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800년 은행나무길
원주 800년 은행나무길
(2016. 11. 3)
瓦也 정유순
가을이 무르 익어가는 날에 시린 안개 자욱하여 손은 자꾸 호주머니 찾아가고, 밤새 무서리 내려 그 푸르던 고추 잎은 빨간 고추만 남겨둔 채 꼼짝 못하고 시들어 버렸구나. 안개를 가르고 달리던 버스가 멈춘 곳은 의민공사우(懿愍公祠宇)가 있는 원주시 지정면 안창1리 마을로 참나무 두 그루가 그나마 우뚝 서서 길잡이를 해준다.
<서리 맞은 고추>
<안개 속의 참나무>
우민공사우(懿愍公祠宇)는 조선 선조의 장인인 김제남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김제남(金悌男, 1562∼1613)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이조좌랑 때인 1602년에 둘째 딸이 선조의 계비(인목대비)로 뽑혀 영창대군을 낳았으나, 이미 공빈 김씨 소생인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 후였고 김제남은 연흥부원군으로 봉해졌다. 그 후 적통론(嫡統論)에 휘말려 인목대비가 폐비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증살(蒸殺)되었으며 김제남은 아들과 함께 사약을 받고 처형된다.
<의민사문(懿愍祠門)>
이 같은 폐륜행위를 잡고자 일어난 인조반정(1623년)으로 인목대비는 복원되었고, 김제남도 바로 복원되어 의민(懿愍)이란 시호(諡號)를 받았다. 그리고 인조는 특명을 내려 그의 고향에 사당을 지었다. 사당은 정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솟을대문이 있고 주변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다. 시호는 왕이나 사대부들이 죽은 뒤에 그 공덕을 찬양하여 추증하는 호(號)를 말한다. 묘는 사당 뒤편에 있다.
<의민사(懿愍祠)>
의민사우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는 김제남의 신도비가 500년 된 느티나무 옆에 있다. 신도비(神道碑)는 묘역에 새우는 비석의 일종으로 본래는 임금이나 2품 이상의 고관을 지낸 사람에 한해 세울 수 있었으나, 공신이나 저명한 유학자인 경우 왕명에 의해 새울 수 있으며, 보통 무덤의 동남쪽에 세운다. 김제남의 신도비는 신흠(申欽)이 짓고, 심열(沈悅)이 썼으며, 전서체 제액(題額)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고 한다. 그러나 얼룩이 진 비석의 글씨는 읽기가 힘들었다.
<김제남의 신도비>
<신도비 옆 수령 500년 느티나무>
김제남신도비가 있는 곳에서 남서쪽으로 1㎞쯤 떨어진 곳에는 흥법사지가 있다. 영봉산흥법사(靈鳳山興法寺)는 창건연대가 불분명하지만 절터가 약1만여 평에 이르렀다는 설로 보아 당대에는 상당히 큰 사찰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진공대사(眞空大師) 부도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말엽의 사찰로 추정할 수 있고, 진공대사가 구산선문 중 봉림산파에 소속된 것으로 미루어 선종계열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흥법사지(興法寺址)에는 진공대사의 탑비 중 귀부(龜趺)와 이수(螭首)가 있다. 진공대사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고려태조의 왕사가 되었고, 940년(태조 23년)에 돌아가시자 태조가 직접 글을 짓고 왕희지체(王羲之體)로 새긴 비석은 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진공대사탑비 귀부와 이수)>
비의 받침 부분인 귀부는 짧은 목에 비늘을 새긴 용의 모습으로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비의 덮게 부분인 이수의 앞면 중앙에는 전서체(篆書體)로 ‘眞空大師(진공대사)’라고 새겨 있으며, 이 글의 중심으로 구름 속에 상하좌우로 얽힌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노려보고 있다. 돌을 떡 주무르듯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어 당시 석각(石刻)예술의 극치를 볼 수 있다. 또 이곳에는 흥법사지3층석탑이 있다. 이 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몸체를 갖춘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탑의 모습이다.
<흥법사 3층석탑>
다시 동화공단로로 나와 안창대교를 건너 문막읍으로 접어들어 코리아승마클럽을 끼고 돌아 섬강 굽이 길로 접어든다. 섬강은 태기산(泰岐山, 1261m)에서 발원하여 강원 남서부를 흘러 강원도와 경기도의 경계지점인 남한강으로 합류한다. 섬강은 협곡을 통과하여 경승지가 많다. 특히 간현(艮峴)지역은 경치가 빼어나 찾아오는 인파가 많은데, 간현 병풍바위에 올라앉은 바위 생김새가 두꺼비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섬강(蟾江)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가 있다.
<섬강>
섬강은 자욱한 안개 속에서도 여울을 이뤄 낮고 낮은 곳으로 흐르고, 강변 낮은 언덕으로는 데크로 설치한 길을 따라 발걸음도 흐른다. 흐르는 물소리에 발맞추어 건등리 섬강양수장에 도착하니 아침 안개가 자취를 감춘다. 강안(江岸) 양쪽 산의 단풍들은 곱게 물들다 말라비틀어지는데, 기후변화로 인한 지구온난화 영향인지 걱정이 앞선다.
<섬강양수장>
<섬강 데크길>
데크 길을 따라 앞으로 조금 나가니 건등산(260m) 끝자락에는 별장 같은 집들이 섬강을 호위하듯 아래를 굽어보며 일렬로 늘어섰는데, 산자락 끝 지점에는 ‘호암빌리지’라는 표지석이 나온다. 좀처럼 인기척이 없고 조용하여 빈집인가 싶었는데 이를 눈치 챈 강아지가 짖어댄다. 곳곳에 “물놀이금지구역”이 설정되어 있는데 “인어공주도 입장불가”라고 쓴 기발한 현수막도 눈에 띈다. 건등산(建登山)은 왕건(王建)이 후백제 견훤(甄萱)과 싸우기 위해 올랐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호암빌리지 표지석>
<물놀이 금지구역 현수막>
물억새와 갈대 등 수변식물이 잘 발달된 하천부지로 내려와 실바람에 살랑대는 억새밭 사이로 콧노래 흥얼대며 가벼운 발걸음을 옮긴다. 높이 자란 왕버들 가지에는 까치가 둥지를 틀고 문막대교 아래로는 인조잔디축구장 등 둔치 체육시설이 바람에 나르는 낙엽 한 잎처럼 쓸쓸하다.
<물억새>
<까치집>
<문막대교 아래 인조잔디구장>
문막교를 건너는데 섬강 가운데에는 왜가리 한 마리가 먹이를 노려보며 망중한을 즐기고, 강 건너 다리 밑에는 훈련 나온 군인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눈에 들어온다. 양지 바른 곳에 앉아 오전을 정리하고 오늘의 종점을 향해 발을 옮긴다. 섬강도 다른 하천과 마찬가지로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가시박이 넝쿨을 이루어 다른 초목들의 숨통을 조인다.
<섬강의 왜가리>
<섬강의 가시박>
생태교란종인 가시박을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을 하며 강둑으로 올라오니 ‘원주반계리 은행나무’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천연기념물(제167호)로 지정된 이 은행나무는 높이 34.5m,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가 16.9m, 밑동 둘레가 14.5m에 이르며 가지는 동서로 37.5m, 남북으로 31m 정도로 넓게 퍼져 있다. 정확한 수령(樹齡)은 알 수 없으나 약 800년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반계리 은행나무>
이 나무는 예전에 이 마을에 살았던 성주이씨 한 사람이 심었다고도 하고, 또 오랜 옛날에 어떤 대사가 지나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신 후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꽂아 놓고 간 것이 자란 것이라고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속에 커다란 흰 뱀이 살고 있어서 아무도 손을 못 대는 신성한 나무로 여겼다.
<은행나무 가슴부위>
가을에 이 나무의 단풍이 일시에 들면, 다음 해에 풍년이 든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줄기와 가지가 균형 있게 퍼져 있어 보호되고 있는 은행나무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나무로 알려져 있다. 은행잎은 이미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어도 쓸쓸하고 허전함보다는 바닥에 떨어진 잎이 더 푹신하고, 오후 햇살에 더 아름다운 찬란한 빛이 되어 오늘 하루를 휘 감는다.
<건등산>