쇠잔하여 일본에 강점되고 수탈의 역사가 시작됨으로써 생긴 도시가 바로 군산이기 때문이다. 그 흔적들을 보전하는 이유는 단순히 보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이와 같은 역사의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한 각성의 산물로 꾸며져야 한다. 그리고 지금도 일본식으로 남아 있는 것들을 찾아내어 그 이전의 것으로 돌려놓거나 한국식으로 바꿔야 한다.


  ) --><군산 해망터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