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와 한라산 속살 엿보기(4)
제주도와 한라산 속살 엿보기(4)
(2017년 6월 6일, 머체왓숲길&소롱콧길→서중천탐방로)
瓦也 정유순
오늘은 현충일(顯忠日)이다. 머체왓 숲길이 있는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로 가는 도로 가로등의 태극기는 조기(弔旗)로 게양되어 있다. 순국선열 및 전몰장병의 숭고한 호국정신이 있었기에 오늘처럼 제주도의 속살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 번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머체왓으로 가기 전에 구 탐라대학교(현 제주국제대학교) 부근에 가면 홍가시나무가 볼만하다하여 들렀으나 시기가 조금 지난 것 같다. 홍가시나무는 상록성 작은 키나무로 정원이나 화단에 심어 기르고, 잎이 새로 자라날 때와 가을단풍이 들 때 붉은빛이 들어 홍가시나무라고 한다.
<철이 지난 홍가시나무>
<홍가시나무-네이버캡쳐>
머체왓 숲길이 있는 한남리(漢南里)는 ‘한라산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한라산 남동지역으로 이어져 내려와 해발 약150m 정도의 중산간마을로 2012년에 행정자치부 주관 친환경 생활공간 조성사업인 ‘우리 마을 녹색길’로 이곳에 있는 <머체왓 숲길>이 선정되어, 지역의 역사·문화와 청정자연이 어우러진 친환경적 녹색길이 조성되었다.
<머체왓 숲길 표지>
<머체왓 숲길 방문객 지원센터>
머체왓은 ‘돌(머체)로 이루어진 밭(왓)’이라는 제주도의 이름이다. 머체왓 숲길 방문자 지원센터 앞을 지날 때 몇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더 잦아진다. 숲길입구를 지나자 목장의 넓은 초원에서 말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비오는 날 멀리 보이는 한라산과 멋진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소롱콧길은 한남리 서중천과 소하천 가운데에 형성된 지역으로 지형이 작은 용(龍)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삼나무·편백나무·소나무 등이 숲을 이룬다.
<목장의 말>
<비 오는 날의 한라산>
목장을 돌아 언덕길로 접어들자 동백숲길이 나온다. 동백나무는 밑에서부터 가지가 갈라져서 관목으로 되는 것이 많지만, 일주(一株)형으로 군락을 이루어 동백나무 숲을 이르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잎 가장자리에 물결 모양의 잔 톱니가 있는 동백나무는 주로 남쪽해안이나 섬에서 자라는 나무로 주로 겨울에 꽃이 핀다하여 동백(冬栢)으로 불리지만 봄에 피는 것도 있어 춘백(春栢)으로 불리기도 한다.
<동백나무 숲길>
꽃은 붉은색 계통의 동백이 주를 이루지만 개중에는 하얀 꽃이 피는 흰 동백도 있고, 붉은색과 흰색이 혼합된 색깔의 꽃도 있다. 꽃이 활짝 피었다가 꽃이 질 때는 ‘어떠한 미련도 두지 않고 송이채 뚝 떨어지는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세상을 살면서 미련을 두지 말라는 교훈 같다. 그리고 제주도 첫 날부터 보아온 동백은 잎에 들기름으로 윤을 낸 것처럼 무척 반들거린다. 아마 미세먼지가 없는 세상이라 그런 것 같다.
<윤기 반들거리는 동백 잎>
입구에서 약500여m쯤 들어가자 ‘느쟁이왓다리’라는 푯말이 나온다. 이 다리는 도랑 같은 작은 하천을 건너는 다리이다. 나무 무지개다리 위에는 비바람으로 떨어진 나뭇잎들이 수북하다. 그런데 ‘왓(밭)’은 제주도 방언으로 그 뜻 알고 있지만 ‘느쟁이’는 무엇을 가리키는지 설명이 없어 알 수 없다. 참고로 전라도 일부지역에서는 “늘 늦는 사람”을 느쟁이로 일컫는 경우가 있지만, 혹시 제주도에서는 ‘메밀’을 ‘느쟁이’로 이야기 하는지도 모르겠다.
<느쟁이왓다리>
<느쟁이왓다리 표지>
느쟁이왓다리를 건너 10여분쯤 들어가면 ‘방애혹’이라는 곳이 나온다. 방애혹은 머체왓 내에 있는 목장지대로서 땅 심이 깊은 곳을 찾아 돌담을 둘러쌓고 화전농을 일궜던 곳으로 밭 형태가 방애혹처럼 중심을 향해 둥그렇게 꺼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방애혹 자리는 숲이 우거져 곶자왈을 이루고 있는 지역으로 누구의 설명 없이는 정확한 확인이 어렵고 청미래덩굴만 경계를 이룬다. <방애>는 방아, <혹>은 돌확(돌로 만든 절구)의 제주지역 방언이다.
<방애혹 표지>
<혹시 이곳이 방애혹 자리가 아닌지?>
그 많은 식물 중에서 그래도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막 구슬 같은 열매를 맺기 시작한 청미래덩굴로 그나마 자주 만나는 게 반갑다. 지방에 따라서는 명감 또는 망개라고도 부르는 이 청미래덩굴은 잎을 따서 망개떡을 만들면 잎의 향이 떡에 베어들면서 상큼한 맛이 나고, 여름에도 잘 상하지 않는다고 한다. 열매는 식용하며 어린 순은 나물로 먹는다. 뿌리는 이뇨(利尿)·해독 등의 효능이 있어 관절염과 요통, 종기 등에 사용한다.
<청미래덩굴>
산수국의 안내를 받으며 도착한 곳은 머체왓전망대이다. 목재를 깔아 놓은 전망대 바닥에는 빗물이 반들거린다. 우장(雨裝)을 단단히 하고 대비하였지만 벌써 빗물은 살 속으로 젖어든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주변을 전망할 틈도 없이 서둘러 발을 옮기는데, 그래도 꾸지뽕나무는 오랜만에 내리는 단비에 잎에 활기를 띠며 열매를 살찌운다.
<산수국>
<머체왓 전망대>
<꾸지뽕 나무>
피톤치드로 더 유명한 편백나무 숲을 지나 삼나무 숲에서 주먹밥으로 점심을 대신한다. 제주도에 와서 아침에 나설 때 개인도시락을 준비하여 먹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오늘은 비가 많이 내려 이동 중에 요기를 하기에는 주먹밥이 최고다. 누구의 선견지명인지 또는 신의 은총인지 어떻게 알고 주먹밥을 준비했는지 감사할 따름이다.
<삼나무 숲>
머체왓 숲 안에는 4∼50년 전에 마을사람들이 거주했던 집터를 만들어 놓고 방사탑을 세워놓았다. 방사탑(防邪塔)은 마을 어느 한 방위에 불길한 징조가 비치거나, 풍수지리설에 따라 기운이 허하다고 믿는 곳에 액운을 막으려고 세운 돌탑이다. 또한 마을의 안녕과 전염병의 예방, 화재예방은 물론 해상의 안전과 아이를 점지해 달라는 등 많은 소원을 바라는 신성한 곳이었다.
<방사탑>
많은 비가 와서 우중충한 숲길도 분간이 잘 안 간다. 이미 빗물은 속옷은 물론 방수가 잘된다는 신발 안까지 깊숙이 스며들어 걸을 때마다 찌걱거린다. 워낙 숲이 우거져 ‘혼자 걷는 길 같으면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방정맞게 스쳐 지나간다. 짧게 길을 잘못 들었다가 숲을 빠져나오니 제주에서 세 번째로 긴 서중천이 바로 옆이다. 거대한 용암이 흐르다가 굳어진 현무암이 각종 그릇형태로 화석처럼 길게 누워있다.
<서중천 상류>
서중천은 한라산 흙붉은오름(1391m)에서 발원하여 남원읍 한남리를 가로질러 바다로 들어간다. 서중천은 하폭이 좁고 하천바닥은 투수성이 큰 현무암과 기암절벽으로 형성되어 있어 용암층 밑으로는 지하수가 흐르는 건천이다. 상록활엽수인 구실잣밤나무와 조록나무 등 각종 식물로 숲이 어우러져 있으며 원앙새 등 각종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천연자원의 보고이다.
<서중천 하류>
서중천 생태·문화탐방로를 따라 걸었으나 비가 너무 많이 쏟아지고 가끔은 몸에 한기(寒氣)가 느껴진다. 비에 젖은 옷과 배낭이 몸을 더 무겁게 한다. 보이는 사물을 포스팅 하기가 무척 어렵다. 궂은 날씨만 아니면 참으로 볼 것도 많고 기록해야 할 것이 많을 것 같은 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쉽다. 꼭 한 번 더 오고 싶다는 마음만 남기고 물족제비 신세가 되어 서귀포시내에 있는 이중섭미술관으로 이동한다.
<서중천변 숲길>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1·4후퇴 때 원산에서 서귀포로 가족과 함께 피난 와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같은 해 12월 부산으로 떠났다. 이에 서귀포시에서는 천재서양화가인 이중섭을 기리기 위해 피난 당시 거주했던 초가 일대를 1996년에 ‘이중섭의 거리’로 정하였다. 이어 1997년 4월에는 그가 살았던 집과 부속건물들을 복원하여 그의 호인 대향(大鄕)을 따서 대향전시실을 꾸몄고, 매년 10월 말 사망주기에 맞춰 ‘이중섭 예술제’를 개최해 왔다.
<이중섭이 세들어 살던 집>
<이중섭의 셋방>
그러던 중 이중섭거리를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문화관광의 거리로 활성화하기 위해 피난 중에 세 들어 살던 초가 바로 옆의 서귀포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2002년 12월 28일 2층 건물로 이중섭미술관을 개관하였다. 개관 당시에는 원화가 없어 일부 복사본만 전시하다가 이를 안타깝게 여긴 문화인들의 기증과 노력으로 현재는 서귀포 생활 당시의 모습이 담긴 작품을 비롯해 여러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이중섭미술관-네이버캡쳐>
<이중섭의 소>
이중섭은 한국의 서양화가 박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서양화의 양대 거목으로 시대의 아픔과 굴곡 많은 생애의 울분을 ‘소’라는 모티브를 통해 분출해 낸 화가이다. 대담하고 거친 선묘(線描)를 특징으로 하면서도 해학과 천진무구한 소년의 정감이 작품 속에 녹아 있다.
<이중섭의 선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