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시인과 함께한 섬진강길
김용택시인과 함께한 섬진강길
(2017년 5월 13일)
瓦也 정유순
고려 우왕 때 왜구가 이 강을 통해 지금 광양의 섬거라는 곳으로 쳐들어오자 ‘수만 마리의 금두꺼비가 울어대어 왜구를 물리쳤다’는 전설이 있어 모래가람, 다사강, 사천, 기문화, 두치강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리어오던 강 이름을 두꺼비 섬(蟾)자를 붙여 ‘섬진강’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달빛을 섬광(蟾光)이라고 하듯이 ‘달의 강’이란 뜻이 담겨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팝나무>
섬진강이 관통하는 전라북도 임실군에는 산자수명(山紫水明)하여 볼거리도 많고 자랑거리도 많지만 그중에서도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제11-5호)로 지정된 필봉농악(筆峰農樂)과 섬진강에서 태어나서 섬진강에서 자라고 섬진강변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정년퇴직하였으며, 지금도 섬진강을 노래하는 움직이는 섬진강 김용택(金龍澤, 1948∼ )시인이 있다.
<김용택시인과 함께~ 현수막>
<필봉산>
새벽부터 부산을 떨며 출발한 버스는 수도권을 벗어나 봄 마중 가는 차들이 많아 고속도로가 막혀 예정시간 훌쩍 넘겨 임실군 강천면 필봉리에 있는 <필봉농악공연장>에 도착한다. 공연장 주변에는 필봉농악전수관, 교육관, 풍물체험관, 풍물박물관, 한옥체험관 등이 지형의 경사에 맞게 잘 배치되어 있다.
<필봉농악공연장 등 배치도-네이버 캡쳐>
농악공연장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다 시간이 되자 두 명의 여자 명창이 차례로 나와 춘향가 중에 나오는 ‘쑥대머리’를 옥중에서 이도령을 사무치게 기다리는 심정으로 애처롭게 뽑아대고, 다른 명창은 ‘수중가’로 토끼의 간을 원하는 별주부를 토끼가 희롱한다. 날개를 단 천사들이 나와서 날개를 펄럭인다. 어느 때는 활짝 핀 연꽃 같고, 어느 순간에는 하늘을 나는 봉황이다.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임실 땅은 선계(仙界)의 세계이다. 마지막 춤은 셋이 하나가 되어 일체감을 보여준다.
<날개 춤>
<날개 춤>
<날개 춤>
다음은 꽹과리, 징, 장구, 북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사물놀이가 천지간을 휘몰이 장단으로 휘몰아 간다. 가만히 앉아 구경하는 사람들도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손뼉을 쳐가며 장단 맞추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의 농악(農樂)은 농사일을 할 때 일꾼들의 흥을 돋우어 능률을 올리는데도 목적이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해충을 몰아내는 용도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벌래 등 해충들이 꽹과리나 징 등의 금속성 소리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물놀이>
사물놀이가 끝나고 버나돌리기 공연이 이어진다. 두 명의 버나잽이가 무대에서 내려와 대접부터 돌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일명 대접돌리기라고도 하는데 쳇바퀴나 대접 등을 앵두나무 막대기나 담뱃대 등으로 돌리는 묘기이다. 버나돌리기에 쓰이는 기구는 버나·대야·대접과 이것을 돌리는 데 사용하는 앵두나무 막대기, 담뱃대, 자새칼 등이다. 그리고 난타공연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난타는 한국 전통가락인 사물놀이 리듬을 소재로 주방 등 두드릴 수 있는 공간이면 연주가 가능한 뮤지컬 퍼포먼스다.
<버나돌리기>
<난타>
풍물체험관에서 준비한 점심을 한 후 김용택시인의 생가 겸 문학관이 있는 임실군 덕치면 장암리 진메마을로 간다. 마을 입구 느티나무 아래에는 시인을 만나러 온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시인은 무어라고 섬진강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를 하는데 주변의 소음이 크고 스피커의 소리가 잘 안 들려 내용은 잘 모르겠다. 아마 “섬진강은 자연 그대로 굽이굽이 흘러가는 강이다. 저 만큼 보이는 가 싶으면 어느새 강이 사라져 안 보이고 다가가면 다시 나타나는 강이다. 이 얼마나 멋지냐∼”라고 강조할 것 같다.
<김용택시인>
일 년 전쯤 섬진강걷기를 하면서 집을 들렸을 때에는 “섬진강의 아름다운 잔물결이 보인다”는 뜻의 ‘관란헌(觀瀾軒)’이란 시인의 서재 현판이 지금은 회문재(回文齋)로 바뀌었다. 마을 뒷산이 남부군사령부가 있었던 회문산(回文山, 830m)에서 섬진강을 더 멀리 보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의도적인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섬진강은 그냥 바라만 봐도 누구나 시인의 마음이다.
<회문재(回文齋)>
김용택시인은 이곳 진메마을에서 태어나 독서를 좋아했고, 순창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직 하였다. 그는 폴 발레리(1871∼1945)의 시 중 “바람이 분다/살아야 겠다”를 늘 가슴에 새겨두고 삶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되었으며, 김수영의 <풀>을 읽고 작은 풀을 간단하면서도 정확한 느낌으로 표현한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1982년 창작과 비평사의 <21인 신작 시집>에 시 <섬진강>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김용택시인의 생가>
그는 섬진강에 대하여 “나의 모든 글은 거기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고 끝이 날 것을 믿으며 내 시는 이 작은 마을에 있는 한 그루 나무이기를 원한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그는 모더니즘이나 민중문학 등의 문학적 흐름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시로 독자들을 감동시킨다. 대상일 뿐인 자연을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여 절제된 언어로 형상화 하는 김용택은 섬진강의 김소월을 꿈꾸는지도 모르겠다.
<진메마을 느티나무>
<진메마을 느티나무>
<진메마을 앞 섬진강>
또 그는 섬진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진메마을에서 구담마을까지 약7㎞라고 한다. 강변길 곳곳에는 시인의 시비가 서있어 가는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나 찾다가/텃밭에/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예쁜 여자랑 손잡고/섬진강 봄물 따라/매화꽃 보러 간줄 알그라(김용택의 봄날)” 예쁜 여자 손잡고 보러 갔던 그 매화꽃은 알토란같은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섬진강변 따라 가로수로 늘어 서있다.
<김용택시비-봄날>
<매실>
<매실나무 가로수>
섬진강 물 따라 내 발은 바르게 걸어가는 것 같지만 지나온 자국은 뱀 같이 꼬불꼬불한 내 인생의 행적(行蹟) 같다. 동자바위 전설이 있는 천담마을 지나 찔레꽃 향을 맡으며 봄의 여운을 느끼려는 순간, 강 건너 순창군 동계면에 있는 산은 무슨 몹쓸 병에 걸렸는지 산의 피복을 벗겨 버렸다. 주변의 남아 있는 나무들이 생생한 것으로 보아 수종(樹種)개량을 위한 인간의 횡포가 아닌지 의심이 간다. 그 숲에서 살던 수많은 생명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바라보는 내 가슴이 아프다.
<천담마을 앞 섬진강>
<찔레꽃>
<피복이 벗겨진 산>
구담마을 입구에는 닥나무를 삶아 한지(韓紙)를 만들던 가마가 잡초에 휘감겨 잠을 잔다. 강변에 닥나무가 많고 물이 맑고 깨끗하여 제 빛깔이 나는 백지(白紙)는 이곳에서 만든 것뿐이란다. 오래 전부터 대형 솥을 걸어 닥나무를 삶아 너벙바위에 널어놓고, 이물질이 빠져 나갈 때까지 방망이로 두드리고 물에 헹구어 원색의 종이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 잡초 속에는 120여년의 역사를 가진 가마솥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고, 그 밑 잡초 속에는 붉은 작약(芍藥)이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활짝 폈다.
<닥나무 삶던 솥-2016년2월 촬영>
<닥나무 삶던 솥-잡초에 묻혀 있슴>
<작약>
광양의 매화와는 차원이 다른 매화마을 구담마을은 산언덕을 의지하여 마을이 아늑하게 들어서있다. 구담(九潭)이란 마을 이름은 본래 안담울이었으나 마을 앞을 흐르는 섬진강에 자라(龜)가 많이 서식한다고 하여 구담(龜潭)이라 했으며, 일설에는 강줄기에 아홉 개의 소(沼)가 있다고 하여 구담(九潭)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매화가 만개할 때에는 여기를 찾아온 사람들이 매화를 감상해야 할지, 강물을 쳐다보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다고 한다.
<구담마을 전경>
신우대 숲을 지나 마을회관 앞으로 하여 당산나무가 있는 언덕은 1998년 영화 <아름다운 시절>을 촬영한 장소이다. 영화의 내용은 “좌·우익의 대립으로 인한 죽음·갈등·가난 그리고 한국전쟁을 전후한 암울한 시대가 배경이었으니 결코 ‘아름다운 시절’은 아니었을 텐데, 영화는 역설적으로 너무나 아름다워 대종상의 작품상 감독상 등 6개 부분, 도쿄영화제 대상 등 국·내외 영화제를 휩쓸었다고 한다.
<영화 아름다운 시절 촬영장소>
활처럼 휘어져 흐르는 섬진강은 당산에 서서 보는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돌 사이로 물살이 쌔게 흐르는 징검다리를 건너면 전북 순창군 동계면 내룡마을이다. 징검다리 대신 안전하게 시멘트다리를 건너 군계(郡界)를 넘는다. 장군목마을에는 농촌주택을 개량하여 새로 지은 집이 많이 보이는데, 빈집도 보인다. 어느 집은 아예 인적이 끊겨 폭삭 주저앉은 집이 터를 지킨다.
<임실에서 순창으로 굽이치는 섬진강>
<섬진강 징검다리>
<폭삭 주저 앉은 집>
내룡마을 낮은 언덕을 넘어 서면 장군목 바위틈에 요강바위가 입을 딱 벌린다. 섬진강이 흐르는 장군목은 풍수지리상 용궐산(龍闕山, 647m) 장군대좌로 장군자리라는 설과, 임금의 옥경(玉莖)을 상징하는 순창 제일의 명당으로서 용골산(龍骨山, 645m)의 지맥을 형상화 하였다는 이야기가 각각 전해지고 있다.
<요강바위 입구>
요강바위는 장군목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바위로 내룡마을 사람들이 수호신처럼 받들고 있다. 요강처럼 가운데가 움푹 파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가로 2.7m, 세로 4m, 깊이 2m로 무게가 무려 15톤이나 된다고 한다. 장군목의 지명답게 건장한 아들을 갖길 원하는 부부가 이 바위에 앉아 지성을 들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또한 용의 궁궐터라 하여 심신이 아픈 이들의 치유 터로도 이용되었고, 한국전쟁 때에는 바위 속에 몸을 숨겨 화를 모면하기도 하였다. 한때 도난당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예전 그대로 있다.
<요강바위>
요강바위를 비롯한 깊은 주름살이 패인 바위들이 3㎞까지 길고 넓게 펼쳐진다. 오랜 세월을 흐르는 물과 얼마나 씨름 했을까? 거센 물살이 수 만년 동안 다듬어 놓은 조각(彫刻)품들은 야외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사람만 건널 수 있는 장군목 현수교(懸垂橋) 아래 강물은 바위를 씻어주며 오늘도 흐른다.
<장군목 현수교>
섬진강은 순창군부터 적성강(赤城江)으로 이름이 바뀐다. 현수교를 건너 석산리 쪽으로 내려오니 큰 바위에 ‘石門(석문)’이란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조선 현종(재위 1659∼1674) 때 양운거(楊雲擧)라는 선비가 흉년이 들 때마다 이웃을 도와주어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임금이 관직을 하사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풍류를 즐기며 여생을 보낸 종호정(鐘湖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아볼 수가 없고 ‘石門(석문)’이란 큰 글씨만 바위에 남아 있다.
<석문바위>
바위에 부딪치듯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며 흐르는 섬진강 물을 따라 한없이 따라 가고 싶지만 해는 벌써 옆으로 길게 눕는다. 정말 김용택시인이 읊은 “꽃이 핍니다/꽃이 집니다/꽃피고 지는 곳/강물입니다/강 같은 내 세월이었지요<강 같은 세월>”이 섬진강이었다. 섬진강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의 석양은 하늘을 더 붉게 물들인다.
<시비-강 같은 세월>
<논산 근방의 석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