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가깝고도 먼 길-운현궁

와야 정유순 2022. 1. 17. 23:57

가깝고도 먼 길-운현궁

(2022 1 11)

瓦也 정유순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雲峴宮)은 철종(哲宗, 재위 18491863)의 뒤를 이어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이 태어나서 왕이 될 때까지 지냈던 곳으로 고종의 생부(生父)인 이하응(李昰應)은 흥선대원군이 되었고, 생모(生母) 민씨는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의 봉작을 받았으며, 이들이 기거했던 사가(私家)로 조선의 대원군궁 중 유일하게 제 모습을 그런대로 유지하는 곳이다

<운현궁 지도>
 

  지하철 3호선 안국역 4번 출구로 나와 일본문화원을 지나면 바로 운현궁 정문이 나온다.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기 전에도 일부 왕족이나 양반에 의해 알려진 곳이었지만, 이곳에서 대원군은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 세제개혁 등 많은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1882(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운현궁에서 중국 청()나라 톈진[천진(天津)]으로 납치되었다. 흥선대원군의 한옥과 양관(洋館)을 모두 사적(257)으로 지정하였다

<운현궁 마당>
 

  <운현(雲峴)>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천문을 담당하던 관청인 서운관(書雲觀) 앞의 고개()라는 뜻이다. 운현궁의 정문(正門)은 원래 창덕궁 쪽에 있었으나, 현재의 정문은 수직사 앞의 문으로, 이 문으로만 운현궁을 출입할 수 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우측에 위치한 수직사(守直舍)는 운현궁의 경비원과 관리들이 거처하던 곳이었다. 당시의 운현궁은 상당히 넓었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즉위하면서 궁에서 파견된 인원들이 많았다고 한다

<운현궁 수직사 앞 마당>
 

  운현궁 역시 경복궁이나 덕수궁 같은 옛 궁궐들과 마찬가지로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섭정할 때는 그 권세에 비례해서 오늘날 덕성여자대학교 부설 평생교육원으로 쓰이는 <운현궁 양관>을 포함해 운현초등학교와 일본문화원까지 포함하여 꽤 넓은 지역이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다고 한다. 황현(黃玹) <매천야록>에는 운현궁의 크기를 주위 담장이 수리(數里)나 되었고, 네 개의 대문을 설치하여 궁궐처럼 엄숙하게 하였다라고 적혀있다

<운현궁 이로당에서 본 양관>
 

  규모가 컸던 운현궁에는 흥선대원군의 직계 가족 뿐만 아니라 그의 방계 가족까지 살았으며, 장안의 유명인들과 그 식솔들까지 살아서 해방될 때까지 100여 명이 넘는 대식구가 살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동학농민혁명의 전봉준(全琫準)과 신재효(申在孝)의 지도를 받은 판소리꾼들, 심지어는 남사당패들까지 운현궁에 자주 드나들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3일 뒤 서울이 함락되자 순정효황후가 서울 수복 시까지 이곳에서 지냈으며, 1952년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방한 중에 이곳을 숙소로 삼았다

<유물전시관의 운현궁 모형>
 

  수직사를 지나 솟을대문을 통해 운현궁의 사랑채인 노안당 안으로 들어간다. 노안당(老安堂)은 흥선대원군이 일상적으로 거처한 곳으로 고종 즉위 후 주요 개혁정책이 논의 되었던 역사적 장소다. 정면 6, 측면 3칸이며 처마 끝에 각목을 덧대어 차양을 설치했다. 노안당이란 이름은 <논어> <공야장편>에서 노인을 편하게 하다(老者安之)’에서 따온 것으로, 아들이 임금이 된 덕택으로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노년을 살게 되어 흡족하다는 뜻이다

<운현궁 노안당>
 

  노안당 우측 뒤로 향하면 솟을 문을 통해 노락당으로 이어진다. 노락당(老樂堂)은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로 정면 10, 측면 3칸이다. 1866(고종 3)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嘉禮)가 거행되었으며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 등 각종 중요 행사 때 사용되었다. 이곳은 명성황후가 삼간택이 끝난 후 왕비 수업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노안당과 노락당 좌측 밖 공간은 일렬로 이어져 있으며, 老樂堂 편액은 추사 김정희에게 글씨를 배운 신관호(申觀浩, 18101884)의 글씨다

<운현궁 노락당>
 

  노안당과 노락당은 가운데에 큰 대청(大廳)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이 있는데, 노안당은 초익공 양식을 이루고 노락당은 칠량집으로 우물천장이다. 운현궁의 양관(洋館)은 본래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李埈)의 저택으로 1912년 무렵에 건립되었는데, 1917년 이준이 죽은 뒤 순종(純宗)의 아우인 의친왕(義親王)의 둘째아들 이우가 이어받았으나 지금은 덕성여자대학교의 건물로 쓰이고 있다

<운현궁 양관 - 네이버캡쳐>
 

  노락당 뒤뜰에는 지금도 물을 길을 수 있을 것 같은 튼실한 우물과 돌확(돌절구)이 놓여 있으며, 담장 아래로 경백비(敬栢碑)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고종이 어린 시절 여기에 있던 잣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타고 오르며 놀았던 고마움을 잊지 못해 왕위에 오른 후 나무에게 2품의 품계를 하사했다고 한다. 지붕을 올려다보면 박공판이 만나는 부분에 다산을 상징하는 지네철이 장식되어 있다. 노락당을 지나면 이로당이다

<운현궁 우물과 돌확>

 

  이로당(二老堂)은 운현궁의 안채 역할을 하던 곳으로 노락당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있은 후 노락당을 안채로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새로운 안채로 1869(고종 6)에 새로 지은 건물로 정면 7, 측면 7칸이다. <이로(二老)>는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민씨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여성들의 공간이므로 외간 남성들의 출입을 삼가기 위해 건물의 구조가 입구()자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로당 담장 뒤편의 <김승현가옥>은 원래 운현궁의 <영로당(永老堂)>이었다

<운현궁 이로당>
 

  원래 운현궁은 궁궐에 견줄 만큼 크고 웅장하였다고 하며, 대원군이 즐겨 쓴 아재당(我在堂)은 없어졌고, 한옥은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 안채인 노락당(老樂堂)과 별당채인 이로당(二老堂)만이 남아 있다. 또한 대원군의 할아버지 은신군(恩信君)과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의 사당(祠堂), 고종이 창덕궁(昌德宮)에서 운현궁을 드나들 수 있는 경근문(敬覲門)과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恭覲門)도 모두 헐리고 없어졌다

<운현궁 노락당 뒤뜰>
 

  운현궁의 큰 전각에는 ()’자 들어갔다. 흥선대원군이 뭔가 이 글자에 애착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말년의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호인 석파(石破)’를 대신해 노석(老石)’이라는 호를 쓰기도 했다. 운현궁 전각 중 노안당과 이로당의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스승인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로, 고종 즉위 전에 사망한 추사가 직접 쓴 게 아니고 흥선대원군이 운현궁을 증축할 때 스승의 글씨를 모아서 만든 것 같다. 노안당 안방의 无量壽閣(무량수각)도 추사 글씨인 해남의 대흥사의 편액과 글씨체가 같다

<운현궁 노안당 안방의 무량수각>
 

  이로당 뒤로는 운현궁의 역사와 한국 근대사의 흐름을 되돌아볼 수 있는 유물전시관이 있다. 전시공간은 모두 18개로 나누어져 있으며 18011910년의 국내외 사건을 비교한 종합연대표와 한국 근대사의 흐름도, 왕과 왕비가 가례를 올릴 때 착용한 면복(冕服)과 적의(翟衣), 대원군 교의(交椅), 척화비, 당백전, 운현궁의 각종 생활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 전시관은 서울특별시가 1993년 운현궁을 매입하여 1996년까지 복원 공사를 할 때 새로 건립하였다

<운현궁 유물전시관>
 

  운현궁의 초대 주인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11898)이었다가 장남인 흥친왕 이희(興親王 李熹, 18451912, 고종의 동복 형)에게 물려주었으며, 다시 흥친왕의 장남인 영선군 이준(永宣君 李埈, 18701917)에게 상속되었다가 영선군의 양자 이우(李鍝, 19121945, 의친왕의 차남)에게 까지 이어졌다

<흥선대원군>
 

  이우는 어릴 때 일본에 볼모로 끌려갔고 1945년도에 원폭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운현궁에서 생활한 기간이 짧았다. 현재는 이우의 장남 이청(李淸, 1936 ) 명의로 있다가 운현궁을 1993년에 서울특별시에 매각하면서 운현궁의 각종 유품들을 같이 기증했다. 2012년 현재 본인이 설립한 석파학술연구원에서 흥선대원군에 대한 연구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유물전시관의 종합연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