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가깝고도 먼길-덕수궁과 정동길(1)

와야 세상걷기 2019. 11. 22. 23:46

가깝고도 먼길-덕수궁과 정동길(1)

(20191119)

瓦也 정유순

   늦가을에 겨울 같은 한파가 기습적으로 몰아쳐 춥기만 한 정동길을 돌아보기 위해 길을 나선다. 서울특별시 중구 조선 초기에는 정릉동으로 불렀는데, 이는 태조(太祖)의 계비 신덕왕후 강 씨(康 氏)의 능인 정릉(貞陵)이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세자책봉 문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태종(이방원) 때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졌으며, 일제강점기 때 이곳의 지명이 정동(貞洞)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덕수궁 소나무>


   정동의 범위는 현재의 정동길의 서쪽 일대를대정동이라 하였고 동쪽 일대를소정동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 대정동은 서울시립미술관이 자리한 서소문동 일부를 포함하여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지역까지 아우르는 지역이며, 소정동은 지금의 덕수궁을 포함하여 대한문 앞(서울시청광장 일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정릉의 석물은 태종의 심술로 청계천 광통교(廣通橋) 재료로 사용하였다.

<서울 중구 정동 지도>


   정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덕수궁을 먼저 언급해야 한다. 덕수궁은 월산대군 집터였다. 월산대군은 세조의 아들 도원군(桃源君, 후에 덕종 추존)의 큰아들이다. 도원군은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열여덟의 나이에 요절하자 세자빈 한씨(후에 소혜왕후)가 궁에서 나오면서 거처하던 곳이었다. 이후 예종(睿宗)이 승하하자 도원군의 둘째 아들 성종(成宗)이 왕위에 오르면서 인수대비가 된 한씨도 함께 입궐하여 월산대군의 집이 되었으며 그의 자손들이 살게 되었다.

<덕수궁 지도>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난 갔다가 그 이듬해 10월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궁궐이 폐허가 되어 거처할 곳이 없자 이곳을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선조는 16082월 이곳에서 승하하였고 광해군이 즉위하였으며 창덕궁으로 옮긴 다음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으로 부르게 하였다.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만 거처하게 하다가 1618년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유폐시키면서 경운궁을 서궁(西宮)으로 격을 낮추었다.

<덕수궁 대한문>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선조의 손자 인조(仁祖)가 즉위하자 선조가 거처하던 즉조당(卽阼堂)과 석어당(昔御堂)만 제외하고는 경운궁을 월산대군 집안에 돌려주었다. 이때까지 경운궁은 다른 궁궐에 비해 규모를 제대로 갖춘 궁궐은 아니었다.

<덕수궁 광명문>


   경운궁은 고종이 말년에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갑자기 궁궐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고, 건물의 배치도 이때 자리를 잡게 되었다. 경운궁이 왕궁으로 다시 사용된 때는, 1896년에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시해되자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하여 러시아 공사관 옆에 있던 경운궁에 대비와 태자의 거처를 옮긴 후, 189722일 고종도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오면서부터이다.

<덕수궁 중화문>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선포하였으며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하여 원구단(圓丘壇)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로 즉위한 1987년부터 중화전(中和殿)을 비롯하여 정관헌(靜觀軒), 돈덕전(惇德殿), 즉조당(卽阼堂), 석어당(昔御堂), 경효전(景孝殿), 중명전(重眀殿), 흠문각(欽文閣), 함녕전(咸寧殿), 석조전(石造殿) 등 많은 건물들이 계속하여 세워졌다.

<덕수궁 중화전>

   이곳은 고종의 재위 말년의 약 10년간 정치적 혼란의 주 무대가 되었던 장소로, 궁내에 서양식 건물이 여럿 지어진 것이 주목된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이미 1880년대에 경운궁 터의 일부를 서구 열강(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게 공사관 부지로 떼어주었기 때문에 이때 개수된 경운궁은 열강의 공사관 사이에 들어선 형국이 되었다.

<덕수궁 석조전>


   고종이 이렇게 경운궁에 강한 집착을 보였던 것은 거세게 밀려오는 일본의 영향력을 피해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의 영사관이 밀집해 있는 정동을 정치적 중심지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044월에 큰 화재가 나서 함녕전·중화전·즉조당·석어당 등 건물들이 모두 불타버렸고, 이후 함녕전·즉조당·석어당만 복구되었다. 이때 경운궁의 외곽에 있던 가정당(嘉靖堂돈덕전(惇德殿구성헌(九成軒) 등은 화재를 모면하였다고 한다.

<덕수궁 함녕전>


   덕수궁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돌담길을 따라 중명전으로 향한다. 중명전(重眀殿)의 처음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다. 황제 서재의 용도로 지어졌으나 1904년 화재로 고종이 이곳으로 이어(移御)하여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중명전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중명(重眀)세상의 모든 사물을 눈 밝혀 중하게 엄히 보라는 뜻 같다. 그러나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 되어 함녕전(咸寧殿)으로 돌아가자 궁궐의 전각으로서 기능을 상실한다.

<덕수궁 중명전>


  중명전 안에는 190511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의 현장을 밀납(密蠟)으로 재현해 놓았다. 늦은 저녁 일본군대에 둘러싸인 중명전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강요로 을사늑약 체결이 강행되었다. 이 늑약은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의 승인도 없이 무력을 동원하여 강제된 조약으로 국제법상 원천적으로 무효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힘의 논리 속에 이러한 불법성은 묵인되고 우리의 자주 외교권은 일본에 강탈당하고 만다.

<을사늑약체결 장면>

   을사늑약으로 자주권이 위협받자 고종은 구미 각국에 특사들을 파견하여 을사늑약이 국제법상 무효라는 점과 일본이 대한제국에 저지른 만행을 세계만방에 알리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19057월 가쓰라-데프트 밀약 등 열강들의 제국주의 논리가 지배하던 당시의 국제질서 속에서 우리 이준(李儁) 열사를 비롯한 특사들의 외침은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예나 지금이나 힘의 논리가 앞서는 현실이 안타깝다.

<헤이그특사에게 발급한 위임장>

<고종 옥새>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1905년 강제로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에는 일본의 강요로 순종에게 양위하여 경운궁에 머무르게 되었고, 고종의 장수를 비는 의미에서 이름을 덕수궁(德壽宮)으로 부르게 되었다. 돈덕전(惇德殿)1901년 건립된 2층 양관 건물로, 19078월 순종이 돈덕전에서 즉위하였으며, 11월에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었다.

<덕수궁 정관헌>

   우리의 발길도 중명전에서 길 건너에 있는 이화박물관으로 옮긴다. 이화박물관은 이화학당 창립 120주년을 맞아 2006531일 개관하였다. 이화학당은 1886(고종 23) 531일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튼 여사(Mrs. Mary F. Scranton)에 의해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으로 세워졌다. 이화학당 교명은 고종께서 1887(고종 24)에 하사하였다. 황제께서 하사한 학교라 후문 옆에는 대소인원하마비(大小人員下馬碑)가 자리한다.

<이화박물관>

   현재 이화박물관 건물로 사용되는 심슨기념관은 미국인 사라 J. 심슨(Sarah J. Simpson)이 위탁한 기금으로 1915년에 건립되었고, 1922년에 증축하였다. 이후 한국전쟁 때 붕괴되었다가 1961년에 복구하였고, 2002228일 등록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이화여자고등학교 교내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2011년에는 박물관 외관을 원형 모습 그대로 복원 공사 후 재개관하였다.

<초기 이화학당 모형>

   박물관 내에는 이화동문들의 기증 유물을 전시 중인 기증전시실, 교내 역사를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옛 교실 형태의 유관순교실을 운영 중이고, 이화의 역사와 관련된 다양한 교육자료를 전시 중인 상설전시실을 통해 우리나라 여성 교육의 역사를 관람할 수 있다. 이화가 배출한 인물들 중에 김활란(金活蘭, 18991970)을 보는 순간 유관순(柳寬順, 19021920)열사의 나라 위해 내놓을 목숨이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이 유일한 슬픔이다라는 말이 가슴을 후빈다.

<이화학생들의 교복-이화박물관>

<유관순열사의 어록>

   이화박물관 마당 귀퉁이에는 손탁호텔 표지석이 있다. 손탁호텔은 서양식 호텔로, 1902(고종 39) 독일 여성 손탁(Sontag, 孫鐸)이 건립하였다. 손탁은 1885년 초대 한국 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Karl Ivanovich Veber)와 함께 서울에 도착해 베베르 부부의 추천으로 궁궐에 들어가 양식 조리와 외빈 접대를 담당하였다. 그러다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어 정계의 배후에서 활약하다가 1895년 고종으로부터 정동(貞洞)에 있는 가옥을 하사받아 2층의 서양식 호텔을 지었는데, 이 호텔이 바로 손탁호텔이다.

<손탁호텔 터>

   러시아의 전형적인 건물 형태를 취한 손탁호텔은 미국을 주축으로 결성된 정동구락부의 모임 장소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구한말 서구 열강의 외교관들이 외교 각축을 펼친 곳으로 유명하다. 1918년 문을 닫은 뒤 이화학당에서 사들여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1923년 호텔을 헐고 새 건물을 지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폭격을 당해 폐허로 남아있다가 19693층짜리 호텔로 지어져 이후 여관과 식당으로 운영되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손탁호텔 터에 지어진 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