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마산과 아차산성
용마산과 아차산성
(2017년 1월 7일)
瓦也 정유순
매월 첫 번째 주말이면 고교동문들과 서울 근교의 산행을 하는데 여러 개인 일정이 겹쳐 제대로 참석하지 못하다가 신년을 맞이하여 다른 일정 보다 우선하여 한양도성의 외사산(外四山) 중 동쪽에 해당하는 용마산으로 반가운 얼굴들과 함께 걸음을 같이 했다.
<아차산-용마산 등산 안내도>
<용마산 올라 가는 길>
서울(한양)도성의 동서남북 기준점이 되는 곳에는 동쪽으로 낙산(駱山, 또는 타락산), 서쪽으로 인왕산(仁王山), 남쪽으로는 남산(南山, 또는 목멱산), 북쪽으로는 북악산(北岳山, 또는 백악산)을 내사산(內四山)으로 한다. 그리고 밖으로 둘러싸고 있는 용마산(동, 348m), 덕양산(서, 125m), 관악산(남, 629m), 북한산(또는 삼각산, 837m)으로 외사산을 구분한다.
<김정호의 경조오부도-네이버 캡쳐>
또한 경복궁을 중심으로 뒷산인 북악을 주산으로 삼고, 왼편에 해당하는 동편의 낙산을 좌청룡(左靑龍), 오른편에 해당하는 서편의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 앞쪽에 해당하는 남쪽의 남산을 전주작(前朱雀), 뒤쪽에 해당하는 북쪽의 북악산을 후현무(後玄武)로 하여 사신(四神)을 동서남북에 배치하였다. 이는 한양도성의 안녕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바라는 천문오행사상(天文五行思想)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용마산-아차산방향에서>
지하철 7호선 용마산역에서 지정된 약속시간에 출발하여 아파트 단지 옆으로 하여 용마산정상 길로 접어든다. 주말이라 등산로에는 산을 찾아온 사람들로 붐빈다. 가파른 계단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8부 능선쯤에는 용마산정(龍馬山亭)이라는 팔각정이 나온다. 주변에는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체육시설이 완비되어 있고, 이용하는 주민들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맺힌다.
<용마산정 원경>
<용마산정 현판>
<용마산 실내 체육시설>
날씨는 포근하고 맑은 날씨이지만 미세먼지는 하늘을 잔뜩 흐리게 하여 시야를 어둡게 한다. 멀리 남산타워는 물론 북한산 백운대 등 사방 100리가 훤하게 보일 것 같은데, 겨우 코앞의 중랑천변의 동부간선으로 바쁘게 달리는 자동차 정도가 보일 뿐이다.
<용마산에서 본 흐린 서울>
용마산(龍馬山)은 아차산의 최고봉으로 면목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망우리공원, 중곡동 간의 산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등산로를 통해 아차산성을 거쳐 어린이대공원 후문 근처까지 이어진다. 따라서 용마산은 아차산의 최고봉으로 ‘용마봉’이라고도 불린다.
<용마산 용마봉>
용마봉 정상에는 1910년 우리나라 최초로 토지사업을 위하여 설치한 <용마산 대삼각본점>으로, 서울 양천구 신정동 갈산공원 정상에 있는 <갈산 대삼각본점>과 더불어 서울에 있는 2점 중 하나이다.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시설물을 정비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용마산 대삼각본점>
삼각점은 국토지리정보원(국토교통부)이 시행하는 기본측량을 위한 국가기준점이다. 규모에 따라 1∼4등급으로 분류하는데 1등 삼각점을 대삼각본점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지적(地籍)측량을 하여 우리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일부에서는 이를 사용할 만큼 획기적인 기술이었다. 현재는 최첨단 위성측량장비가 개발되어 사용빈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으나 역사·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용마산 대삼각본점 연혁>
용마봉 정상에서 헬기장 쪽으로 체력단련시설이 있는 곳에서는 여성 등산객 한분이 내 팔뚝 굵기보다 더 굵은 훌라후프를 돌리는데 허리의 유연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헬기장을 지나 조금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사적 제455호로 지정된 용마산 4보루가 있다.
<용마산 훌라후프 여인>
보루(堡壘)는 적의 공격을 제어하는 데 매우 유리한 천연요새(要塞)이거나, 적군의 접근이나 공격을 막기 위해 튼튼하게 쌓은 진지를 말한다. 용마산과 아차산(阿且山) 일대에는 17여개의 보루유적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중 10여개의 보루가 고구려의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이 보루들은 현재 남한에 남아 있는 고구려 관련 유적으로써 고구려 관련 고고학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용마산 제4보루(고구려)>
용마산 4보루에서 데크와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다시 올라오면 아차산 정상이며 아차산 4보루가 나온다. 보루 위에는 제법 평평하게 단(壇) 같이 만들어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한다. 아마 1500여 년 전 당시에 우리의 조상들은 후손들이 이곳에 와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미리 터를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한 가지 흠이라면 출입을 금지하는 금줄 안에서 이를 무시하고 취사행위를 하는 사람이 있어 ‘옥에 티’다.
<아차산 제4보루 원경>
<아차산 제4보루 금줄 안에서 취사 행위>
아차산(287m)이라는 이름은 조선 명종 때 홍계관이라는 점을 아주 잘 치는 사람이 있다고 하여 임금이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쥐가 들어 있는 궤짝으로 능력을 시험하였는데, 그가 숫자를 맞히지 못하자 사형을 명하였다. 그런데 조금 후에 암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가 들어 있어서 “아차”하고 사형을 중지를 명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어 홍계관은 죽어버렸고, 이후 사형집행의 장소 위쪽 산을 아차산으로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아차산 능선의 돌탑>
아차산은 예로부터 한강을 차지하는 자가 삼한일통(三韓一統)을 이룬다는 말처럼 고대부터 각국의 각축장으로, 고려 때에는 광나루와 함께 시인과 묵객들이 찾아와 자연을 즐겼으며, 조선조에는 숲이 우거져 호랑이 등 많은 야생동물들이 살고 있어 왕의 사냥터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아차산 해맞이 기념비>
보루 능선을 타고 어린이대공원 후문 쪽으로 내려오면 하나의 암반으로 이루어진 마당바위가 나오고, 암반 상부에는 고구려정(高句麗亭)이 탁 버티고 서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1984년 콘크리트 구조로 건축한 팔각정이 있었으나 노후로 인해 이를 철거하고, 2009년 7월에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어 팔각정을 고구려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아차산 고구려정>
고구려정은 기둥을 가운데 배가 불룩한 배흘림식으로, 자재는 뒤틀림이나 변색이 안 되는 300년 이상의 금강송이며, 기와는 평양의 안악궁 터와 아차산 홍련봉보루에서 출토된 붉은 색상 문양을, 단청은 당시의 건축문양을 재현하였다고 한다.
<고구려정 건립 연혁>
옛날의 용마산과 아차산은 한양도성의 변방 중의 변방으로 인구밀도가 거의 희박할 정도였으나, 지금은 중랑천 건너 산 너머까지 사람들이 붐비고 큰 도시를 이룬다. 한강을 중심으로 삼국 중 한성백제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가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의 북진으로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삼국의 고대 유물들이 지금도 숨 쉬고 있다는 생각에 하찮은 진토(塵土)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다시 해본다.
<어린이대공원 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